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교차로] 다시 들여다 본 면책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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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반 영국은 스페인, 프랑스와 무려 30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전세계 민주국가의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국회의원 면책특권의 기원입니다.
면책특권은 그 기원에서 살펴본 것처럼 국왕의 횡포에 맞서 싸우기 위한 방패로 국민의 대표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날의 면책특권은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나 근거 없는 비방, 타인에 대한 조롱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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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자에 주어진 최소한 방어수단
국민을 향해 휘두르는 칼 아냐

17세기 초반 영국은 스페인, 프랑스와 무려 30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렀습니다. 전쟁의 장기화는 당연하게도 재정의 고갈을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당시 국왕이던 찰스 1세는 의회의 승인 없이 세금을 징수하려고 했습니다.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진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지요.
찰스 1세는 반대세력을 투옥하는 강제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의회가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을 제출해 국왕의 승인을 얻어냈지만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권리청원을 주도했던 존 엘리엇 경(Sir John Eliot)을 중심으로 불법적인 세금 징수에 반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화가 난 국왕은 엘리엇을 비롯한 아홉 명의 주동자를 체포해 런던탑에 가두었지요. 다른 사람들은 국왕의 억압에 굴복해 자신의 잘못이라고 반성하고 풀려났습니다. 엘리엇은 달랐습니다. 폐결핵에 걸린 상태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지요. 결국 그는 1632년 차가운 감옥 안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엘리엇의 논리는 단순하고 명료했습니다.
"의회 안에서 한 직무상 발언은 오직 의회 안에서만 심판받을 수 있다."
이러한 논리는 1689년 권리장전(Bill of Rights)으로 명문화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전세계 민주국가의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국회의원 면책특권의 기원입니다. 대한민국 헌법도 제45조에서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에 관하여 국회 외에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지요. 면책특권은 그 기원에서 살펴본 것처럼 국왕의 횡포에 맞서 싸우기 위한 방패로 국민의 대표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까요. 오늘날의 면책특권은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나 근거 없는 비방, 타인에 대한 조롱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특히 면책특권이 음모론과 결합하면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지요.
실제로 몇 년 전 국정감사에서 어느 의원은 당시 유력 대통령 후보가 조직폭력배로부터 받은 돈다발이라며 그 사진을 공개했습니다. 다른 당의 의원은 현직 장관이 첼리스트를 대동한 부적절한 술자리를 가졌다고 폭로하기도 했지요. 결국 모두 사실무근으로 판명이 되었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권력자를 향한 폭로는 면책특권의 취지와 조금이라도 연관성이 있다고 선해해 줄 수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국회에 증인으로 다녀온 분들의 하소연을 조금의 수고도 없이 쉽게 찾을 수 있지요. 사회적 불신을 조장하고 정치적 냉소주의를 확산시켜 결국 국민의 화합과 신뢰를 깨뜨린다는 거창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삼아 자신이 번 돈을 SNS에 올린 청년 사업가는 순식간에 정치권에 뇌물을 상납한 조폭이 되어 신상이 털렸습니다. 술자리 장소로 지목된 술집의 사장은 온갖 악플에 시달리다 영업에도 큰 지장을 받았고, 영문도 모르는 첼리스트는 순식간에 접대부가 되는 심각한 사생활 침해를 겪게 되었지요. 면책특권이 음모론의 진앙지 혹은 확대 재생산지로서 악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면책특권은 권력자를 견제하기 위해 국민의 대표자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방어수단입니다. 국민을 공격하거나 음모론에 편승해 권력자가 아닌 국민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면책이 방종으로 오인되면 방패가 아닌 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양중진 대표변호사(법무법인 솔)·전 수원지검 1차장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