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초상화에 터 잡은 여왕벌…청소기로 구조한다[벌통을 열다]

최용준 2026. 5. 1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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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어반비즈코리아 대표(43)가 지난 8일 서울 창덕궁 구(舊) 선원전 북진설청에서 마루 아래 토종벌을 살리기 위해 꿀벌청소기를 준비하고 있다. 사진=최용준 기자

[파이낸셜뉴스]박진 어반비즈코리아 대표(43)는 지난 8일 오후 3시 서울 창덕궁에서 노란색 꿀벌청소기를 어깨에 둘러멨다. 꿀벌청소기는 일반 청소기 보다 분당 회전수(RPM)를 낮춰 꿀벌을 안전하게 빨아들이는 꿀벌 '구조장비'다. 먼지통 대신 격자 철망이 설치돼 꿀벌 무리 전체를 산 채로 빨아들일 수 있다. 꿀벌청소기에 부착할 호스와 훈연기, 방충복을 들고 쫓아갔다. 1m 길이 검은색 호스를 들고 창덕궁 선원전으로 걷는 동안 궁궐 처마 아래 단청들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창덕궁 구(舊) 선원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직사각형 형태였다. 팔작지붕은 간결했다. 선원전은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태조 이하 영조, 정조 등 여러 임금의 어진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21년 새 선원전을 후원 깊숙한 곳에 건립해 제사 기능을 옮기면서 구 선원전은 빈 곳이 됐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따르면 '선원(璿源)'은 '왕실의 유구한 뿌리'란 뜻이다. '아름다운 옥(璿)의 뿌리(源)'로 왕실을 옥에 비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일 서울 창덕궁 구(舊) 선원전 북진설청에서 돌 틈으로 토종벌이 오가고 있다. 사진=최용준 기자

벌들은 국가유산청이 2004년 복원한 구 선원전 북진설청 마루 하부에 집을 지었다. 바닥에 쌓은 기초돌 약 1㎝ 돌 틈 사이로 벌들이 바쁘게 오갔다. 꿀벌에게 5월은 한참 꿀을 수확해야 하는 가장 바쁜 달이다. 바닥을 열어보니 수년에 걸쳐 반복해서 꿀벌들이 집을 지은 흔적이 나왔다. 오래된 벌집 밀랍조각들이 한손에 쥐면 쉽게 바스라 졌다. 이번에 찾은 벌집은 말랑했다. 박 대표는 "토종벌에게 이곳이 명당이었던 것 같다. 궁궐터는 당연히 좋은 곳이지 않겠나"고 웃었다.

벌들은 바위 또는 나무 사이 좁은 틈에 집을 짓는 습성이 있다. 외부로부터 벌집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햇빛이 잘 드는 건조하고 양지바른 곳을 좋아한다. 해를 기준으로 방향감각을 찾기 때문이다. 양봉업자들도 볕이 잘 들면서 꽃나무가 많은 곳으로 양봉장을 선택한다. 아무래도 궁궐터는 평지에 해가 골고루 잘 드는데다 인근에 인왕산, 북악산을 비롯해 도시 숲이 형성돼 벌들에겐 좋은 먹이 터다.

박 대표가 마루에 엎드려 벌들에게 청소기를 댔다. 벌들이 퐁퐁 호스 속으로 사라졌다. 순간이동을 하는 듯했다. 웅웅 청소기 소리가 들렸고 벌들을 그에 맞춰 돌 틈 사이로 더 바쁘게 날아다녔다. 청소기를 피해 밖으로 나온 벌들이 선원전 기둥을 지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30분에 걸쳐 벌 한 무리를 다 빨아들이고 청소기 벌통을 확인해 보니 벌들이 우글거렸다. 벌 무리 당 여왕벌은 1마리. 여왕벌이 잘 있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벌들이 너무 많아 찾기가 어려웠다.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는 벌을 살리기 위해 어반비즈서울에 구조요청을 했다. 벌을 내쫓기 위해 벌집을 물로 쏘아 허무는 방법이 있지만 벌떼를 고스란히 보호하기 위해서다. 수년간 창덕궁에서 근무한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들도 토종벌이 궁궐에 집을 지은 경우는 처음 봤다고 입을 모았다. 도시에 적응력이 강한 등검은말벌이 궁궐 기둥에 집을 짓지만 꿀벌이 궁궐 마루에 숨어든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지난 8일 서울 창덕궁 구(舊) 선원전 북진설청 마루에 붙은 벌집 흔적. 사진=최용준 기자
벌집 제거를 위한 소방관 출동은 크게 늘어나고 있다. 2024년 119신고를 통한 벌집 제거 출동이 30만건을 넘어서며 전년 대비 증가했다. 생활안전 출동은 66만9756건으로 이중 벌집 제거 출동은 30만4821건으로 30.8% 급증했다. 2024년 8월 한 달 벌집 제거는 11만4421건, 환자 이송은 2225건으로 월별 최다를 기록했다. 벌 퇴치 및 벌집 제거를 위한 출동 건수는 여름철인 6월부터 증가한다. 최근 소방관들도 벌집을 제거하러 출동할 경우 벌 무리를 살리려고 노력 중이다. 꿀벌의 도시 내 화분매개 역할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도심양봉 소셜벤처 기업인 어반비즈서울은 2019년부터 꿀벌청소기로 꿀벌 무리를 생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박 대표는 "소방관들도 이제는 구조현장에서 꿀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주신다"며 "소방서 중에 꿀벌청소기가 필요한 분들에게 무상으로 보급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안전하게 생포하고, 도시 양봉을 통해 도심 빌딩 옥상 등에 거처를 마련했다"며 "도시 양봉으로 자리를 잡은 꿀벌 무리는 도심 생태계를 더욱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돕는다"고 말했다.

오는 5월20일은 UN이 지정한 세계 벌의 날이다. 생태계와 식량 생산에 필수적인 꿀벌과 꽃가루 매개 중요성을 알리고 멸종 위기에 처한 벌을 보호하기 위해 2017년 제정됐다. 벌의 날을 앞두고 임금님 초상화가 있던 곳에서 토종벌을 살려냈다. 토종벌 무리도 여왕벌 1마리가 2만마리를 통치하는 왕정이다. 왕을 모시는 존재들이 조선 왕을 모시는 공간에 깃들었다.

지난 8일 서울 창덕궁에서 꿀벌청소기로 빨아들인 토종벌들. 전부 살아있다. 사진=최용준 기자

[벌통을 열다]'벌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자가 직접 양봉(養蜂)을 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기후위기 시대 농업과 먹거리는 인간이 겪어보지 못한 방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국내 농업 총생산량의 35%는 화분매개 곤충이 필요한 만큼 인간은 벌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벌통 속 작은 세계를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기록하려고 합니다. 벌 관련 정책과 연구자, 양봉농가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벌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벌통을 열면서.

junjun@fnnews.com 최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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