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데 못 깨는 내 퇴직연금…83%가 ‘일시금’ 택한 이유[나유정]
83.5%는 여전히 일시금 수령…정부 “퇴직연금은 평생소득”
![퇴직연금 중도인출 [챗GPT를 활용해 제작]](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16/ned/20260516060117809kuut.png)
[헤럴드경제=김용훈 기자] # 올해 10월 결혼을 앞둔 직장인 김모(34) 씨는 전셋집 보증금과 혼수 비용 마련 문제로 고민이 커졌다. 목돈이 부족해 확정기여형(DC형) IRP 계좌에 쌓인 자금을 활용하는 방안을 알아봤지만 사실상 꺼내 쓰기 어렵다는 점을 뒤늦게 알게됐다. 김 씨는 “내 월급으로 쌓은 돈인데 필요할 때 왜 찾을 수 없냐”며 “노후자금보다 당장 결혼자금이 더 급한데 답답하다”고 말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퇴직연금은 종종 ‘묶인 돈’으로 불린다. 계좌에 수천만원이 쌓여 있어도 생활비가 급하거나 사업자금이 필요하다고 해서 자유롭게 인출할 수 없어서다. 특히 최근 고금리·고물가와 경기 둔화로 급전 수요가 커지면서 “내 돈인데 왜 못 찾게 하느냐”는 불만도 적지 않다.
하지만 퇴직연금 제도는 기본적으로 노후소득을 목적으로 한 ‘연금자산’으로 설계돼 있다. 퇴직금을 중도에 한 번에 인출해 소비할 경우 기대수명이 길어진 초고령사회에서 노후 빈곤 위험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15일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퇴직연금 중도인출은 확정기여형(DC형)에 한해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회사가 운용 책임을 지는 확정급여형(DB형)은 원칙적으로 중도인출이 불가능하다.
현행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시행령상 DC형의 중도인출은 일정한 법정 사유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무주택자의 주택 구입 ▷무주택자의 전세보증금 부담 ▷가입자 본인이나 배우자·부양가족의 6개월 이상 요양 ▷파산선고 또는 개인회생절차 개시 ▷재난 피해 등이 해당한다.
전세보증금 목적 인출은 동일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1회만 허용된다. 또 장기 요양 목적 인출 역시 의료비 부담이 일정 수준을 넘어야 가능하다.
반면 혼례비나 대학등록금, 장례비 등은 중도인출 사유로 인정되지 않는다. 단순 생활고나 사업자금 부족 역시 대부분 허용되지 않는다. 예비 신혼부부의 결혼 비용이 급하더라도 퇴직연금을 직접 인출하는 것은 어렵다는 의미다.
다만 정부는 퇴직연금 자체를 해지해 소진하기보다는 ‘노후자금 유지’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에 따라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퇴직연금 수급권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현행 제도상 가입자는 적립금의 50% 한도 내에서 퇴직연금을 담보로 대출받을 수 있다. 혼례비와 대학등록금, 장례비 등도 담보대출 허용 사유에 포함된다. 정부가 “연금은 깨지 말고 필요하면 빌려 쓰라”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한 셈이다.
해외 주요국 역시 퇴직연금 조기 인출은 엄격하게 제한하는 편이다. 다만 한국과 달리 일정한 불이익을 감수하면 인출이 비교적 폭넓게 허용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 퇴직연금 제도인 ‘401(k)’는 일정 연령 이전에 인출할 경우 일반 소득세와 별도로 10% 추가 세금을 부과한다. 세 부담은 크지만 의료비나 주거 문제 등 ‘금융적 어려움’이 인정되면 조기 인출이 허용된다. 호주의 퇴직연금 제도인 ‘슈퍼애뉴에이션(Superannuation)’ 역시 원칙적으로 조기 인출이 제한되지만 심각한 재정적 곤란이 인정되면 일부 인출이 가능하다.
정부는 퇴직연금을 ‘노후를 위한 마지막 안전망’으로 보고 있으나, 실제 운용에서는 여전히 일시금 수령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이다.
지난해 퇴직연금 수급을 시작한 60만1000명 가운데 83.5%인 50만2000명이 연금 대신 일시금 형태로 퇴직금을 받았다. 연금 수령자는 16.5%에 그쳤다. 연금을 선택한 가입자들조차 장기 수령보다는 단기 인출에 집중됐다. 확정기간형 연금 가입자의 약 82%가 10년 이하 수령을 선택했다.
세부적으로는 5년 이하가 17.5%, 5~10년이 64.3%였다. 반면 10~20년은 15.9%, 20년 초과 장기 연금은 2.3%에 불과했다. 정부는 퇴직연금을 ‘노후를 위한 마지막 안전망’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당장의 생계 부담에 시달리는 가입자들의 현실은 그보다 훨씬 절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전문가들은 단순한 중도인출 규제 강화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급전이 필요한 경우에도 계좌를 해지하지 않고 자금을 활용할 수 있도록 담보대출 활성화 등 유동성 장치를 강화해 노후자산을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김경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회장은 “퇴직연금의 일시금 수령과 연금 수령 방식 간 세제상 혜택 차이가 크지 않아 연금 수령의 인센티브가 되지 못하고 있다”며 “퇴직연금 납입액에 대한 연말 정산시 세제혜택을 여타 세금환급금과 구분없이 지급하고 있으나 이를 의무적으로 적립하도록 하는 등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대환 동아대 교수 역시 “적립금 담보대출을 활성화하는 등 가능한 장기간 가입자가 퇴직연금 제도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가입자의 연금 수령 기간을 늘리는 방안도 함께 추진되고 있다. 일부 신탁형 연금상품은 종신연금 구조가 부족하고 일부 사업자는 연금 수령 기간을 최대 20년으로 제한하고 있어, 종신형 연금과 20년 초과 장기 연금상품 확대 필요성도 제기된다.
이와 함께 연금 수령 기간 안정적으로 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상품 개발 논의도 진행 중이다. 연금 수령 기간이 근로기간보다 훨씬 긴 장기라는 점을 고려해 원금 손실 가능성을 낮추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보증형 실적배당보험 등 상품 활성화 방안도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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