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 회고록] 함양 안의중에 입학했다, 유치환 시인이 교장했던 학교였다

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2026. 5. 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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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안의고에 있을 때
안의중 교장은 유치환이었다
안의중 교훈 ‘참되자 일하자’
안의고 교훈 ‘창건(創建)’에는
아나키스트의 이상이 들어있다
함양군 안의. 안의중학교에 입학할 때, 나에게는 꽤 큰 도시였다. 

경북중 낙방, 아버지 곁으로
1960년 3월 중순, 경북중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한 나는 난감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사람들은 "역시 시골 학교에서는 어렵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2차 학교로 경상중학교를 추천했다. 나는 2차 학교는 지원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리고 아버지 곁으로 갔으면 하는 소망을 밝혔다.

안의로 떠나기까지 2주 정도 대구에 머물지 않았나 싶다. 당초 계획에 없던 내 소망을 할머니에게 전하고 회신을 기다리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잠시 의탁한 친척 집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거나 하릴없이 공상으로 소일했을 것이다. 그 집 중학생의 안내로 시립도서관이란 곳에도 가 본 기억이 있다. 중고교 학생들이 자기 책을 가지고 읽는 독서실이었다. 교과서와 수험서였다. 초등학교 학생도 더러 있었다. 이렇게 일도일념(一道一念)으로 열심히 파고들어야만 경북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구나, 만시지탄이 들기도 했다.

하루는 붉은 페인트로 '自由黨'이라고 쓴 완장 찬 청년들이 떼 지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린 눈에도 불량배로 비쳤다. 3월 15일, 선거 날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즉 2월 28일부터 대구에서는 반자유당 정서가 강하게 일고 있었다. 일요일인 바로 그 날, 수성천변에서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유세 일정이 잡혀 있었다. 공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고등학교 학생을 등교시키라는 교육 당국의 지시가 하달되었다. 분노한 학생들이 교문을 뛰쳐나와 거리에 나서자 많은 시민들이 데모에 동참했다. 대구에서 점화된 학생 반정부 데모는 부산을 거쳐 3월 15일 마산의거로 확대되었고, 마침내 4월 19일 서울의 데모로 절정을 이루어 혁명의 결실을 맺었다. 또한 대구는 1958년 이래 교원노조운동의 본산이었다. 1960년 9월 민주당 정부가 교원노조 운동을 탄압하는 방침을 정하자 대구지역 교사들은 단식투쟁에 나섰다. 경북고 학생들의 주도 아래 중학생도 함께 교사들을 지지하여 동맹휴학을 감행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1960. 9. 27 「동아일보」 1960. 9. 28) (천정환, 김건우, 이정숙, 《혁명과 웃음》, 앨피 2005, 123-127쪽) 나는 대학 시절에 대구 2.28 학생의거를 주도한 대구 선배들을 만나면서 남다른 경외의 마음을 품었다. 내가 입학시험에 낙방한 학교이기에 더욱 경외심이 가중되었을 것이다.

선거 익일인지 그다음 날인지 모르지만 친척 어른의 인도로 내당동 시외버스 정류소에서 거창행 버스를 탔다. 공공연한 부정선거로 인해 민심이 크게 동요하고 있었을 터이지만 어린 내 눈에 잡힐 리 없었다. 거창행 여정에서 넘어야 하는 고령 고개는 험준했다. 이따금 버스가 계곡으로 굴러떨어져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이 발생한다고 했다. 언젠가 특호 활자와 끔찍한 사진으로 도배한 신문을 본 기억도 있었다. 버스가 꼬불꼬불 고개를 아슬아슬하게 넘을 때는 기사도 승객도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거창에서 내려 함양행 버스로 갈아타고 중간 지점인 안의에서 내렸다. 1년 반 전 여름방학 때 할머니를 따라왔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동생은 회고록에 형을 재회한 기쁨을 이렇게 적었다. "동무들에게 내게도 형이 있다며 으스댈 수 있게 되었다."

안의에 도착했다. 행복했다. 내게도 가정이 있다는 소속감이 들었다. 친할머니와는 다른 순박한 외할머니, 서글서글한 처녀 이모, 청운 사람들에 비하면 모두가 활짝 웃고 격식을 벗어난 순박함이 편했다. 더없이 착한 사람들이다. 외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돈 벌러 가서 현지에 정착했다. 고향에 남긴 두 딸은 가난 때문에 중학으로 학업을 마감해야 했다. 착하고 영민한 큰딸은 졸업한 학교의 서무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두 아이가 딸린 내 아버지, 교장의 후처가 된 것이다. 달리 나서는 후보자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우리 형제를 확실하게 키워줄 착한 사람을 택했노라고 했다. 동생은 벌써 몇 년째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새어머니에게서도 남동생이 태어났다. 내가 합류하면서 갑자기 가족관계가 복잡해진 셈이다.

청운에 비하면 안의는 대도시였다. 다방과 양품점 약국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종로'라는 번화가도 있었다. 후일 "신랑감에게 종로에 집이 있다"는 중매쟁이 이야기를 서울 종로로 착각하여 시집왔다는 아주머니의 에피소드도 들었다.

