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 브랜드의 운명을 바꾼 천재 디자이너들 [이윤정의 인사이드&비하인드]

이윤정 2026. 5. 1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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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와 디자이너, 현명한 상생
젊은 시절의 디자이너 발렌티노 가라바니. 그의 시그니처인 레드 컬러를 볼 수 있다. / 사진제공. 발렌티노

최근 빅 브랜드의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많이 바뀌었다. 바뀌는 이유는 다양하다. 한 디자이너가 장기 집권하여 컬렉션에 정체기가 왔거나 이로 인해 매출이 부진한 경우, 브랜드 자체의 컨셉에 변화를 주고 싶을 때 등이 주 요인이다. 샤넬의 마티유 블라지, 디올의 조나단 앤더슨, 구찌의 뎀나 바잘리아, 발렌티노의 알레산드로 미켈레, 발렌시아가의 피엘파올로 피촐리, 펜디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등 자리를 옮긴 디자이너들의 첫 쇼를 보기 위해 2026 봄·여름과 가을·겨울 컬렉션이 그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았다. 그만큼 브랜드에게 디자이너는 설명이 필요 없는 주인공이자 자산이다.

디자이너의 이름이 곧 브랜드였던 시기도 있었다. 샤넬, 크리스챤 디올, 지방시, 입생로랑, 겐조, 발렌티노, 돌체앤가바나, 조르지오 아르마니, 비비안 웨스트우드, 헬무트 랭, 랄프 로렌, 도나 카란, 캘빈 클라인 등. 여전히 디자이너가 브랜드인 곳도 있고, 시대의 흐름을 타고 새로운 디자이너와 협업하며 브랜드를 이끄는 곳도 많다.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동일한 곳의 장점은 컨셉과 아이덴티티의 일관성이다. 창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똑같다’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적어도 ‘소비자가 변심할 정도의 변화는 없었다’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코코샤넬. 패션 디자이너이자 샤넬의 설립자 / 사진출처. unsplash


필자는 2025년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타계했을 때 진심으로 브랜드를 걱정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흐르는 듯한 실루엣과 세련된 무채색을 사용한 컬렉션으로 1980~2000년대 초반 패션계를 평정한 바 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그의 컬렉션은 화장품과 향수, 가구, 레스토랑까지 확장되어 일명 ‘아르마니 스타일’을 확립했다. 그의 글로벌 인기 덕에 패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르마니 스타일이 무엇인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는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일관되고 확실한 정체성이 없다면 얻기 어려운 결과물이다. 그의 타계 이후 브랜드의 행방에 관심이 쏠린 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절대적인 기여도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역사가 오래될수록 한 명의 디자이너가 브랜드를 지속적으로 이끌기가 어렵다. 정체성은 유지하되 적절하게 시대의 흐름을 가미하는 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브랜드는 새로운 디자이너의 영입으로 돌파구를 찾곤 한다.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이러한 노력이 극강의 시너지를 발휘한 경우도 적지 않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구찌를 이끈 톰 포드는 이탈리아의 장인 정신에 섹시함을 더하여 구찌를 초고속 성장시켰다. 1994년에 약 2억 달러였던 구찌의 매출은 2000년대 초 30억 달러에 육박했다. 톰 포드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클래식에서 섹슈얼리티, 글래머, 파워 등으로 재정의했다. 비슷한 시기에 디올과 존 갈리아노의 협업도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다. 우아한 디올을 과감하고 아방가르드한 스타일로 변화시켰고, 그가 소개한 ‘새들백’은 상업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며 아직도 아이코닉한 액세서리로 회자되고 있다. 스타성이 풍부한 디자이너가 브랜드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어넣은 대표적인 예이다.

