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조교 부임한 최명영, 창고서 이중섭 ‘흰 소’ 찾아내
예술가와 친구들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 최명영. 평면인 회화의 기본적인 존재 방식에 대한 물음에 천착하는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사진 더페이지갤러리]](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16/joongangsunday/20260516002218844vyfu.jpg)
이중섭 ‘흰 소’, 홍익대 박물관 대표 작품
해방되고 남북이 갈리자 해주는 이북이 되었다. 1948년 최씨 일가는 옹진으로 월남했다. 최명영은 옹진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최명영이 국민학교 3학년일 때 6·25 전쟁이 터졌다. 3·8선 직하의 옹진에선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부상병을 실은 앰뷸런스가 그대로 사곶항으로 돌진하여 빠져들었다. 떼로 몰린 피난민들이 배를 타려는데 대부분은 바다로 빠졌는지 주인을 잃은 보따리만이 바닷물 위로 둥둥 떠다녔다.
부친과 옹진국민학교 교장으로 있던 외삼촌, 이 두 사람만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남은 가족은 해주 가까운 해변인 삼봉으로 피난을 갔다. 몇 달 후 거기서 배를 빌려 연평도로 갔다. 어머니와 두 살 위 형 최권영, 최명영, 동생 셋은 연평도에서 미군 LST선(상륙함)을 타고 군산으로 가서 피난민 수용소인 군산여상 강당에 짐을 풀었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배가 군산과 장항을 오갔다.
소년은 승객을 상대로 장사에 나섰다. 꽈배기를 받아 목판에 담아 배 안에서 팔았다. 꽈배기의 고소한 기름 냄새가 주린 배를 자극했다. 꼭지를 살짝 따서 먹고는 손님에게 안 보이게 뒤집어 놓았다. 군산 앞바다에 가서 대합을 잡는 날은 즐거웠다. 수용소 생활을 한 지 얼마되지 않아 부친과 상봉했다.
가족은 군산을 떠나 용인 백암에 정착했다. 부친은 그곳의 금융조합에서 일했다. 최명영은 1년 꿇어 백암국민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 4학년 때, 최명영은 용인 양지의 육군후송병원에 갔다. 강당에 모인 부상병들 앞에서 윤복진 작사, 박태준 작곡의 ‘고향하늘’을 독창으로 불렀다. “푸른 산 저 너머로 멀리 보이는//새파란 하늘 그리운 하늘//언제나 고향 집이 그리울 때면//저 산 너머 하늘만 바라봅니다.” 소년의 노래에 군인들이 다 울었다. 지휘관이 한 번 더 부르라 했다. 이번에는 군인들도 소년도 함께 울며 노래를 불렀다.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국가연합고시를 봐야 했다. 형 최권영은 시험 성적이 좋아 인천중학교에 입학했다. 이를 계기로 최씨 가족은 인천으로 이사했다. 아무래도 인천이 고향 해주에 더 가까운 탓도 있었다. 인천중학교에 다니던 형이 점묘화로 그린 사과 수채화를 집으로 가져왔다. 너무 좋아 보였다. 최명영은 이걸 따라 그렸다. 그림다운 그림을 처음 그려본 순간이었다.
1954년, 최명영은 인천사범학교 병설중학교에 입학했다. 미술 교사는 일본미술대학 출신인 박응창이었다. 그는 습자도 함께 가르쳤다. 개칠은 안 된다는 걸 늘 강조했다. 어찌 된 셈인지 최명영은 개칠을 하고도 걸리지 않았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잡지에는 군복 차림에 수렵을 하는 흑백 사진이 많았다. 연필로 따라 그려보았다. 잘 그린다는 평을 받았다. 미술반이 있긴 했으나 거기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1957년, 최명영은 인천사범학교로 진학했다. 평생의 인연이 되는 정상화가 미술 교사로 부임해 왔다. 정상화는 최명영이 자신의 모교인 서울미대에 진학하길 원했다. 홍대로 진학한 최명영이 못마땅했다. 둘은 나중에 다시 가까워졌다. 스승과 제자는 나중에 한국 단색화의 중심 작가가 되었다. 올해 초 스승 정상화가 세상을 떠났다. 제자 최명영은 끝까지 떠나는 길을 지켰다.
