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1000원 한 장에 모십니다”… 그들이 지하철에 돌아왔다
불황이 키운 ‘지하 시장’
무허가 이동 상인 증가

지난 11일 서울 지하철 1호선 인천행 열차. 퇴근길에 오른 승객들 틈에서 작은 체구의 60대 남성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가 가방에서 뭔가 꺼내 들었다. 바늘이었다.
“승객 여러분 가내 평안하십니까. 좋은 물건이 있어 소개하러 나왔습니다. 바늘에 실 꿸 때마다 고생하시죠? 이건 구멍을 찾을 필요가 없는 특허 바늘입니다. 자, 보세요. 이렇게 척! (몸을 좌우로 돌리며) 척! 실만 갖다 대면 자동으로 꿰어집니다. 시중에선 5000원이지만 오늘 특별히 1000원 한 장에 모십니다.”
승객 대부분 스마트폰만 들여다봤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은 무슨 퍼포먼스인가 싶어 눈이 동그래졌다. 70대 남자 승객이 1000원 지폐를 내밀며 “어떻게 하는 거라고? 시범 다시 해봐요” 했다. 이 승객은 기자와 눈이 마주치자 “마누라 갖다주려고…”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음 날 3호선 대화행 열차.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백발 여성이 나타났다. 바퀴 달린 카트에 “한 번만 도와주세요”로 시작되는 사연이 붙어 있었다.
그는 칫솔을 꺼내 자신만의 좌판에 진열하듯 승객 10여명의 무릎 위에 탁탁 올려놓았다. 누군가 지갑을 열었다. 여성은 나머지 칫솔을 말없이 거둬들이곤 다음 칸으로 옮겨 갔다. 이 모든 과정에 20초쯤 걸렸을까? 바로 그때, 기관사의 육성 방송이 흘러나왔다. “무허가 상인들 다 나오세요! 이번 역에서 빨리 내리세요!”

사라져가던 지하철 잡상인, 공식 용어로 불법 이동 상인들이 다시 눈에 띄기 시작했다. 깊은 불황과 양극화 속에 악화한 민생 경제의 단면이다.
노인 빈곤율이 40%에 육박, OECD 선진국 중 1위인 나라에서 생계가 어려운 고령자들이 지하의 불법 시장에 뛰어드는 것으로 보인다. 고유가로 시민의 대중교통 이용이 늘고 저가품 수요가 커진 것도 배경으로 분석된다.
옛 보부상들이 1974년 개통한 서울 지하철로 유입되면서 이동 상인은 한국 지하철 특유의 풍경이 됐다. IMF 사태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최대치로 늘다 점차 감소했다.
2020년대 이후엔 코로나 대유행, 온라인 쇼핑과 다이소 등 저가 잡화점 확산, 실물 화폐 사용률 저하 등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이후 대거 택배나 경비, 청소직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이 지하로 돌아온다는 것은 극심한 취업난과 경제난을 방증한다.
이동 상인의 무대는 주로 서울 지하철 1~4호선과 부산 지하철 1호선 등 구도심과 외곽 지역을 지나는 오래된 노선들이다. 50대 회사원 김모씨는 “경의중앙선을 탈 때마다 지난해와 달리 잡상인을 한두 명씩 본다”며 “퇴거 명령 방송도 계속 나오더라”고 했다. 반면 젊은 직장인이 많이 타는 9호선이나 노인 무임승차가 안 되는 공항철도 등엔 드물다고 한다.

이들이 파는 물건은 볼펜부터 깔창, 우비, 변기 뚫는 도구, 무릎 보호대, 접착식 옷걸이, 만능 드라이버, 손전등, 파스까지 다양하다. 시즌 상품이 많은데 겨울엔 덧버선, 방한 마스크와 장갑이, 요즘 같은 나들이철엔 고글, 등산 스틱, 김장 비닐로도 쓸 수 있다는 방수 돗자리 따위가 등장한다. 대개 1000~5000원으로 ‘공장 원가’로 판다고 주장한다.
옛날엔 불 켜지는 탱탱볼, 짖는 강아지 인형 등 어린이 장난감도 있었지만 이제 저출산으로 고령자 특화 물건에 집중되는 추세다. 일부 노선에선 플랫폼에 자리까지 깔고 짝퉁 가방을 팔기도 한다.
지하철 내 판매(강매)는 구걸, 포교, 영업·모금 등과 함께 엄연한 불법 행위다. 시민에게 불쾌감을 주기 십상이다. 60대 주부 홍모씨는 “칼갈이 도구를 시연하기에 호기심에 바라봤더니 내 앞에 와 식칼로 종이를 쓱쓱 베어내 무서웠다”고 했다.
당국은 “상인에게 관심을 보이거나, 언쟁하지 말고 조용히 신고하라”고 한다. 전화·문자·온라인으로 신고 가능하며, 역무원이나 보안관이 즉각 출동한다.

하지만 시민이 적극 신고하는 경우는 손에 꼽는다고 한다. 신고는커녕 사주는 사람이 더 많다. 한 중학생이 “2호선 잡상인을 신고했다”고 SNS에 자랑했는데, 네티즌들이 “한 가장의 일자리를 빼앗은 것” “인성이 덜 됐다”고 꾸짖었다.
서울교통공사는 “불법 상인이 늘어 주의 깊게 보고 있다”면서도 “생계형이라 근절에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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