동생의 회고록 구절들이다.

"함양 산청 지리산 골짜기에 국2 때 새어머니의 신접 살림 속으로 들어갔다. 양쪽이 비교가 되었다. 청운과 안의, 할머니 품과 계모 품이. 안의는 청운에 비하면 없는 게 없는 도회지였다."

동생은 한 학년 위인 최산이라는 면장집 아들과 친했다. 첫 대면에서 나는 당시 청운에서의 습관대로 한자로 '뫼 산'(山) 자냐고 물었고 그는 조심스럽게 '산호 산(珊)' 자라고 답했다. 내가 고상한 글자라며 산(珊) 자를 써 보이자 좌중이 경탄했다. 산은 얼굴도 예쁘고 노래도 잘 부르는 미소년이었다. 금호강 천변에 자리하여 잔잔한 물소리가 정겹던 최 면장 집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닫힌 방문을 뒷발로 선 채 앞발로 밀고 들어오던 얼룩고양이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형제는 안의를 떠나서도 산이를 그리워했다. 1965년 2월 초, 부산고등학교 게시판에 붙은 신입생 명단에서 최산(崔珊)을 발견했다. 이런 이름은 그 말고 달리 있을 수 없다는 확신에 차서 나는 즉시 편지를 썼고 이내 답장이 왔다. 그는 안의중학을 졸업하고 재수 끝에 부산고에 입학한 것이다. 우리는 신입생과 졸업반으로 1년을 한 캠퍼스에서 보냈다. 그는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입대한 내가 첫 휴가를 나왔을 때였다. 내가 월남에 지원할 생각을 전하자 그는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영원한 소년이었다. 헤세와 보들레르를 즐겨 읽고 니체와 카프카의 무게에 힘겨워하던 그는 안타깝게도 우울증을 앓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후문을 들었다.

1960년 4월 1일, 안의중학교 입학식에 선 200명 남짓 신입생 중에 나는 유일한 외지 출신이었다. 절대 다수가 안의초등학교 출신이었다. 사상, 사하 등 인근 면의 작은 학교 출신도 더러 있었지만 안의초등학교 출신이 압도적이었다. 이들 주류는 안의초 46회, 안의중 15회로 연계하여 동창회를 유지하고 있다. 나도 이 모임에 몇 차례 참석한 적이 있다. 신입생은 진(眞), 선(善), 미(美), 세 학급으로 분반되었다. 미반은 50여 명의 여학생이었다. 나는 남학생뿐인 진(眞)반에 배치되었다. 급우들은 교장 아들이라는 이유로 나를 부반장으로 뽑아 주었다. 반장은 안의초등학교 반장 출신 유영재였다. 입학 한 달 만에 치른 시험에서도 그가 1등, 나는 2등이었다. 안의초등학교와 월산초등학교의 차이였을지도 모른다.
안의중학교 교정에 있는 청마 유치환 시비. 백성현 기자

아나키스트가 세운 학교
아버지는 안의고등학교에 1952년 6월부터 1953년 9월까지 교사로 재직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 시기 동안 안의중학교 교장(1952. 10. 10~1954. 10. 5)으로 재직하던 시인, 청마 유치환 선생과도 교분이 생겼다. 청마는 형 유치진과 함께 한때 아나키즘에 심취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반 후에 안의로 되돌아왔다. 밀양 세종중고등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난 직후인 1956년 4월 16일 자로 평교사로 재발령을 받았고 1957년 10월 11일 교감이 되어 1958년 10월 20까지 재직했다. 그러고는 1958년 10월에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60년 5월 31일 물러났다. 그런데 안의고등학교의 기록에는 1960. 2. 8.~5. 31. 기간 동안 교장직을 수행한 것으로 되어있다. 즉 안의고등학교 교감에서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옮겼고, 마지막 몇 개월은 고등학교 교장을 겸하게 된 것이다. 유사 이래 최초의 안의중·고교 '통합 교장'이 된 것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지역사회의 역사가 깔려 있다고 한다.

안의고등학교는 전쟁 중인 1951년 8월에 설립되었고 2000년에 공립으로 전환했다. 고등학교보다 3년 반 앞선 1946년 2월에 설립한 안의중학교는 현재도 사립으로 남아있다. "참되자! 일하자!"라는 안의중학교의 교훈은 아나키스트의 이상을 축약한 것이다. '창건(創建)'이라는 안의고등학교의 교훈도 자율과 자조로 나라를 세운다는 아나키스트의 이상을 대변한 것이다. 수년 전 한 외지인 교장이 이 문구가 고등학교 교훈으로는 매우 생뚱맞아서 바꾸려는 생각을 가졌었다고 토로했다. 당초의 건학이념은 더 이상 후세에 전승되지 않고 절멸된 셈이다. 지역사회에도 아나키스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시피 하다. 군수를 포함한 관리들은 해방 직후의 아나키스트들을 '빨갱이'의 한 부류로 치부하는 정서다.

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