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말하기 대회 1등으로 서울행" 아르헨티나 소녀가 서울 프리랜서가 되기까지

김태현 기자 2026. 5. 16.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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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외국인 여성 4인이 말하는 ‘그들이 한국을 고른 이유’ ②아르헨티나 편

[우먼센스] 지금 서울에는 전 세계에서 온 2030 외국인 여성들이 조용히 커리어를 쌓고 있다. 단순한 어학연수나 잠깐의 체류가 아니다. 연구실에서 논문을 쓰고, 카메라를 들고 골목을 누빈다. K-드라마와 K-팝이 심어준 막연한 호기심을 훌쩍 넘어, '한국'을 자신의 무대로 선택한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우먼센스가 국적도, 언어도, 이유도 제각각인 네 명의 여성을 직접 만났다. 두 번째는 아르헨티나 차코 주 출신, 서울 9년 차 영상·사진 프리랜서 하스민이다.

사진=하스민 제공

아르헨티나 북동부 차코 주의 소도시 레시스텐시아. 2007년 멋진 자연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 열다섯 살 소녀가 한국 드라마 '궁'을 봤다. 그냥 재밌는 드라마 한 편이었다. 그런데 6년 뒤 그녀는 한국어를 독학으로 파고들었고, 또 2년 뒤에는 아르헨티나 세종학당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1등을 했다. 

1등 상품은 한국행 비행기 표였다. 원래는 10일짜리 문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하스민은 오기 전부터 서울대 언어교육원에 등록을 마쳐뒀고, 결국 거의 2년을 공부해 최고급까지 수료했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녀는 서울에서 카메라를 들고 산다. 하스민은 서울대 언어교육원 최고급 수료, GKS 장학금으로 국민대 영상디자인 석사, KBS 월드 스페인어 유튜브 채널 담당을 거쳐 지금은 개인 스튜디오를 꿈꾸는 프리랜서 영상·사진 작가다.

하스민(Jazmin Granada)은 9년 동안 위계질서, 나이 공세, 아르헨티나 경제 붕괴 소식 등 한국에서 부딪히며 성장한 얘기를 담담하게 꺼냈다. 그녀에게 한국은 선택이었고, 도전이었으며,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삶의 무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어떤 삶을 살았나요?

차코 주 레시스텐시아 출신이에요. 아르헨티나에서 시각디자인 학사를 마쳤는데, 졸업하자마자 다른 나라로 가고 싶었어요. 디자이너로 딱 한 달 일했는데, 한국에 오게 됐고, 국민대에서 영상디자인 석사까지 했죠.

처음 한국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뭔가요?

드라마 '궁' 때문이에요. 2007년쯤에 봤으니까 거의 20년 전이네요. 그 후로도 드라마, 케이팝을 계속 좋아했어요. 빅뱅이랑 에픽하이를 특히 좋아했는데, 에픽하이는 유튜브에서 우연히 찾았어요.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건 2013년이었고, 2년 뒤에 말하기 대회에서 1등을 했어요.

처음 한국에 온 건 언제요?

2016년이요. 2015년에 아르헨티나 세종학당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1등을 했는데, 상품이 한국행 비행기 표였거든요. 원래는 10일짜리 문화 프로그램 참여가 목적이었는데, 오기 전에 미리 알아봐서 서울대 언어교육원에 등록까지 해뒀어요. 결국 거의 2년을 공부했고 최고급까지 수료했어요. 2018년에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가, 이듬해 외국인 우수 인재에게 주는 GKS(Global Korea Scholarship) 장학금을 받아서 다시 한국에 왔고요.

가족들 반응은 어땠나요?

항상 응원해 줬어요. 엄마도 한국에 한번 놀러 왔는데 엄청 좋아하시더라고요.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고 했어요.

사진=하스민 제공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해왔나요?

