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30% 오를 때 10%를 벌었다면 잘한 것인가[퇴직연금 인사이트]

한경비즈니스 외고한 2026. 5. 16.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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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명규 기자

지금 한국 퇴직연금 시장에는 두 가지 이상한 현상이 공존한다. 하나는 과소평가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폭등하자 사람들은 TDF와 자산배분 펀드의 8~10% 수익률을 우습게 본다. 뒤늦게 빚까지 내서 반도체 직접 투자에 뛰어드는 것이 현실이다. 퇴직연금의 목적이 무엇인지 잊은 채로.

다른 하나는 과대평가다. 정작 TDF와 자산배분 펀드 운용사들은 비교 기준 없이 스스로 잘했다고 한다. 어떤 기간, 어떤 대상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늘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이 나온다. 벤치마크가 없으니 반박할 방법도 없다.

가입자는 좋은 상품을 외면하고 운용사는 책임에서 자유롭다. 벤치마크가 없으면 이 두 가지는 계속된다.

◆투자에서 벤치마크란 무엇인가

벤치마크는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점이다. 절대적인 숫자가 아니라 ‘같은 조건에서 시장 평균은 얼마를 벌었는가’를 측정하는 잣대다.

예를 들어 한국 대형주에 투자하는 펀드라면 코스피200이 자연스러운 벤치마크가 된다. 펀드가 연 10%를 벌었어도 코스피200이 15% 올랐다면 그 펀드는 시장을 5%포인트 밑돈 것이다. 반대로 코스피200이 -5%일 때 펀드가 -2%를 기록했다면 절대적으로 손실이지만 시장 대비로는 3%포인트 초과 성과를 낸 것이다.

벤치마크 없이는 이 판단이 불가능하다. 숫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으면 좋은지 나쁜지 알 방법이 없다.

좋은 벤치마크가 갖춰야 할 조건은 명확하다. 첫째, 투자 가능해야 한다. 실제로 투자할 수 없는 가상의 지수는 의미가 없다. 둘째, 사전에 정해져야 한다. 결과를 보고 나서 기준을 바꾸는 것은 벤치마크가 아니다. 셋째, 비교 대상과 동일한 위험 수준을 가져야 한다. 채권 펀드를 주식 지수와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넷째, 독립적이어야 한다. 운용사 스스로 기준을 정하면 유리한 비교만 남기게 된다.

◆퇴직연금에 벤치마크가 특히 중요한 이유

일반 펀드도 벤치마크가 중요하지만 퇴직연금은 차원이 다르다. 퇴직연금은 20년, 30년짜리 투자다. 은퇴 시점에 얼마가 쌓여 있느냐가 노후의 질을 결정한다. 중간에 잘못된 운용사를 고르고도 모르고 있다가 30년 후에야 다른 사람과의 격차를 발견하는 구조가 될 수 있다.

복리의 효과는 여기서 잔인하게 작동한다. 월 50만원씩 30년간 납입한다고 가정하자. 총 납입액은 1억8000만원이다. 연 0.5%포인트 차이가 30년 후 4000만원의 격차를 만든다. 은퇴 후 1년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이 수수료와 운용 실력의 차이 때문에 조용히 사라진다. 가입자는 이 사실을 대부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시장이 좋을 때 충분히 올라줘야 한다는 것이다. 은퇴 설계에서는 하락장의 방어만큼 상승장에서의 충분한 참여가 중요하다. 양쪽 모두에서 뒤처지면 복리 효과는 반대로 작동한다.

◆지금 한국의 현실: 모두가 1등인 세계

문제는 한국 퇴직연금 시장에 제대로 된 벤치마크가 없다는 것이다. 자주, 필요할 때마다 금융사들은 수익률 광고를 낸다. 1개월 수익률 1등, 6개월 수익률 1등, 1년 수익률 1등이 동시에 난립한다. 기간을 조금씩 달리하고 비교 대상을 조금씩 다르게 고르면 어지간한 상품은 어딘가에서 1등이 될 수 있다. 비교 기준이 없으니 가능한 일이다.

타깃데이트펀드(TDF)는 더 복잡하다. TDF는 은퇴 목표 시점에 따라 2030, 2035, 2040, 2045, 2050 등 빈티지로 나뉘고 빈티지마다 주식과 채권의 비중이 다르다. 그런데 자주 빈티지까지 섞어 서로 잘했다고 한다.

글라이드가 서비스를 처음 시작했을 때 TDF 인덱스를 가장 먼저 만든 이유다. 퇴직연금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비교 기준 없이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기 때문이다. 빈티지별로 시장 전체의 평균 성과를 매달 공표하는 것, 그것이 출발점이었다.

◆호주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나

같은 문제를 먼저 직면한 나라가 있다. 호주다. 호주의 슈퍼애뉴에이션은 세계 4위 규모의 퇴직연금 시스템이다. 2025년 기준 4조3000억 호주달러(약 3800조원)의 자산이 적립돼 있다. 이 시스템도 한때 한국과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운용사마다 제 유리한 기준으로 성과를 발표하고 가입자는 비교할 방법이 없었다.