사범학교 3학년 때 인천 답동성당 부속국민학교로 교생실습을 갔다. 그곳의 수녀가 성 프란치스코, 성 이냐시오 등 고행자들의 수기 읽기를 권면했다. 책을 들고 집에 와서 읽었다. 그들처럼 고난을 겪으며 자신을 실현하고 싶다는 의지가 생겼다. 미술을 선택하는 일이 고난이고 훌륭한 화가가 되는 것이 실현이었다. 교사를 포기하고 미대에 진학하면 돈 쓰는 일만 기다리고 있다. 서울고 3학년 최권영과 인천사범학교 2학년 최명영은 머리를 맞대었다. 형은 학비가 안 드는 육군사관학교로 가기로 했다. 형은 나중에 육군 중장이 되었다.
1960년, 최명영은 홍대에 입학했다. 인천사범학교 미술반 동기인 이반·김영배·김창희는 교사로 지내다가 1년 늦게 미대로 들어왔다. 대학 1학년 때는 김원·이종무, 2학년 때는 한묵, 3학년 때는 이봉상·이규상 그리고 4학년 때는 김환기의 실기 지도를 받았다. 이론 과목으로 이경성의 서양미술사, 최순우의 한국미술사, 맹인재의 동양미술사, 조요한의 미학 그리고 이기영의 불교철학을 수강했다.
김환기의 집은 학교 정문 앞이었다. 가끔 부인 김향안이 시루떡을 머리에 이고 실기실로 찾아왔다. 떡을 학생들과 나누어 먹었다. 최명영은 김환기에게 자신의 그림을 봐 달라 했다. 김환기가 말했다. “최군, 1년 대패질한 목수와 10년 대패질한 목수의 대패질이 같을 것 같나?” 화가라면 평생 지속해야 할 수행의 귀중함을 한마디로 정리해주었다.
최명영은 동인천역에서 서울역까지 기차 통학을 했다. 서울역에서 내려 홍대까지 걸어가거나 신촌역에서 내려 걸어가곤 했다. 같은 코스로 통근하던 이경성을 기차 안에서 자주 만났다. ‘오리진’이란 미술그룹 이름을 작명하여 기차 안에서 이경성과 의논했다. 대학 4학년 때인 1963년 오리진 창립전을 열었다. 최명영은 앵포르멜풍으로 100호 세로 작품 석 점을 그렸다.
전시를 1주일 앞두고 마음이 바뀌었다. 그렸던 걸 다 지우고 그 위에 검은 안료를 뿌렸다. 캔버스를 이어 붙인 부분에 물감이 몰려 세로로 짙은 선이 하나 생겼다. 어떤 작품에는 동그란 기름 반점이 세 개나 커다랗게 생겼다. 이규상이 말했다. “캔버스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작가가 책임을 져야 해.” 큰 가르침은 평생의 화두가 되었다.
![1966년 최명영(왼쪽부터), 박서보, 이일, 하종현. [사진 최명영]](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16/joongangsunday/20260516002220117bfcc.jpg)
단순함의 반복이 만드는 깊이있는 작업 지속
이경성이 홍익대 박물관장이 되자 ‘흰 소’를 박물관에 전달했다. ‘흰 소’는 지금까지 홍익대 박물관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1967년, 황해도 봉산 사람으로 최명영을 아껴주던 화가 이종우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신부는 울산여고 출신으로 대학 3년 후배인 이수자였다.
![최명영의 작품 평면조건 08-18, 2007, 캔버스 위 아크릴, 112x162㎝. [사진 더페이지갤러리]](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16/joongangsunday/20260516002221419shwi.jpg)
1984년, 세키네 노부오, 요시다 가츠로, 나리타 가츠히코 등 물질을 사건으로 다루는 일본 모노하의 작가들과 동경화랑에서 ‘휴먼 도큐멘타’전을 가졌다. 한국의 AG 그룹(한국아방가르드협회, Avant-Garde) 세대와 모노하 세대를 이어주는 첫 전시였다. 2016년에는 최명영·이승조·서승원의 ‘오리진’전이 파리의 뻬로탕갤러리에서 열렸다. 마포구 신수동 작업실에서 늘 들려오는 필립 그래스, 스티브 라이히의 미니멀 음악처럼, 단순함의 반복이 가져다주는 온축의 숭고함을 존중하는 작업을 최명영은 오늘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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