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예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굴욕’ 형벌도 반전 성과, 매력녀의 남다른 생존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제인 쇼어 편]

이원율 2026. 5. 1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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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역사편. 제인 쇼어
상인 딸, 국왕의 연인으로 궁 입성
미모·지식·수완 잘 다져 권력 손에
‘굴욕 참회’ 위기마저 끝내 기회로
매혹적 행보로 다진 여인의 생존기
발렌타인 카메론 프린셉, 제인 쇼어의 탈주(일부 확대), 1865년경, 캔버스에 유채, 155.3x92.4cm,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 [작가 1904년에 사망]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새로운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으로 쓰였습니다.

회색 눈동자의 유혹
心 사로잡은 수완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제인 쇼어는 회색빛의 커다란 눈을 가졌다.

얼굴은 동그랬다. 노란 머리칼은 물감에 푹 젖은 듯 진하게 반짝였다. 작은 키와 여린 어깨는 보호본능을 일으켰다. 의외로 성숙한 몸선과 생기있는 분위기도 눈길을 끄는 지점이었다. 그녀는 수완도 좋았다. 특히 말솜씨가 탁월했다. 어떤 이야기든 조리있게 잘 풀었다. 칭찬은 자연스럽고, 설득은 억지스럽지 않았다. “역시 당신과는 통하는 게 있어요.” 그녀는 종종 이런 말과 함께 입꼬리를 올렸다. 괜히 상체를 붙였다. 다소 영악해 보이기도 했지만, 이런 행동이 이상하게 밉지만은 않았다. 그래서일까. 남자 중 열에 아홉은 어느새 마음의 빗장을 풀곤 했다. “그녀는 단정하고 아름다웠습니다. (…) 남성들은 쾌활하고 장난기 넘치는 성격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는 동시대 정치가 토머스 모어의 기록이었다. 제인은 그 시대 왕의 가장 존재감 있는 정부(mistress)였다. 귀족들의 흠모 대상이었으며, 손꼽히는 부자들도 만나고 싶어하는 인물이었다.

제인은 뜨고 지는 권력의 속성을 알고 있었다. 본인의 위상을 체감하고 있음에도 오만에 취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런 만큼 삶의 기쁨과 영광을 잔잔하게 이어가는가 싶었지만…

리처드 레드그레이브, 참회하는 제인 쇼어, 1864 [bonhams.com, Public Domain, en.wikipedia.org]

영국 화가 리처드 레드그레이브의 <참회하는 제인 쇼어> 속 제인을 보라.

그녀의 행색은 지금껏 묘사한 모습과는 다소 달라보인다. 밝은 머리칼에는 한 가닥 힘도 없어 보인다. 당장 허름한 가운과 얇은 속치마 말고는 무엇도 걸치지 못한 모습이다. 손에 든 건 촛농을 떨구는 양초뿐이다. 제인은 지금, 몸을 함부로 놀렸다는 죄목을 뒤집어썼다. 그 대가로 공개 참회라는 모욕적인 형벌을 받아야 한다. 이런 차림새로 시내 한복판을 걸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음흉한 눈빛, 수군거리는 목소리와 따가운 손가락질을 견디며. 왕족과 목수, 상인과 학자, 묘지기와 노숙자가 있는 골목까지 구석구석.

포목상 딸서 ‘부인’으로
화술과 예법을 익히다
작자 미상, 제인 쇼어, 에드워드 4세의 정부, 1700~1729, 캔버스에 유채, 99x87cm, 내셔널 트러스트 [Artk UK,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제인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램버트. 그녀는 1445년 런던에서 포목상의 딸로 출생했다.