2021년 호주 정부는 이 문제를 법으로 끊었다. ‘Your Future, Your Super’라는 법안을 통해 호주 건전성감독청(APRA)에 연간 성과 테스트 실시를 의무화했다. 

◆평가 방식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각 상품의 전략적 자산배분(SAA)을 기반으로 맞춤 벤치마크를 구성한다. 자산군별로 공인된 지수를 사용한다. 호주 주식은 S&P/ASX 지수, 해외 주식은 MSCI ACWI ex Australia, 비상장 인프라는 MSCI Australia Quarterly Private Infrastructure Fund Index가 적용된다. 이 지수들을 각 펀드의 자산 비중대로 조합하면 그 펀드만을 위한 맞춤 벤치마크가 만들어진다.

평가 공식은 다음과 같다. ‘평가값=(실제 수익률 - SAA 벤치마크 수익률) - (실제 수수료 - 업계 중간값 수수료)’이다. 평가 기간은 상품 유형과 데이터 히스토리에 따라 8년 또는 9~10년이다. 단기 노이즈를 배제하고 장기 운용 역량을 보겠다는 설계다. 이 평가값이 연간 -0.50%포인트 미만이면 탈락이다.

◆제재는 즉각적이고 실질적이다

탈락하면 두 가지가 일어난다. 먼저 해당 상품의 모든 가입자에게 ‘귀하의 펀드가 성과 테스트에서 탈락했습니다’라는 공문을 의무적으로 발송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가입자 이탈이 시작된다. 2년 연속 탈락 시에는 신규 회원 모집이 즉시 금지된다. 결과는 시장을 바꿨다.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4년 만에 탈락 상품 가입자가 100만 명에서 8500명으로 줄었다. 2023년에 탈락한 97개 상품 중 52개가 이듬해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기준이 생기자 경쟁이 시작됐고, 경쟁이 시작되자 열등한 상품이 퇴출됐다.

APRA는 한발 더 나아갔다. 성과 테스트 결과를 호주 국세청의 공개 비교 도구인 ‘YourSuper’에 연동했다. 누구나 온라인에서 자신의 펀드가 테스트를 통과했는지 수수료가 업계 평균 대비 어떤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정보의 비대칭이 사라졌다.

◆한국에 필요한 것

호주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시장이 알아서 정화되길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준을 법으로 만들고, 결과를 공개하고, 탈락에 실질적인 제재를 가해야 한다.

한국 퇴직연금 시장에 당장 필요한 제도적 장치는 세 가지다. 첫째, 법정 벤치마크의 제정이다. 각각에 대한 공식 비교 지수를 법령 또는 고용노동부 고시로 명시해야 한다. 자산군별 비교 지수, 가중 방식, 리밸런싱 주기를 사전에 확정해야 한다. 운용사가 유리한 비교 대상을 스스로 고르는 구조를 끝내야 한다.

둘째, 연간 성과 테스트의 의무화다. 매년 X년 수익률을 법정 벤치마크와 비교하는 공식 테스트를 도입해야 한다. 탈락 기준은 연간 -0.50%포인트가 합리적이다. 탈락 시 가입자 고지 의무, X년 연속 탈락 시 신규 모집 금지의 제재가 함께 설계돼야 한다. 제재 없는 공시는 효과가 없다. 물론 이는 기금에도 적용이 되어야 한다.

셋째, 수수료를 포함한 순수익률 비교 체계다. 투자 성과만 비교해선 안 된다. APRA처럼 동일 유형 상품의 중간값 수수료를 공시하고, 이를 초과하는 상품에는 추가 설명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수수료 차이가 30년 후 수천만원으로 벌어진다는 사실을 가입자가 알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2025년 내 퇴직연금이 8%를 벌었다. 이것은 좋은 것인가.
지금 한국에서는 이 질문에 공식적으로 답할 방법이 없다. 8%라는 숫자를 내밀고 가입자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규제 당국은 수익률을 공시했으니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노후를 준비하는 수백만 명의 퇴직연금 가입자에게 이것은 충분하지 않다. 기준이 없으면 개선도 없다. 비교가 없으면 경쟁도 없다. 경쟁이 없으면 가입자만 조용히 손해를 본다.

호주는 4년 만에 100만 명의 가입자를 열등한 상품에서 구해냈다. 한국의 퇴직연금 가입자 1000만 명은 언제 같은 보호를 받을 수 있는가. 그 출발점은 기준을 만드는 것이다.

영주 닐슨 한국퇴직연금데이터 대표 겸 성균관대 SKK GSB 교수

 

이 칼럼은 한국퇴직연금데이터(주)의 2026년 4월 TDF Index 성과 리포트와 글로벌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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