국민대 대학원을 마치고 KBS 월드 스페인어 유튜브 채널 담당자로 일했어요. 콘텐츠 편집, 번역, 자막, 채널 기획·관리까지 다 했죠. 2년 정도 있다가 가족이 보고 싶어서 그만뒀어요. 귀국했다가 돌아와서는 호텔에서 1년, 그다음엔 스킨케어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했고요. 지금은 프리랜서로 사진·영상을 시작한 지 두 달 됐어요. 인사동 홍보관에서도 곧 일할 예정이고요.

프리랜서 일감은 어떻게 구해요?

인스타그램이 주요 채널이고, 주변 네트워크도 중요해요. 예전 손님이 다른 사람한테 추천해 주는 식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많고요. 서울을 여행 중인 분들이나 여기 사시는 분들 대상으로 커플 스냅, 가족 스냅, 혼자 찍는 스냅 사진·영상을 찍어드려요.

외국인으로서 직장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게 뭐였어요?

위계질서요. 언어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한국은 내가 그 분야를 더 잘 알아도, 직위가 높은 사람의 의견을 따라가야 하는 구조잖아요. 그 사람이 틀렸다는 걸 알아도 부하 직원이라면 그냥 따라야 해요. 그게 진짜 안 맞았어요.

외국인에게 특히 열려 있는 분야가 있다면요?

최근 스킨케어 회사는 글로벌 마케팅 때문에 외국인을 많이 뽑아요. 영상 만들고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거든요. 그 외엔 분야마다 많이 다른 것 같아요.

한국에 처음 '적응했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밤에 혼자 걷는 게 편해졌을 때요. 아르헨티나에서는 여러 명이 같이 다녀도 조심해야 하거든요. 혼자는 절대 무리예요. 여기는 밤에 혼자 다녀도 아무렇지 않잖아요. 또 하나는 은행에서 체크카드를 바로 받는 거요. 아르헨티나에서는 2주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순간 아, 나 적응했구나 싶었어요. 약속 시간도 남미에서는 8시에 만나면 8시 반, 9시에 오는 게 보통이예요. 여기 와서는 5분만 늦어도 화가 나요. 한국 사람이 다 됐죠.

한국의 치안·교통·인프라를 아르헨티나와 비교한다면.?

비교가 안 되죠. 치안은 남미 전체가 다 비슷하게 별로예요. 여기는 정말 편하고요. 제 고향은 버스밖에 없는데, 서울은 교통도 잘 돼 있고. 경제적으로도 아르헨티나는 지금 정말 엉망이예요. 여기는 그냥 안정적으로 굴러가잖아요. 그 안정감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져요.

한국 음식엔 완전히 적응했나요?

지금은 다 좋아해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빵 종류도 적었고, 매운 것도 못 먹어서 힘들었는데 이제는 적응했어요. 지금 제일 좋아하는 건 조개구이와 수제비요.

본국 음식이 그리울 때는 어떻게 해요? 

해먹을 때도 있긴 한데, 딱히 찾진 않아요. 남미 식당 중에는 홍대 까사라티나(Casa Latina), 콜롬비아 식당 엘 콜롬비아노(El Colombiano)를 추천해요.

오기 전에 상상하던 한국과 실제는 얼마나 달랐나요?

엄청 달랐어요. 드라마에서는 좋은 것만 보여주잖아요. 사람들이 다 착하고 친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와보니까 달랐어요. 특히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과 못하는 외국인에게 태도가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한국어 잘하면 관심도 생기고 친절해지는데, 못하면 무시하는 경우도 봤어요. 남미에서는 외국인한테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거든요.

한국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불편한 게 있다면.

나이 물어보는 거요. 그래서 항상 비밀이라고 해요. 34살이라고 하면 꼭 "왜 결혼 안 했어요", "왜 남자친구 없어요" 이런 말이 따라오거든요. 아르헨티나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한테 그런 얘기 절대 안 해요. 나이가 그렇게 중요한 정보가 아니거든요.

한국에서 감정 표현이 어렵다고 느낀 적 있나요?

가끔 있어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소중한 사람에게 애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게 당연하거든요. 여기서는 그런 마음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야 하고, 조금 더 차갑고 거리감 있게 행동해야 하는 느낌이 있어요. 그런 점 때문에 가끔은 남미에서 살던 게 그리워지기도 해요.

