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통화정책 수장을 설명하는 다섯 단어

노영우 전문기자(rhoyw@mk.co.kr) 2026. 5. 1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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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송 한은총재 대해부
한은 출신 부친은 말했습니다 "영국 신사보다 한국인 학자가 돼라"
이 청년은 68대 한은 총재가 됐습니다
뉴시스

2026년 한국 경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단연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꼽힌다. 한은 총재라는 직책이 주는 무게감에 신현송이란 개인의 스타성이 더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다. 신 총재는 세계적인 석학이면서도 국제기구와 청와대 근무를 통해 현실감을 갖췄다. 해외 생활을 오래 해 권력과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아 보인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장점들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가족의 고집스러운 노력과 인생에서의 우연, 개인의 역량 등이 맞물려 하나씩 만들어진 것이다. 1959년 대구에서 시작돼 영국과 미국 등 여러 나라를 거쳐 2026년 서울까지 달려온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본다.

"조용하게 책 읽기와 산수를 좋아했던 아이."

신현송 총재의 이종사촌 동생인 김병덕 금융연구원 박사는 그를 이렇게 묘사했다.

신 총재는 1968년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신 총재의 부친 고 신철규 씨가 외환은행 런던 지점으로 발령받아 출국한 날이다. 신 총재를 얘기할 때 부친을 빼놓을 수 없다. 그만큼 신철규 씨는 아들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32년 경북 안동 출생인 신철규 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57년 한국은행에 입행한다. 그의 동기가 이경식 전 한은 총재, 나웅배 전 경제부총리, 김명호 전 한은 총재, 이상근 전 한미은행장 등이다. 그들과 한은 직원 생활을 시작한 신철규 씨는 한은 외환부가 1967년 외환은행 설립으로 이어지자 외환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우리나라의 외환 관리 업무를 강화하기 위해 한은 외환부를 분리해 외환은행을 설립했다. 이때 외환은행으로 옮긴 신철규 씨는 이후 외환은행 런던 지점으로 발령받는다. 이 순간이 아들인 신 총재 인생의 첫 터닝 포인트가 된다.

조기 유학이란 개념도 없던 시절 런던에서의 초등학교 생활은 낯설었다. 동양인 학생도 희소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 총재는 계산을 잘하고 영어도 곧잘 배워 그곳에서도 일찌감치 우등생으로 자리 잡았다. 신 총재의 부친은 처음 3년 정도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복귀한다. 이때 신 총재도 함께 귀국해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중학교를 채 졸업하기도 전에 부친이 런던 지점으로 발령받게 돼 또다시 런던으로 이주해 중학교 이후 학업을 이어갔다. 신 총재가 런던에서 다닌 중고등학교는 '이매뉴얼 스쿨'이라는 명문 사립학교다. 한국에 알려진 이튼이나 웨스트민스터 등 명문 기숙학교만큼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통학하는 학교 중에서는 상당한 명문 학교로 꼽힌다. 2026년 기준 이 학교의 연간 학비는 2만9000파운드(약 5000만원)로 우리나라 학교에 비해 꽤나 비싼 편이다.

"유년 시절에 한국과 런던을 오가면서 영어도 배우고 한국말도 배우면서 두 나라 말을 거의 완벽하게 할 수 있게 됐다. 이런 경험이 훗날 그의 커리어에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해외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김병덕 박사는 경제학 공부에서 영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한국 학생들은 처음에는 수학에 강점을 보여 경제학에 입문하지만 나중에는 영어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가에 따라 학문적 성과가 결정된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신 총재가 어릴 때 영어를 배운 경험은 훗날 그를 세계적인 경제학 석학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1985년 매일경제신문 7월 30일자에 실린 '옥스퍼드大 놀라게 한 韓國의 秀才 申鉉松군' 기사. 위의 가족사진은 1984년에 찍은 것으로 신문에 실렸다. 맨 오른쪽이 당시 26세의 신현송 한은 총재. 매경DB

1977년 12월 그는 영국 옥스퍼드대에 수석 장학생으로 입학한 소식을 국내 언론을 통해 알린다. 1970년대 한국인 학생이 옥스퍼드대에 수석 입학하는 사례는 처음 있는 일이어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영재라고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문이 난 것도 그때부터다. 그가 입학한 옥스퍼드대 모들린대학의 '정치철학경제학(PPE)' 전공은 영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명문학과다. 데이비드 캐머런, 리시 수낵 등 영국 총리는 물론 루퍼트 머독 등 굵직한 기업인들도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와 영국 엘리트의 산실로 통한다.

그의 수석 행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7년 후인 1985년 그는 옥스퍼드대를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광도 안았다. 그가 수석을 할 때도 당연히 한국인 최초라는 타이틀이 따라붙었다. 신 총재는 당시 PPE 전공 졸업생 300여 명 중 3명에게만 부여하는 최우수(Congratulatory first·최고등급보다 더 높은 영예) 가운데 1명으로 뽑혔다.

해외에서 유학하는 한국 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군대다. 군 복무를 하자니 학업이 중단되고 그렇다고 마냥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부는 이런 문제 때문에 고민하다가 한국 국적을 포기하거나 상실하기도 한다. 신 총재는 현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 허가를 받은 후 한국으로 귀국해 군 생활을 했다. 당시 옥스퍼드대 학장은 "옥스퍼드대에 합격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것은 당신이 처음"이라면서도 입학 유예를 허가해줬다고 한다.

