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쇄살인범 ‘누명’ 피해자 유족, 국가 상대 소송서 일부 승소

김은경 기자 2026. 5. 15.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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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국가가 자녀들에게 7700만원 지급하라”
고(故) 홍성록씨가 '화성 연쇄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수사를 받던 당시 경찰에 자백한 내용을 보도한 신문 기사. /박준영 변호사 제공

‘화성 연쇄살인 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의 가혹한 수사를 받고 언론에 신상이 공개됐던 고(故) 홍성록씨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위자료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906단독 안동철 부장판사는 15일 홍씨의 두 자녀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 3857만1428원과 이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라”며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가기관이 오히려 국민의 기본권을 중대하게 침해했다”며 “피의사실 공표와 신상 공개, 석방 뒤 감시·통제로 인해 홍씨와 가족들이 장기간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재판부는 홍씨 자녀들이 청구한 위자료 총 4억7000만여 원 가운데 16%만 인정했다.

◇6일간 19시간만 재우고 조사...언론에 신상 공개

이번 소송은 1987년 화성 연쇄살인 사건 중 세 건(3·5·6차)의 용의자로 지목됐던 홍씨의 자녀들이 “아버지와 가족 전체가 30년간 ‘연쇄살인범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서 살아야 했다”며 2023년 제기한 위자료 소송이다.

유족 측이 법원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홍씨는 1987년 5월 경찰에 영장도 없이 끌려가 6일 넘게 외부와 차단된 채 파출소와 여관 등에 갇혀 조사를 받았다. 홍씨는 이 기간 총 19시간밖에 자지 못했고, 서류철 등으로 폭행을 당한 끝에 세 사건에 대해 8차례 허위 자백을 했다. 유족 측은 경찰이 정신과 전문의 진단이 없었는데도 홍씨가 ‘변태 성욕을 가진 정신병자’라는 소견이 담긴 허위 수사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주장했다.

또 경찰은 당시 홍씨의 이름과 얼굴, 직장과 가족 관계를 언론에 공개했다. 홍씨의 일부 자백이 나올 때마다 보도됐다. 그러나 검찰이 홍씨의 자백에 일관성·객관성이 부족하고 직접적인 물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영장 청구를 반려했고, 피해 현장 흙과 홍씨 구두에서 채취한 흙이 불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오며 풀려났다. 경찰은 석방 직전에도 홍씨를 앉히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유족 측은 석방 후에도 오랜 기간 가족 전체가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1991년 10월부터 1993년 9월까지 작성된 수사 보고서에는 홍씨의 출퇴근길을 미행한 기록과 여경에게 빨간 옷을 입혀 주변을 배회하게 한 함정 수사 기록, 직장 동료와 이웃 주민들을 통한 동향 파악 내용이 담겼다. 경찰은 자녀들의 학업·취업 현황을 추적하기도 했다. 홍씨는 석방 이후에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200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5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이춘재 살인누명 국가배상소송 1심 선고가 끝난 후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던 고 홍성록 씨의 자녀 측 변호인인 박준영 변호사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국가 “구금은 7일뿐” vs 유족 “30년의 사회적 구금”

국가 측은 재판에서 비슷한 사건 판결 4건을 인용하면서 “(홍씨는) 구금 기간이 6~7일에 그쳐 피해가 상대적으로 작다”고 주장했다. 유족이 청구한 위자료는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족 측은 “7일간의 불법 구금만이 아니라 국가가 만든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30여 년간 사회적 구금을 당했다”며 단순히 구금 기간에 비례해 위자료를 산정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우선 국가의 불법수사로 인한 고 홍성록씨 본인의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를 1억원으로 산정했다. 두 자녀에게는 ‘연쇄살인 용의자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서 겪은 고유한 정신적 피해에 대해 각 1000만원씩의 위자료를 별도로 인정했고, 홍씨 위자료의 상속분 2857만여 원씩을 더한 것이다. 이날 선고 직후 유족 측 박준영 변호사는 “이 사건의 피해는 일주일의 불법 구금에 그치지 않는다”며 항소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장기 미제로 남아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경찰이 2019년 증거물 재분석으로 진범 이춘재를 특정하고, 다른 살인 범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복역 중이던 이춘재가 자백하면서 밝혀졌다. 이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2022년 홍씨 사건을 “수사 기관의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인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판단하고 국가에 피해 회복 조치를 권고했다.

한편, 이른바 ‘화성 8차 사건’ 범인으로 기소돼 억울하게 20년간 옥살이를 했던 윤성여씨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2022년 11월 1심 재판부는 18억여 원을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홍씨처럼 화성연쇄살인 ‘유력 용의자’로 공개적으로 지목돼 언론에 실명과 사진 등이 보도됐던 고 윤동일씨의 유족이 제기한 국가배상 소송은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이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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