제인은 주로 가게에서 컸다. 그곳은 늘 북적였다. 각지의 귀부인도 찾아왔다. 이들은 고급 옷감과 실, 사치스러운 장신구를 구경하고 흥정했다. 때로는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았다. 사교 모임을 하는 양 종일 웃고 떠들었다. 제인은 대개 부인들 품에 있었다. 귀엽고, 잘 안기고, 낯도 가리지 않는 아이를 마다할 이는 없었다. 그녀는 이들의 대화와 몸짓 틈에서 사회를 엿봤다. 고위층의 화술을 배우고, 최신 유행하는 예법도 익힐 수 있었다. 그뿐인가. 상대를 은근하게 애태우는 법, 웃음과 눈물로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 비결에도 눈 뜰 수 있었다. 사실은 왕족도, 귀족도 아니었던 제인. 그녀가 ‘고상’해질 수 있던 건 이 덕분이었다. 제인은 1466년경에 결혼했다. 당시 나이는 스물한 살. 남편은 윌리엄 쇼어였다. 그녀보다 15년쯤 세월을 더 산 은행가 겸 금세공인이었다. 제인은 그때부터도 미모와 특유의 생기로 인기가 많았다. 왕실에까지 이름이 닿을 정도였다. 실세 왕족부터 고위 관리 등 구혼자가 줄을 이었다. 그런 만큼, 그녀의 아버지가 직접 적당한 신랑감을 골랐다고 한다. 확실히 남편 윌리엄은 무난한 사람이었다. 외모도 훌륭하고, 성격도 부드러웠다. 사업 감각 또한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합방을 하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그가 자식을 만들 수 없는 신체였다는 게 그것이었다. 이는 서약 10년 차인 1476년. 교황으로부터 “둘 사이 혼인은 무효”라는 판단을 끌어내는 데 결정적 이유가 되고 만다.

제인은 다시 홀몸이 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재차 왕실로도 퍼졌다. 그곳에서 특히나 더 눈을 번뜩이는 이가 있었다. 국왕 에드워드 4세였다. 그랬다. 사실 그 또한 그녀를 탐내고 있었다. 제인은 얼마 후 왕궁에 발을 올렸다. 에드워드 4세의 은밀한 부름에 응한 모습이었다. 제인 또한 이제야 자기 그릇에 맞는 무대를 찾았다고 봤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서일까. 훗날에는 소문도 돌았다. 제인과 에드워드 4세는 일찌감치 정을 맺고 있었다는 것. 제인의 교태에 빠진 에드워드 4세가 그녀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판을 짜고, 제인도 모른 척 가만히 있었기에 혼인 무효를 ‘기획할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심지어는 에드워드 4세 측에서 만들어진 증거까지 들이밀며 교황과 윌리엄에게 압박을 가했으리라는 추측까지 나왔다. 다만, 관련해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

국왕의 특별한 파트너
영리한 처세술로 생존
작자 미상, 제인 쇼어로 불리는 여성의 초상화, 1590년경 [katherinethequeen.com,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제인은 이제 왕과 사는 여자였다. 얼마 가지 않아서는, 그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대우까지 받을 수 있었다.

에드워드 4세는 이성을 밝혔다. 그는 정식 배우자 엘리자베스 우드빌 말고도 수많은 정부를 거느렸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애인을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그저 몸으로만 통하는 이, 글과 말까지도 주고받을 수 있는 자, 나아가 정치판에서의 복잡한 딜레마까지 논의할 수 있는 사람. 제인은 모든 역할을 빈틈없이 수행할 수 있는 파트너였다. 이렇게 되면 무서울 게 없어 경거망동할 법도 하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외려 반대 모습을 보였다. 일단, 제인은 에드워드 4세의 선물 공세에 일부러 호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남자의 충동성을 알고 있었다. 어떤 사안이든 얼마나 쉽게 싫증을 내는지도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애를 태웠다. 때로는 몸과 마음을 다 내어주는 듯하다가도, 또 언젠가는 “불쾌감을 주지 않는 선에서 재미있게 비꼬기도 하며(토머스 모어의 묘사 참고)” 주체성을 놓지 않았다. 그런 한편 제인은 다혈질인 에드워드 4세의 눈 밖에 난 이들도 챙겼다. 억울한 사연은 귀담아들었다. 딱한 상황은 직접 받아 적었다. 이를 챙겨 왕을 찾아 사면을 청하기도 했다. 이 또한 영리한 행보였다. 당시 제인에게는 믿을 구석이 없었다. 상인 집안 출신인 만큼 그럴듯한 인맥도, 도움받을 후원자도 찾기가 어려웠다. “얼굴과 몸뚱이만 믿고 굴러들어온 유녀.” 흔한 다른 정부처럼 자기 잇속만 챙겼다면 분명 이러한 비난에 몰렸을 것이다. 제인은 그러지 않았다. 외려 자신에게 빚을 진 사람만 하나둘 만들어간 움직임이었다.