한국에 입국해 신 총재는 고려대에 편입해 학업을 이어갔다. 지금도 고려대 출신 학자나 관료를 만나면 '나도 고대맨'이라며 친근감을 표시한다고 한다. 그는 한미연합사에서 군 복무를 마친 후 다시 옥스퍼드대로 돌아가 학업을 이어갔다.

신 총재는 옥스퍼드대에 복귀해 학업을 이어가면서 수석 졸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군대를 다녀왔기에 한국 국적을 유지할 수 있었고, 훗날 별다른 잡음 없이 청와대 국제경제보좌관직을 수행할 수 있었고, 한은 총재로도 임명될 수 있었다. 신 총재가 이처럼 영재로 성장한 데에는 아버지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신철규 씨는 1985년 매일경제와 인터뷰하면서 "1953년 고려대 상대를 졸업했지만 나는 공부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한국전쟁 영향으로 대학 교육이 마비된 데 따른 것이다.

신철규 씨는 "공부에 대한 소양을 갖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아들의 환경이 다른 사람보다 좋았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들을 '영국 신사'가 아닌 '한국인 학자'로 키우고 싶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신 총재는 1998년 경제학 톱저널인 아메리칸이코노믹리뷰(AER)에 각국의 외환위기가 발생하는 과정을 설명한 논문을 실으며 경제학계의 스타로 발돋움한다. 이후에도 잇달아 글로벌 금융시스템과 신흥국 위기를 설명하는 논문을 내놓으며 대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몇 가지 탁월한 업적이 있다. 먼저 글로벌 자본 이동이라는 거시적 현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게임 이론이라는 미시적 방법론을 적용해 논리와 엄밀함을 키웠다. 또 그는 경제 기초체력의 악화가 어떻게 투기자본의 공격을 가져오고 이것이 외환위기로 이어지는지 그 과정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신 총재는 신흥국이 외환위기를 막기 위해선 모든 정보를 공개해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오히려 불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중앙은행이 자본 이동을 어느 정도 통제해 통화위기를 막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했다. 아울러 위기 징후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는 '조기경보 시스템'의 구축을 역설했다.

신 총재는 2010년 청와대 국제경제보좌관으로 임명된 후 '거시건전성 규제 3종 세트'를 내놨다. 당시 그는 정부가 외국은행 선물환 매입 한도를 정하고 단기 차입에 부담금을 물리며 외국인 채권 투자에 과세를 부과해 글로벌 금융위기 전후 불안했던 우리나라 외환시장을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서울 중구 한화금융플라자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는 모습. 연합뉴스

신 총재의 성장 과정과 학문적 업적을 보면 향후 그가 이끌 통화정책 방향과 과제가 보인다. 그는 먼저 세계적인 석학이라는 학문적 카리스마로 한은을 장악할 것으로 보인다. 또 성장을 뒷받침하기보다 우리나라 금융과 외환시장 안정에 가장 큰 방점을 둘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종전 인도중앙은행 총재를 지냈던 세계적 경제학자인 라구람 라잔에 비유되기도 한다. 한국은 현재 과잉 유동성으로 시장 불안이 야기될 가능성이 높아 유동성을 흡수하는 정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금리 인상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거시 정책을 통해 유동성을 흡수할 경우 거품이 걷히는 효과도 있지만 정작 돈이 필요한 곳에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 현재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은 돈줄이 말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치적인 문제도 그가 뚫어야 할 과제다. 신 총재는 소위 말하는 'TK(대구·경북)' 집안이다. 또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MB맨'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현 정부와 다소 결이 안 맞는 부분이다.

통화정책은 정치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거가 다가오면 돈을 풀어 경기를 띄우려는 정치권의 압력이 커진다. 정치적 기반이 없는 그가 실세 정치권과 이런 문제로 부딪힐 경우 통화정책은 꼬일 수밖에 없다. 그와 비교되는 라잔 전 총재는 나렌드라 모디 정부와의 갈등으로 총재직 연임을 하지 못하고 사실상 중도 하차하기도 했다. 신 총재가 라잔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 시장은 주목하고 있다. 시장은 5월28일 그가 주재하는 첫 금융통화위원회를 주목하고 있다.

신현송 한은 총재는

1959년 8월 9일 대구 출생 1978년 영국 이매뉴얼고등학교 졸업 1985년 옥스퍼드대 정치철학경제학 학사 1988년 옥스퍼드대 경제학 석·박사 1996~2000년 옥스퍼드대 경제학과 교수 2000~2005년 영국 런던정치경제대 금융학과 교수 영국 중앙은행 자문역 국제통화기금(IMF) 상주연구자 (2005년 4~9월) 2006~2016년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교수 2006~2013년 미국 뉴욕연방준비은행 금융자문위원 2010년 1~11월 청와대 국제경제보좌관 2014~2024년 BIS 경제보좌관 겸 조사국장 2025년~2026년 3월 BIS 경제보좌관 겸 통화경제국장 2026년 5월~ 한국은행 총재

'신현송 한은총재 대해부' 시리즈는 신 총재의 어린 시절 성장 과정부터 학문적 성과, 향후 통화정책 방향까지 면밀히 살펴봅니다. 프리미엄 유료 멤버십 플랫폼 '매경플러스'에서 전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경플러스(mk.co.kr/plus)를 주소창에 입력하거나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으시면 사이트에 접속됩니다.

[노영우 디지털혁신센터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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