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예방도 실전처럼…대국민 훈련 나선 싱가포르[동남아시아 TODAY]
[편집자주] 한국에서 '가성비 관광지'와 '저임금 생산기지'로만 여겨지던 동남아시아가 뜨고 있습니다. 높은 잠재력의 소비시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미중 패권 경쟁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동남아를 모릅니다. 더욱 가깝게 지내야 하는 이웃인 동남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서강대 동아연구소 필자들이 격주로 소개합니다.

지난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캄보디아에서 드러난 초국경 온라인 사기 범죄 조직에 주목하며 캄보디아 정부와 중국계 범죄 네트워크를 비판하고 있을 때 가장 난처한 위치에 놓인 국가 가운데 하나가 싱가포르였다. 여러 수사와 국제 보도를 통해 싱가포르가 캄보디아 기반 중국계 초국경 범죄 조직의 핵심 자금 세탁 허브 가운데 하나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특히 복합 사기 집단인 프린스 그룹의 수장, 천즈와 관련된 범죄 네트워크가 싱가포르에 대규모 법인과 패밀리 오피스를 설립하고, 고급 부동산과 요트 등 초호화 자산을 활용해 자금을 세탁해 온 정황이 드러나면서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여기에 더해 테더, 비트코인 같은 스테이블 코인 및 암호화폐 역시 싱가포르의 개방적 금융 환경 속에서 활발히 이동하며 세탁됐을 가능성이 지속해서 제기됐다. 글로벌 자본 유치에 적극적이고 금융 이동의 자유도가 높은 싱가포르의 구조 자체가 초국경 범죄 자본에도 일정 부분 활용됐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자금 세탁 범죄에 '싱가포르 워싱' 오명…싱가포르 국민 피해도 상당

이러한 현상은 서구 언론에서 이른바 '싱가포르 워싱'(Singapore-washing)이라는 표현으로 불렸는데, 이는 범죄 조직이 싱가포르의 안정적 금융 이미지와 국제적 신뢰도를 이용해 자금의 출처를 합법적으로 포장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미국 제재 명단에는 싱가포르 등록 기업들과 싱가포르 국적자 일부가 포함되기도 했다.
초국경 온라인 사기 범죄 사건에서 싱가포르를 곤혹스럽게 했던 지점은 싱가포르인들 역시 범죄 집단의 주요 타깃이었다는 사실이다. 싱가포르가 동남아시아 내부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구매력과 금융 접근성을 가진 사회인 만큼 싱가포르 시민들 역시 국제 온라인 사기 범죄의 주요 타깃 가운데 하나였다. 무엇보다 인구의 75% 이상이 중국계인 싱가포르 인구 구성의 특성상 그들이 중국계 범죄 집단의 1차 표적이었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싱가포르가 범죄 자금 세탁의 허브라는 의혹을 받는 상황 속에서 피해국이라는 위치를 전면적으로 내세우기 어렵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신뢰와 신용은 글로벌 금융 허브의 핵심 자산이기에 범죄 조직의 자금 세탁 기지라는 이미지는 국가 경제와 금융 시스템의 국제적 신임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는 대중적 관심에서 멀어진 측면이 있는 캄보디아 및 동남아시아 기반 온라인 사기 범죄 문제가 싱가포르에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데이터를 통해 살펴보면 2025년 싱가포르의 온라인 사기 범죄는 발생 건수와 피해액 모두 전년 대비 감소한 측면은 있지만, 여전히 매우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2025년 전체 사이버 범죄 및 관련 사건 수는 총 4만 1974건으로 집계됐는데, 이 가운데 사기 범죄는 3만 7308건으로 전체의 약 88.9%를 차지했다. 전년도 5만 1501건과 비교할 때 상당수 감소한 수치다. 전체 사기 피해액 역시 약 9억 1310만 싱가포르 달러(약 9300억~9500억 원)로 집계돼 전년 대비 약 17.9% 감소했다. 이때 전체 사건의 81.8%는 피해자가 직접 자금을 송금한 형태로 나타났다.
피해액 기준 상위 사기 유형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투자 사기였다. 투자 사기는 약 3억 3620만 싱가포르 달러(약 3400억 원)의 피해를 기록했으며, 총 5462건이 발생했다. 그다음으로 정부 관계자 사칭 사기, 취업 사기, 기업 이메일 침해 사기, 전자상거래 사기 등의 순이었다. 가상자산 관련 피해액의 경우 2025년 총 1억 8220만 싱가포르 달러(약 1850억~1900억 원)를 기록해 전체 사기 피해액의 약 20%를 차지했다.
싱가포르, 다각도 사기 대응 체계 강화…예방 위한 '새로운 근육' 기르기