존 앳킨스 그림쇼, 제인 쇼어(연극 ‘제인 쇼어’ 제2막의 한 장면), 1876, 캔버스에 유채, 61.5x92cm, 본햄스 경매 낙찰, 윌슨 바렛 컬렉션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그 결과, 제인은 모략과 암투가 들끓는 궁정에서 상처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까다로운 에드워드 4세의 바로 옆에서, 대놓고 귓속말을 할 수 있는 사이로 굳건히. 다만 제인과 에드워드 4세 사이 자식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가 맞지 않아서일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제인의 전략일 수 있다는 추측이 나온다. 그녀가 원할 때나, 에드워드 4세가 필요로 할 때나 언제든 침소에서 만날 수 있게끔 계산을 했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4세는 그녀에게 언제나 특별한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이 또한 모어의 기록 중 일부 내용이다.

공든 탑 허무하게 붕괴
상황, 완전히 달라졌다
루카스 호렌보트, 에드워드 4세, 1520년경 [Scanned from Hearn, Karen, ed. Dynasties Painting in Tudor and Jacobean England 1530-1630. New York Rizzoli, 1995,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하지만 그런 제인에게조차, 에드워드 4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계산 밖의 일이었을 것이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숨이 끊어졌다. 나이는 마흔 살. 194㎝에 이르는 키와 육중한 체격을 볼 때, 아직 죽기에는 이른 듯 보였다. 사인은 폭식과 폭음, 복잡한 여자관계에 따른 급성 질환 내지 감염병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인이 에드워드 4세의 정부가 되고 8년 만이었다. 그녀 나이는 서른여덟이었다. 제인은 곧장 움직였다. 다음 권력의 흐름을 냉철하게 추적했다. 그녀는 이제 에드워드 4세의 의붓아들인 토머스 그레이와 가까워졌다. 그런 한편, 에드워드 4세의 오른팔이었던 윌리엄 헤이스팅스와도 사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렇게 해 자신의 사회적 순장(殉葬) 위기를 막아서고자 했다. 이는 그녀가 기민한 여인이었으며, 생존과 안위를 위해 주체적으로 나선 인물이었다는 점을 재차 방증한다.

풀, 톰슨, 제인 쇼어 역의 사라 시던스, 1806,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샴페인 캠퍼스 도서관 [University of Illinois Urbana-Champaign University Library, Illinois Digital Heritage Hub.Record,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하지만, 애석하게도 제인은 당시 세상과 합을 맞추지 못했다.

이것은 실수라기보다는 사고였다. 제인은 에드워드 4세의 친아들 에드워드 5세가 당연히 왕좌를 이을 것으로 봤다. 제인이 꼬드긴 두 남자, 토머스 그레이와 윌리엄 헤이스팅스는 에드워드 5세의 왕위 계승 과정에서 막강한 입김을 가할 게 분명해보였다. 에드워드 5세는 그래봤자 아직 열세 살이었으니까. 그런데 또 한 번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죽은 에드워드 4세의 남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정변을 일으켜 나라를 뒤엎고 만 것이다. 나아가, 아예 본인을 리처드 3세로 칭하고 보란 듯 왕좌에 눌러 앉아버리기도 했다. 진짜 왕이 돼야 했을 에드워드 5세는 런던탑에 가둔 채로.