사진=하스민 제공

아르헨티나와 비교하면 한국이 외국인에게 다소 닫혀 있다고 느끼나요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외국인에게 더 인내심이 있고 열려 있는 편이에요. 한국은 오랫동안 비교적 단일하고 외부에 닫혀 있던 사회였기 때문에 닫힌 느낌이 더 강한 것 같아요. 라틴아메리카가 더 개방적인 데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어요. 스페인 식민 지배를 거치고, 원주민 문화와 섞이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엔 수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였거든요. 나라 자체가 이민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예요. 외국인을 낯설게 보는 게 아니라, 그게 그냥 우리 일상이었던 거죠.

가장 외로운 순간은 언제에요?

크리스마스와 새해요. 그때는 가족들이 다 모이는 시간인데 여기 있으면 혼자잖아요. 9년 동안 아르헨티나에 2018년, 2024년 두 번밖에 못 갔어요. 올해는 부모님이 한국에 오실 예정이에요.

앞으로도 한국에 계속 있을 것 같아요?

일단은요. 이젠 익숙해졌어요.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게 커요. 여기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데 아르헨티나는 지금 경제가 너무 불안정해요. 

꿈이 있다면요?

제 스튜디오 겸 사무실을 갖고 싶어요. 개인 사업 등록하고 조금씩 키워나가면 1년 후쯤엔 될 것 같아요.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외국인에게 해주고 싶은 현실적인 조언이 있다면.

솔직히 추천하기가 어려워요. 경쟁이 너무 심하고 스트레스가 많아요. 스트레스 관리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요. 한국어는 기본 수준 이상은 돼야 하고, 와서도 계속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어야 해요. 기본만 알고 그냥 살겠다는 생각으로 오면 힘들어요.

한국이 외국인에게 더 좋은 나라가 되려면 뭐가 바뀌어야 할까요?

조금 더 유연한 사고방식이 필요해요. 나이나 직급에 상관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너무 엄격한 위계질서 문화가 조금만 완화된다면, 외국인들에게 훨씬 편안한 환경이 될 것 같아요.

한국은 당신에게 어떤 나라인가요?

매우 효율적인 나라에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고, 사람들은 약속을 잘 지키고 서로의 시간을 존중해요. 그런 점은 진심으로 좋아요.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경쟁이 치열하고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에요. 모두가 계속 경쟁하다 보니, 어느 순간 사람을 경제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부품처럼 바라보게 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외국인에게 더 열리려는 움직임은 분명히 느껴지고, 그건 좋은 변화에요.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은 해요.

한국인에게 아르헨티나 여행지를 추천한다면. 

아르헨티나는 대한민국 면적의 약 28배에 달하는 광활한 대륙입니다. 이 나라를 제대로 경험하려면 최소 두 달의 시간은 필요하죠. 제가 나고 자란 차코(Chaco)주의 레시스텐시아에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는 차로 13시간, 남쪽 파타고니아까지는 꼬박 이틀을 달려야 할 정도니까요.

한 나라 안에 설산과 사막, 거대 빙하와 폭포, 그리고 끝없는 바다가 공존하는 것은 아르헨티나만의 축복입니다. 멘도사의 와이너리나 이과수 폭포, 파타고니아의 빙하 트레킹은 이미 유명하지만, 제가 추천하고 싶은 '진짜' 야생은 바로 차코입니다. 대한민국만한 면적을 가진 차코주에는 '차코 국립공원(Parque Nacional Chaco)'과 '엘 임페네트라블레 국립공원(Parque Nacional El Impenetrable)'이 있는데, 이곳은 아프리카의 세렝게티에 비견될 만큼 경이로운 야생동물의 낙원이에요. 오직 이곳에서만 서식하는 희귀 동물들을 마주할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도 활성화되고 있어요.

치안에 대한 우려는 어느 여행지나 비슷합니다. 기본적인 주의만 기울인다면, 그 대가로 마주할 자연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짜'일 겁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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