아열대기후 약점 극복하고 세계적 위스키로 발돋움한 대만 ‘카발란’

열기가 화학 반응 크게 촉진
카발란 탄생지인 대만 이란현은 위스키 제조업계 상식으로 볼 때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여름철 낮 기온은 섭씨 40도를 웃돌고 습도는 70~80%에 달한다. 스코틀랜드 전문가들이 "이곳에서 위스키를 만드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비웃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연간 증발량(Angel's Share)이 10~15%에 달한다. 숙성 기간이 길어지면 오크통 절반 이상이 비는 경제적 손실을 감당해야 한다.카발란 모기업인 킹카그룹은 이 역경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고온다습한 기후를 촉매로 재해석했다. '위스키의 성인'으로 불리는 고(故) 짐 스완 박사의 조력 하에 카발란은 열기가 원액과 오크통의 화학 반응을 크게 촉진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대만에서 진행한 4년 숙성이 스코틀랜드의 12~15년 숙성에 맞먹는 풍미를 낼 수 있다는 이른바 속성 숙성(accelerated maturation) 공학을 고안해낸 것이다.
카발란의 마케팅 성공을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무기는 'STR(Shaved, Toasted, Re-charred)' 공정이다. 아열대기후에서 위스키를 숙성시키면 나무의 거친 탄닌 성분이 원액에 과하게 스며들 위험이 크다. 이를 해결하고자 카발란은 위스키 숙성에 사용하는 와인 오크통 내부를 대패질하고(Shaved), 완만하게 굽고(Toasted), 강하게 태우는(Re-charred) 혁신적인 리사이클링 공법을 도입했다.
이 과정을 통해 오크통에 남아 있던 당분이 캐러멜과 바닐라향으로 바뀌었다. 위스키에는 대만 특유의 망고,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 풍미가 짙게 뱄다. 이 공법으로 완성한 '카발란 솔리스트 비노 바리끄'의 경우 숙성 연수가 4~5년에 불과하지만 수십 년 된 스카치위스키를 능가하는 복잡 미묘한 맛을 선보이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카발란이 글로벌 시장의 냉대를 찬사로 바꾼 결정적 계기는 2010년 1월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번스 나이트(Burns Night)' 블라인드 테이스팅 행사였다. 스코틀랜드의 전설적인 시인 로버트 번스를 기리는 이 엄숙한 자리에서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The Times)는 재미 삼아 대만의 신생 위스키 카발란을 시음 리스트에 포함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3종의 프리미엄 스카치위스키와 1종의 영국 위스키를 제치고, 이름조차 생소한 대만의 카발란 클래식이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당시 심사위원장이던 찰스 매클린은 "세상에 이런 일이(Oh My God)"라고 외치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숙성 연수와 혈통을 신봉하던 위스키업계의 전통적 위계질서가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 사건은 카발란에 '스카치위스키를 이긴 대만의 자부심'이라는 강력한 마케팅 서사를 부여했다.

K-위스키 시대를 꿈꾸며
카발란에도 위기는 있었다. 성공 가도에 오르기 직전인 2008년 카발란은 모기업 킹카그룹의 '멜라민 파동'으로 절체절명 위기에 직면했다. 주력 제품인 캔커피에서 멜라민이 검출된 것. 킹카그룹은 정부가 나서기도 전에 선제적으로 전 제품 리콜을 결정하고 대국민 사과를 발표했다.수천억 원 손실을 감수하고 선택한 이 정직한 대응은 오히려 킹카그룹이 믿을 수 있는 기업이라는 신뢰를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멜라민 위기를 정면 돌파한 기업의 진정성은 곧 출시된 카발란 위스키 품질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고, 이는 카발란이 프리미엄 브랜드로서 시장에 안착하는 견고한 도덕적 기반이 됐다.
카발란의 마케팅 전략은 한국시장에서도 빛을 발했다. 2017년 공식 수입 이후 카발란은 스스로를 문화적 아이콘으로 포지셔닝했다. 특히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 주요 소품으로 등장하며 '박찬욱 위스키'라는 별칭을 얻었다. 여기에 BTS(방탄소년단) 멤버 RM 등 영향력 있는 셀럽의 추천이 더해지면서 카발란은 한국 MZ세대 사이에서 힙한 싱글 몰트로 자리 잡았다.
카발란의 성공은 위스키 생산지로 발돋움하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한국에서는 신생 위스키 증류소가 3~4곳 생겨나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과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포기했지만, 정교한 기술력에 한국의 뚜렷한 사계절을 더해 한국만의 위스키를 만들려는 시도가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몇몇 증류소의 원액은 국제 주류 품평회에서 대상을 받거나 금메달을 휩쓸며 세계 전문가들에게 한국 위스키의 잠재력을 증명해 보였다. 카발란이 대만의 뜨거운 열기를 자산으로 바꿨듯이 한국의 사계절이 빚어낸 'K-위스키' 또한 새로운 흐름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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