싱가포르 정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법적, 제도적, 기술적 대응 체계를 빠르게 강화하고 있다. 2025년 시행된 스캠보호법(Protection from Scams Act)은 경찰이 사기 피해 가능성이 높은 개인의 은행 거래를 강제로 제한할 수 있도록 한 것이고, 동시에 금융기관과 통신사의 책임을 강화하는 공동 책임 프레임워크를 확대했다. 유심 카드 불법 거래 규제, 암호화폐 추적 전담팀 신설, 머니 락(Money Lock) 기능 도입, 스캠 실드(ScamShield) 플랫폼으로의 통합 등 기술 기반 대응 역시 병행하고 있다.
국제 공조 측면에서도 싱가포르는 한국도 참여하고 있는 '프런티어 플러스(FRONTIER+) 네트워크'를 통해 여러 국가와 실시간 정보 공유 및 합동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그 결과 2025년 피해 예방 규모는 약 3억 4800만 싱가포르 달러(약 3500억 원)로 집계됐다. 또한 약 1억 4050만 싱가포르 달러(약 1400억 원)의 자금이 동결 및 회수됐다.
싱가포르 정부는 더 나아가 2026년 현재 전국 단위의 모의 사기 훈련(National Simulated Scams Exercise)까지 계획해 실행하고 있다. '국가 모의 사기 훈련'은 싱가포르 사이버보안청(CSA)과 정부 관계 부처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대국민 사기 예방 훈련으로 초국경 온라인 사기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시민 개개인의 대응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싱가포르 정부에서는 시민들의 '새로운 근육'을 기르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해당 훈련은 특히 '정부 관계자 사칭 사기' 대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25년 상반기 기준 해당 유형의 사기 사건이 전년 동기 대비 약 3배 증가했고, 피해 규모 역시 급격히 확대됐기 때문이다. 사기범들은 일반 전화나 왓츠앱 등을 이용해 경찰, 출입국관리국, 세무기관 등 정부 기관 관계자를 사칭하고, 체포·추방·벌금 부과 등을 언급하며 피해자에게 강한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사기범들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공립 기관의 시민들에 대한 통제력이 높은 싱가포르의 특징을 고려한 결과다. 싱가포르 정부는 이러한 수법이 시민들의 국가 제도와 공권력에 대한 신뢰 자체를 악용할 뿐만 아니라 신뢰 자체를 왜곡하거나 저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훈련은 2026년 3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약 6개월 동안 진행되는데, 참가자들은 예고되지 않은 시점에 정부 기관을 사칭하는 자동 음성 전화를 받게 된다. 모의 사기범들은 실제 범죄 조직과 유사한 방식으로 체포, 추방, 벌금 등을 언급하며 공포감과 긴급성을 조성하고, 일부 시나리오에서는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참가자와 상호작용하며 개인정보나 금융 정보를 요구하는 방식도 도입됐다. 싱가포르 정부는 시민들이 통제된 환경 속에서 실제 사기 상황과 유사한 압박을 경험함으로써 현실 상황에서의 대응 능력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해당 훈련은 자발적 참여를 원칙으로 운영된다. 참가자는 2026년 2월부터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직접 참여 의사를 등록해야 하며, 만 15세 이상 시민만 신청할 수 있다. 신청 과정에서는 훈련 중 경미한 스트레스나 불안감이 유발될 수 있다는 점을 사전에 고지하고 동의를 받도록 설계됐다. 또한 개인정보 보호와 안전장치 역시 강조되고 있다. 훈련 과정에서 실제 금전 이체나 민감한 금융 정보 제공은 절대 요구하지 않고, 참가자가 실수로 실제 개인정보를 말하려 할 경우 시스템이 이를 감지해 즉시 통화를 종료하도록 설계됐다. 수집된 데이터 역시 익명화된 형태로만 활용되며, 향후 대국민 교육 프로그램 개선을 위한 분석 목적으로 제한적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훈련 종료 이후에는 참가자들에게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통해 사기 징후 식별법, 대응 방법, 예방 수칙 등이 제공된다. 싱가포르 정부는 일회성 체험이 아니라 반복적 학습과 행동 교정을 통해 시민들의 장기적인 경계 수준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실제로 2026년 5월 기준 이미 2000명 이상이 훈련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일부 참가자는 실제 사기 전화와 유사한 긴장감과 압박을 경험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노년층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실제 상황에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이 프로그램을 온라인 공간에만 한정하지 않고 지역사회 기반 교육과도 연계하고 있다. 지역 커뮤니티 클럽과 시민단체들은 노년층을 중심으로 안전한 인터넷 사용법, 생성형 AI 기반 딥페이크 영상 식별법, 모의 훈련 참여 방법 등을 교육하고 있고, 현장에서 직접 훈련 등록을 지원하기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캉(Sengkang)의 펀베일(Fernvale) 커뮤니티 클럽에서는 약 200명의 노년층을 대상으로 생성형 AI 악용 사례와 온라인 사기 대응 교육이 실시됐다.
싱가포르 당국은 훈련 기간 중에도 실제 사기 전화가 걸려 올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속해서 경고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시민들에게는 훈련 전화 여부와 관계없이 예기치 않은 모든 연락을 기본적으로 의심하고 경계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실제 사기로 판단될 경우 24시간 운영되는 스캠 실드와 경찰 핫라인을 통해 즉시 신고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 허브이자 강력한 행정력과 공권력을 기반으로 국가 경쟁력을 유지해 온 싱가포르 입장에서 초국경 범죄 조직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의혹은 국가 신뢰 자체를 뒤흔드는 생존의 위협에 가깝다. 국제 금융 중심지로서 싱가포르는 신뢰와 안정성이 핵심 자산이기에 범죄 자금 세탁 허브라는 이미지는 국제 사회에서의 신뢰도 저하뿐 아니라 국내 사회의 불안감 확대와도 직결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싱가포르 정부는 초국경 온라인 사기 범죄와의 대응을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국가 안보 문제로 인식하고, 관련 대응 역시 지속해서 강화하고 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실제 상황에 가까운 모의 사기 훈련을 실시한다는 발상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높은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 행정 통제력, 국가 차원의 통합 대응 체계 등을 갖춘 싱가포르와 같은 도시국가에서만 가능한 실험적 시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관련 문제가 다소 잦아든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 피해와 위험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초국경 범죄 네트워크 역시 계속 변화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싱가포르가 현재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인식하고 대응하고 있는지,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 어떠한 제도와 훈련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지를 지속해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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