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1자 → 482자’ 쪼그라든 한·미 국방부 보도문, 왜 줄어들었을까

2년 전엔 4121자(공백 제외)였던 게 올해는 482자로 줄었습니다. 다섯 페이지에 달했던 문서가 한 페이지가 됐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한·미 국방부의 차관보급 협의체인 한·미 통합국방협의체(KIDD) 회의 결과 공동보도문 이야기입니다. 이 공동보도문은 양국 국방부 고위급이 한·미 동맹의 중요한 안보 현안을 폭넓게 논의한 후 언론에 공개할 내용을 조율해 발표하는 공동 문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2년 전 4121자였던 공동보도문, 올해는 482자

4121개의 글자가 다섯 페이지에 걸쳐 촘촘히 박혀있는 건 2024년 9월 개최된 제25차 KIDD 공동보도문입니다. 당시 윤석열 정부가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와 했던 마지막 KIDD 회의였죠.
482자, 한 페이지짜리는 지난 12~1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28차 KIDD 회의 결과를 정리한 공동보도문입니다. 미국 행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2기로 바뀌었고, 우리도 12·3 내란과 탄핵을 거쳐 이재명 정부가 들어섰죠.
2년도 안 돼 글자 수가 약 88% 줄었습니다. 양만 바뀐 게 아닙니다. 질적으로도 달라졌습니다. 이번 공동보도문에서 회의 일시·장소·참석자와 같은 기본 사항을 빼면 다음과 같이 개괄적이고 원론적인 내용이 남습니다.
“양측은 지난해 11월 한·미 정상 간 공동설명서(팩트시트) 국방 분야 및 제57차 한·미 안보협의회의(SCM)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협력을 적극 추진하는 데 뜻을 같이 했습니다.”
“한반도 및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공동의 안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협력을 더욱 심화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2024년 9월 공동보도문을 살펴볼까요. 한·미 동맹의 비전을 밝히고 논의 의제를 구체적으로 적었습니다.
“양측은 이번 KIDD에서 ‘한·미동맹 국방비전’ 의 세 가지 핵심 중점인 ▲대북 확장억제 노력 강화 ▲과학기술 협력을 기반으로 한 동맹 능력 현대화 ▲유사 입장국과의 연대 및 지역 안보 협력 강화에 주안을 두고 심도 깊은 논의를 진행했습니다.”
“미 조기경보위성 정보공유체계(SEWS)를 통한 향후 정보공유 강화에 대해서도 논의했습니다.”
“미사일대응정책협의체(CMWG)를 통해 동맹의 대응능력과 태세를 지속적으로 강화해나가기로 했습니다.”
“한국 측이 제안하는 국방과학기술 컨퍼런스를 2025년부터 개최하는 방안에 대해 협의했습니다.”
유독 이번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트럼프 2기 출범 후 KIDD 공동보도문은 줄곧 짧았습니다. 트럼프 2기 첫 KIDD였던 지난해 5월 제26차 KIDD 공동보도문은 563자, 지난해 9월 제27차는 420자였습니다.
내용도 “공동의 이익을 발전시킬 수 있는 정책적 방향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다”(제26차), “변화하는 역내 안보 환경 속에서 한·미 동맹을 호혜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현대화하기 위한 국방 분야 협력 전반을 평가했다”(제27차) 등 개괄적이고 원론적이었습니다.
트럼프, 대선 후보 시절 “한국은 머니 머신”
쿠팡·대미 투자 이행 요구하며 안보 뒷전?

그렇다면 이러한 KIDD 공동보도문의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트럼프 2기 들어 한·미 간 안보 협의가 순탄치 않다는 방증일 수 있다는 진단이 나옵니다. 국방부 국방정책실에서 근무한 바 있는 두진호 국가전략연구원 유라시아센터장의 지적입니다.
“KIDD는 (양국 국방장관이 안보 문제를 협의하는) SCM 전에 실무자들이 만나 동맹 현안을 의제별로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는 자리다. 그런데 양국이 상대방이 요구하는 의제에 대해 서로 충족을 못 시켜주는 상황이다 보니 공동보도문이 풍성할 수 없는 거다.”
왜 그럴까요. 지금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국과의 안보 협력은 후순위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습니다. 트럼프 2기는 동맹국과의 협력보다 경제적 실리를 중시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주한미군 규모를 과장하며 “한국은 머니 머신”이라고 말하기도 했죠.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쿠팡 문제, 대미 투자 이행 등 경제 문제를 우선적으로 협의할 것을 요구하며 안보 문제는 뒷전이 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미 중간선거 앞두고 이란 전쟁 해결이 화급

가뜩이나 동맹국과의 전통적 관계를 중시하지 않는데, 트럼프 대통령에게 더 시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일으킨 대이란 군사작전 ‘장대한 분노’로 발발한 중동 전쟁을 마무리하는 일입니다. 전 세계 원유·가스 해상 물동량의 약 20%가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이 두 달 넘게 봉쇄되며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 승패에 영향을 끼칠 최대 이슈로 꼽힙니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의 분석입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계속해서 동맹국이 비용을 더 내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입장인 만큼 KIDD를 비롯해 양자 간 협의에 적극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또 한국은 KIDD에서 북한 위협 대비를 우선적으로 하는 반면에 미국은 중국 견제에 활용하려는 생각이 있는데, 이에 한국 정부의 입장이 명확하지 않아서 논의가 원활하게 될 것 같지 않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미국은 ‘나무호가 피격됐는데 호르무즈 해협 개방을 위한 군사 작전에 왜 빨리 참여 안 하느냐’고 압박하고 있는데 한국은 그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또 미국은 대미 투자 이행을 뭉개고 있다고 생각하고, 쿠팡 사태도 터져서 총체적 난국인 것은 분명하다. 한·미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는 것이 KIDD 공동보도문에 반영이 된 게 아닌가 추정해볼 수 있다.”
임기 내 전작권 전환·핵추진 잠수함 가능할까

실제로 한·미 국방당국은 안보 현안들에 대한 인식차를 노출하고 있습니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부 장관은 지난 11일(현지시간) 미 국방부 청사에서 연 안규백 국방부 장관과의 회담 모두발언에서 장대한 분노를 언급하며 “동맹국들이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길 기대한다”고 말했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항행 재개에 기여하라고 한국을 공개적으로 압박한 것으로 해석됐습니다. 안보 사안에서 미국의 우선순위는 중동 전쟁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습니다.
안 장관과 헤그세스 장관 회담 결과를 정리한 공동보도문도 각국의 관심사를 열거한 뒤 “향후 협력을 강화시켜 나가기로 했다”는 원론적 내용으로 이뤄졌습니다. 안 장관은 회담 다음날 가진 워싱턴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한국 측 주요 의제였던 전시작전통제권의 조속한 전환에 대해 양국 간 공감대가 있지만 “미국 측에서 약간의 다른 생각을 가진 부분이 있다”며 말했습니다. 또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건조 문제에 대해선 “안보 사안은 경제 문제와 다른 트랙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양국 간 인식차가 있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반론도 있습니다. 다른 국가와의 공동보도문이 짧은 것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스타일이라는 것입니다. 국방부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 들어 나토 회의도 굉장히 축소돼 보도문 길이에 의미를 두는 것은 맞지 않는다”며 “안 장관의 이번 방미를 계기로 긴밀하게 협의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고, 그 성과는 오는 11월 SCM 결과로 평가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김병관 기자 bg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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