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의 봄, 비천상 여인과 함께… ‘달을 쓿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달이 왜 반달이 되는지 아시는지요. 하늘이 꼭 껴안아 줬기 때문입니다. 달이 왜 보름달이 되는지 아시는지요. 달이 하늘을 품었기 때문이지요.”
이달 10일 밤 강원 평창군 오대산 월정사 대법륜전 앞마당. 깊은 밤 월정사 경내에서 한주(閒主) 현기 스님이 산과 우주, 달과 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 주악비천상 여신의 환생


고려 말 나옹선사, 조선 시대 매월당 김시습, 율곡 이이, 교산 허균…. 오대산에 머무르며 시를 지었던 고승과 선비들의 시도 낭송됐다. 원로 배우 박정자(84)를 비롯해 서이숙, 김상중, 유준상 같은 중견 배우들이 낭송하는 시는 연극의 대사처럼, 가수의 노래처럼 들렸다. 문화인류학자 이희수 교수는 남(南)인도 민화(民畵) 낭골리를 소개하고, 튀르키예에서 온 시인 아타세벤 파덴도 자신의 시를 낭송했다. 막말과 비언어가 난무하는 시대. 오랜만에 느껴 보는 품격있고 정제된 언어의 향연이었다.
“오대산 산세는 모난 곳 없이 완만한 모습이 달을 닮았습니다. 오대의 다섯 봉우리를 달, 물, 님, 나무, 꽃으로 상징화해서 예술법석을 마련했어요. 달의 정령을 불러 산벚꽃나무와 돌배나무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상원사 동종 속 주악비천상의 공후 여인과 생황 여인에게 예술적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었습니다.” (박용재 시인)

그런데 오대산 월정사에서 ‘달을 쓿다’니 무슨 말이었을까. 사전을 찾아보면 ‘쓿다’는 ‘곡식을 찧어 겨(겉껍질)를 벗기고 깨끗하게 만들다’라고 뜻풀이가 돼 있다. 한자어로는 ‘도정(搗精)’이다. 쌀을 도정하는 곳이 바로 ‘정미소(精米所)’. 그러고 보니 월정사(月精寺)란 이름이 바로 ‘달을 닦아서 깨끗하게 만드는 절’이란 뜻이었구나. 하얀 달을 바라보며 마음도 깨끗하게 닦는 절이 오대산 월정사인 셈이다.
● 전나무숲길 지나 선재길
신록의 계절 5월. 오대산은 월정사부터 상원사까지 온통 초록의 향연이다. 총연장 약 10km 되는 선재길과 전나무숲길은 오대산에서 흘러내려 오는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이다.
상원사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우통수(宇筒水)라는 샘물이 있다. 현대에 정밀 측정 결과 한강의 발원지가 강원 태백시에 있는 검룡소로 밝혀지기 전까지, 우통수는 조선시대 내내 한강의 발원지로 신성시됐다. 세조도 우통수 아래 계곡에서 목욕을 하다 문수보살을 만나 피부병이 깨끗하게 나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우통수에서 흘러나온 물은 오대천이 되어 선재길을 흘러간다. 선재길은 나무다리, 밧줄다리, 섶다리, 돌다리 등 계곡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다리를 건너다니며 걷는 계곡길이다. 너럭바위를 흘러가는 계곡물은 작은 폭포를 이루기도 하고, 모래사장에는 소원을 빌며 쌓아 놓은 돌탑이 가득하다. 키 큰 전나무숲과 참나무숲 속에 연분홍 진달래와 철쭉이 반기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숲 속 풍경은 다른 세상같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성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 놓고/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초록의 숲과 크리스탈블루 하늘. 시원한 물소리와 새소리. 5월의 선재길은 나옹선사가 왜 청산과 창공, 물과 바람에 대해 시를 썼는지를 알게 해준다. 특히 선재길에서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 파도소리, 계곡물 소리, 빗방울 소리 같은 물소리는 사람 뇌파 중 알파(α)파와 동조한다고 한다. 주파수 8∼14Hz의 알파파는 명상 상태에 있을 때 나타나는 뇌파. 선재길을 걷다보면 명상 상태에 빠져들며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다.
자작나무를 닮은 키 큰 ‘거제수 나무’도 만난다. 거제수는 나무껍질이 종이처럼 얇아서, 종이가 귀했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나무껍질에 글을 썼다고 한다. 선재길을 걷던 구도자들도 이곳에서 깨달음의 글귀를 남겼으리라.
선재길은 평탄하지만 모두 걷는 데는 약 3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없는 사람은 월정사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전나무숲길(약 1km)만 걸어도 좋다. 전나무 1700여 그루가 빽빽하게 심어진 숲속 길을 걷다보면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가 온 몸 구석구석까지 청소해주는 느낌이 든다.

전나무숲길에서 만나는 가장 귀한 친구는 바로 다람쥐다. 보통 다람쥐들은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포로로’ 도망가는데, 이 길의 다람쥐들은 다르다. 땅콩이나 잣, 호두 같은 견과류 몇 알을 호주머니에 넣고 걷다 보면 다람쥐가 다가온다. 가만히 손바닥 위에 땅콩을 올려놓고 기다린다. 다람쥐가 손바닥까지 올라와 땅콩을 가져간다. 그리고 나무밑으로 도망가 조그만 입으로 야무지게 오물오물 먹는 모습이 귀엽다. 월정사 해융 스님은 “전나무숲길에서는 다람쥐도 본능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오대산=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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