설계 다 끝난 줄 알았지만
시대와 합 맞추지 못하고
작자 미상, 리처드 3세, 1626년 이전, 패널에 유채, 57.8x44.8cm, 둘리치 픽처 갤러리 [Google Cultural Institut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제인은 또 한 번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따지자면 줄을 잘못 선 격이었다.

리처드 3세는 바로 숙청에 나섰다. 선왕 에드워드 4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행보였다. 토머스 그레이는 황급히 도망쳤다. 윌리엄 헤이스팅스는 그러지도 못했다. 붙잡힌 그는 제대로 재판도 받지 못한 채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리고 제인. 제인도 사슬을 찼다. 그녀는 리처드 3세 반대파가 편지를 주고받는 데 있어 연락책 역할을 하던 중 잡혔다고 한다. 다만, 실제로 그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인이 에드워드 4세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 중 한 명이었던 만큼, 어쨌건 그녀는 당시 실세들의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제인이 쓴 혐의는 마법이었다. 역시나 그녀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혐의는 곧 취소됐다. 하지만, 곧이어 뒤집어쓰게 된 죄목은 피하기가 어려웠다. 몸을 멋대로 놀렸다는 것이었다. 선왕 에드워드 4세를 꼬드기고, 토머스 그레이를 침소로 부르고, 윌리엄 헤이스팅스와 사랑을 속삭였으며, 이 외에 수많은 남자에게 접근하고자 했다….

발렌타인 카메론 프린셉, 제인 쇼어의 탈주, 1865년경, 캔버스에 유채, 155.3x92.4cm,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 [작가 1904년에 사망]

“아니, 그건…”

제인은 반박을 하려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신분과 환경, 권력구도 등 여러 사정과 상황이 생략돼 있긴 했지만, 수많은 사람을 이용해왔다는 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공개참회’ 형벌이었는데
굴욕·수치조차 아름답게
에드워드 페니,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참회하기 위해 끌려가는 제인 쇼어, 1775~1776, 캔버스에 유채, 162.6x122cm, 버밍엄 박물관 재단 [Ark UK,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제인은 가운과 속치마 한 장만 걸친 채 길 위에 섰다.

형벌, 공개 참회. 이는 사회적 말살과 다를 바 없었다. 제인은 촛농을 떨구며 걸었다. 바람이 불면 옷을 여몄다. 발끝에는 돌과 모래 따위가 튀었다. 사람들이 몰려왔다. 제인을 이 꼴로 만든 리처드 3세파 사람들은 기대했을 것이다. 그녀가 곧 곁눈질, 아울러 조롱과 멸시에 짓눌려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맛보기를.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듯하다. “그녀는 겸손한 표정과 걸음걸이로 부드럽게 움직였습니다. 가운 말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차림이었지만, 너무도 예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 그녀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또한 모어의 주장으로 남아있는 문장이다. 제인을 알던 이들은 그녀가 과거 처신을 잘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제인을 모르던 이들은 이날 그녀의 꼿꼿한 모습에 마음을 줬다. 그 결과, 외려 리처드 3세파의 옹졸한 복수심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윌리엄 블레이크, 제인 쇼어의 참회, 1793년경, 종이에 잉크 등, 테이트 미술관 [tate.org.uk,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그래도 형벌은 형벌이었다.

제인은 긴 시간 이어진 공개 참회 후 루드게이트 감옥에 갇혔다. 그곳은 열악한 공간이었다. 언제 풀려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제인이 보통 인물이었다면, 그녀의 삶은 “창살에서 쓸쓸한 여생을 보냈다”는 식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제인이 그런 여인인가. 상인의 딸에서 권력의 정점 곁에 선,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는 와중에도 이를 드라마로 만든 그녀가 호락호락한 인물인가.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창살도 못 막은 생존력
마지막까지도 반짝였다
제인 쇼어의 참회, 1865 [존 카셀(출판업자), Internet Archive,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인은 죄수의 몸으로도 상대를 유혹할 수 있었다.