디올 Saddle 스트랩백 / 사진출처. © CHRISTIAN DIOR


샤넬과 칼 라거펠트 조합도 빼놓을 수 없다. 1983년부터 2019년까지 이어진 작업은 샤넬을 글로벌 톱 브랜드로 올려놓는데 일조했다. 특이한 것은 칼 라거펠트가 오랜 시간 디자인을 했지만, 소비자들은 언제나 그의 이름 보다는 ‘샤넬’을 먼저 떠올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칼 라거펠트의 영민함이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그는 코코 샤넬 여사의 유산에서 차용한 스토리와 별, 동백꽃, 트위드 등의 아이템을 시대에 맞게 컬렉션에 녹여냄으로써 창의성을 발휘하고, 브랜드의 헤리티지를 상기시키는 역할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브랜드의 DNA를 적재적소에 활용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펜디의 여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50년 넘게 활약했다. 이쯤 되면 칼 라거펠트의 역량은 거의 무한대로 느껴질 정도이다.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디자이너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루이비통과 마크 제이콥스가 손을 잡은 것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루이비통은 1990년대 중반부터 트렁크와 여행 가방 브랜드에서 패션 브랜드로 거듭나고 싶은 열정을 내비치고 있었고, 마침내 첫 컬렉션을 마크 제이콥스와 함께 선보였다. 워낙 막강한 레더 액세서리 브랜드였던 만큼 루이비통의 패션 진출에 관하여 의구심을 품던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루이비통을 패션 브랜드로 안착시켰다.

그는 의상뿐 아니라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제품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제안했다. 스티븐 스프라우스, 무라카미 다카시, 쿠사마 야요이와의 협업은 럭셔리 브랜드와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격상시킨 사건이었다. 마크 제이콥스처럼 브랜드의 정체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제안한 디자이너로 에디 슬리먼과 피비 필로를 빼놓을 수 없다. 에디 슬리먼은 브랜드 이름인 ‘입생로랑’을 ‘생로랑’으로 바꾸는 파격을 시도하고 컬렉션에 슬림함과 록 시크를 첨가했다. 요즘 대세인 ‘조용한 럭셔리’의 시초 격인 셀린과 피비 필로의 시너지도 패션계를 뒤흔든 긍정적인 조합이었다. 이들은 혁신적인 제안으로 브랜드에 변화를 주도하면서도 브랜드의 근간을 존중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당연한 흐름이지만 의기투합했다고 매 순간 결과가 좋을 수는 없다. 브랜드와 디자이너는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고 환희와 실망을 공유한다. 구찌와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이별, 버버리와 리카르도 티시의 결별은 브랜드와 고객 모두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맥시멀리즘은 구찌와의 관계에서 분명한 장점이었다. 미켈레만이 가능한 컬러와 스타일의 조합은 감히 흉내 낼 수 없었다.

구찌의 성공과 부침을 함께 경험한 이후 발렌티노에 합류한 미켈레와 그의 후임으로 구찌에 합류한 뎀나 바잘리아의 행보를 주시하는 것도 두 브랜드와 탁월한 디자이너를 향한 사람들의 지속적인 애정과 기대 때문이다. 미켈레는 최근 선보인 발렌티노 2026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브랜드의 아카이브인 드레이핑, 엠브로이더리와 시퀸 장식 등에서 영감을 받은 옷을 소개하며 브랜드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했다.

발렌티노 2026 가을/겨울 컬렉션.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질서와 혼란, 안정성과 불안정성 등의 서로 상반되는 개념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간섭을 모노톤과 비비드한 컬러, 메종의 아카이브에서 영감을 받은 엠브로이더리 장식과 드레이핑 등의 조합을 통해 표현했다. / 사진제공. 발렌티노


수많은 브랜드의 상승과 하강을 바라보며 필자는 패션 브랜드에게 정체성과 디자이너 사이의 우선순위를 논하는 것은 시기와 상황마다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체되지 않고 다양한 것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 움직이는 패션의 특성 탓이기도 하다. 브랜드 자체에 더 힘을 실어주어야 할 때도 있고, 스타 디자이너가 브랜드를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오래도록 성공적으로 유지하는 브랜드에게는 공통점이 있으니, 갖가지 상황 속에서도 브랜드의 DNA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버버리가 몇 년 전 리카르도 티시를 통해 고유의 헤리티지를 약화시키는 정책을 펼치다가 다시 헤리티지를 강조하는 전략으로 바꾼 것에서도 알 수 있다. DNA는 흔히 브랜드의 뿌리라고 불린다. 뿌리가 단단히 지탱하지 못하면 걸출한 디자이너도 고유의 매력을 꽃피우기 어렵다. 그렇기에 정체성과 창의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 하는 디자이너가 이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브랜드와 디자이너의 균형의 추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소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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