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이 된 내 집 마련…분양사기 15년 투쟁기 [북스&]

이혜진 선임기자 2026. 5. 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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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75일, 집으로 가는 먼길(이종수 지음, 바틀비 펴냄)
집으로 가는 먼 길

저자는 18년 전,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찾았다. 시행사 측이 내놓은 청사진은 화려했다. 단지 안에는 생태공원이 조성되고, 인근에는 IC가 설치될 예정이었다. 존스홉킨스대와 연계한 영어마을까지 들어선다고 했다. 분양가는 당시 주변 시세보다 비쌌지만 교통과 교육, 자연환경을 모두 갖춘 ‘명품 단지’라는 점에서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 선택은 이후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5475일, 집으로 가는 먼 길’은 평범한 중산층 가장이 분양 사기에 맞서 15년 동안 싸운 기록이다. 저자는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일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일산 신동아 파밀리에 아파트 분양 계약 이후 그는 입주민 투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피해 사실을 알리던 그는 어느새 입주자협의회 회장이 돼 소송과 집회를 이끌었다.

분양 사기는 계약 후 불과 몇 달 만에 실체가 드러났다. 영어마을 계획은 학원법상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고, 향후 개통된다고 홍보한 덕이IC 역시 이미 2년 전에 사업이 취소된 상태였다. 시행사는 취소 이전에 제작한 지도를 모델하우스에 내걸고 분양을 진행했다. 각종 편의시설과 개발 계획도 상당 부분 축소되거나 사라졌다.

저자는 투쟁 과정에서 한국의 아파트 선분양 구조가 소비자보다 시행사와 시공사, 금융권 중심으로 짜여 있다는 점을 절감했다. 입주민들은 착공도 하지 않은 아파트에 대한 회사 측 설명만 믿고 거액의 계약금을 지불하지만, 이후 허위·과장 광고가 드러나도 책임을 묻거나 계약을 해지하기는 쉽지 않다. 시공사는 모든 문제를 시행사에 넘긴 채 뒷짐을 지고, 시행사는 ‘부득이한 계획 변경’이라고 주장한다. 관청 역시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소비자가 감당해야 하는 위험은 큰 데도 정작 보호 장치는 허술했던 셈이다.

15년에 걸친 긴 싸움은 헛되지 않았다. 입주자협의회 소속 380세대는 숱한 소송 끝에 법원의 중재로 2024년 4월 1000억 원이 넘는 잔금을 지급하지 않은 채 아파트 소유권 등기를 확보했다. 국내 분양 분쟁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입주민의 완승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투쟁 과정을 영웅담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였던 그는 긴 소송이 끝날 즈음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됐고, 투쟁 과정에서 폐암까지 얻었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가 지킨 것은 콘크리트 덩어리 아파트가 아니라 정당한 권리에 대한 자존심이었다”고 말한다.

책은 내 집 마련을 꿈꾸던 평범한 시민이 어느 날 거대한 자본과 제도의 벽에 온몸으로 부딪히는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한 ‘르포르타주’처럼 읽힌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아파트 분양 시스템 자체에 질문을 던진다. 신속한 주택 공급을 이유로 소비자에게 과도한 위험을 떠넘기는 선분양 구조가 과연 정당한가는 것이다. 저자는 정책 전문가처럼 해법을 제시하기보다 소비자의 한 사람으로서 현장에서 직접 겪은 경험을 통해 제도의 허점과 구조적 문제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2만원.

이혜진 선임기자 has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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