제인이 홀린 이는 리처드 3세의 측근이자 법무차관, 토머스 라이넘이었다. 불같은 사랑에 빠진 라이넘은 벌써 그녀와의 언약을 꿈꾸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라면 본인의 권한과 특권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제인은 그 덕에 옥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상인 아버지 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이어 얼마간 시간이 흘러, 행사가 하나 열렸다. 결혼식이었다. 신랑은 라이넘, 신부는 역시나 제인이었다. 제인은 말끔한 옷을 입은 채 또 한 번 활짝 웃었다. 리처드 3세는 그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으리라. 그가 볼 때 그녀는 끈질긴 밉상이자 잠재적 위험이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라이넘에게 “기만에서 빠져나오라”고 다그친 적도 있었다. 주교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내 “놀라울 정도로 눈이 먼” 라이넘의 이성을 되찾게 해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라이넘은 일에 있어선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관료였다. 그를 잃을 수는 없었다. 합리화도 했다. 차라리 이렇게 하면 제인을 예측가능한 범위 내 묶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제인은 다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불모지에서 피워낸 신들린 역량이었다.

격동 속에서 살아남았다
끝내는 인생의 승리자로
제인쇼어, 위어 컬렉션, 1885, 포스터, 43x56cm, 스코틀랜드 국립도서관 [작가(극본) J. 윔셋 볼딩, R. 팔그레이브, 제작인쇄 클레멘트-스미스사, 1885년 12월 14일 공연 로열 프린세스 극장] [digital.nls.uk74553706,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격동의 역사는 이어졌다.

리처드 3세에 이어 이번에는 헨리 7세가 왕좌에 올랐다. 왕이 바뀐 만큼 정치판도 새롭게 짜였다. 라이넘은 고위직을 잃었다. 그래도 역시나 기민한 행정가였는지, 중간 관리자급 이상의 새로운 직을 받아 일을 이어갈 수 있었다. 숙청도 되지 않고, 완전히 영향력을 잃지도 않았다. 제인은 라이넘과의 결혼 생활 중 한 명의 딸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식적으로는, 그녀는 더 이상 정치 무대에 올라서지 않았다. 그녀는 적당한 품위와 사치를 이어가며 살았다고 한다. 이후 자연스럽게 잊히는 삶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라이넘이 먼저 죽은 후로는 가난도 겪었다고 하지만, 이를 놓곤 학계 내 의견이 분분하다.

니콜라스 로우의 극 ‘제인 쇼어’ 속 해리엇 스미슨, 드베리아와 불랑제, 석판화, 1827, 21.5x17.5cm, 프랑스 국립도서관 [작가 아쉴 드베리아, 루이 불랑제, 오귀스트 드 발몽, 발행처 H. 고갱 석판 인쇄소 [Public Domain, commons.wikimedia.org]

제인은 1527년경에 영영 눈을 감았다.

여든둘 나이였다. 그 시대로 치면 상당히 장수한 편이었다. 그녀는 늘 더 나은 삶을 꿈꿨다. 항상 다음 계단을 올려다봤다. 그곳에 오르기 위해 당장 움직이고, 때로는 추하게 보일 것을 알면서도 보란듯 발악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전투에서는 진 적이 있지만, 전쟁에서는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숭배받고, 몰락하고, 굴욕을 겪기도 했지만, 끝내는 호흡을 이어갔다. 생존했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여릿한 그녀 몸에는 펄펄 뛰는 야수의 심장이 깃들어 있었다. 그 박동은 지금도 노래와 소설, 드라마와 영화 등으로 존재감을 이어가고 있다.

*엘리자베스 램버트라는 이름이 왜 지금껏 ‘제인 쇼어’로 알려지게 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 시절 에드워드 4세의 아내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한 표기였을 가능성이 나온다. 그런가 하면, 그저 시인과 극작가 등이 부르기 쉽게 만들어낸 이름일 수 있다는 추측도 있다.

참고 자료

More, Thomas., The History of King Richard III. Cambridge University Press

C.J.S. Thompson, The Witchery of Jane Shore, the Rose of London, Grayson & Grayson

katherinetheque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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