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이 없는 시대의 스승[이주영의 연뮤덕질기](72)

요즘 서울 대학로에서 배우 신구씨(90)와 박근형씨(86)를 목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구는 연극 <불란서 금고>에서 노련한 금고털이로 분해 관객을 만나고, 박근형은 신구와 함께 청년 연극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연극 내일 기금’의 결실을 독려하느라 분주하다.
기금으로 운영 중인 ‘연극 내일 프로젝트’는 1000명이 넘는 지원자 중 30명의 청년 배우를 선발해 석 달간의 훈련 끝에 3편의 창작극 <탠덤: Tandem>, <여왕의 탄생>, <피르다우스>를 무대에 올렸다. 두 배우의 행보는 최근 주목받는 <나빌레라>, <운베난트>, <마음>, <모어 라이프> 등의 ‘고뇌하는 시대의 멘토’라는 궤적과 맞닿아 있다. 무대 안팎에서 그들의 노익장이 예술적 실천으로 완성되고 있는 셈이다.
뮤지컬 <나빌레라>(HUN·지민 원작, 박해림 극작·작사, 김효은 작곡, 이지나 연출, 김성수 편곡·음악감독, 유회웅 안무, 박동우 무대, 민경수 조명, 송승규 영상, 김기영 음향)는 76세 덕출(최인형 분)의 평생 꿈이던 ‘발레리노 선언’으로 시작된다. 70대 후반에 발레를 배우고 공연을 하겠다는 그의 꿈은 가난과 부상으로 꿈을 버린 천재 발레리노 채록(이재환·재윤 분)과 만나면서 구체화한다.
가족의 반대와 무관심 속에 둘은 영혼의 단짝처럼 서로를 가르친다. 채록은 덕출에게 몸의 기술을 알려주지만 동시에 덕출에게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배운다. 반대로 덕출은 채록을 통해 잊고 있던 욕망과 설렘을 회복한다.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지지자
연극 <운베난트: Y를 향한 마지막 수기>(슈테판 츠바이크 원작, 황정은 각색, 김은 연출, 공한식 작곡, 송지인 무대, 이현규 조명)도 사제 간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Y교수(홍우진·이강우·김보정 분)의 롱테이크 강연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다. 윌리엄 세익스피어와 크리스토퍼 말로 등 영국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와 탈경계를 무대화한 창작자들에 대한 헌사가 명징한 발성과 움직임을 통해 극장 전체를 뒤덮는다.
탐구하고 공감하는 지성의 전당에 빠져든 관객에게 책장과 테이블, 커튼뿐인 단출한 무대는 강의실을 넘어 기억 속의 명강연장으로 확장된다. 제자 롤란트(김바다·최재웅·이정화 분)와 Y의 관계는 존경으로 끝나지 않는다. 선망과 동경, 질투와 집착, 이해받고 싶은 욕망과 이해할 수 없다는 좌절이 뒤섞인다. Y는 세상과 가족, 아내와의 소통에는 실패하면서도 롤란트와의 정신적 교류 속에서만 살아 있음을 느낀다. 결국 롤란트는 지식을 배우는 동시에 스승의 결핍까지 흡수한다.
연극 <마음>(나쓰메 소세키 원작, 양지모 각색·연출, 김성태 조연출, 박성찬 무대, 홍문화·신예정 조명, 하누리 음악·음향)도 선생에게 매혹된 학생의 이야기다. <운베난트>가 열정의 극치를 관통한 회색빛 재라면 <마음>은 더 섬세하다.
소품 몇개와 조명, 음향만으로 메이지 시대 일본의 근대적 풍경을 불러낸다. ‘나’(이승기·이지명 분)는 선생님(서현우·이도영 분)에게 계속 끌린다. 과거의 선생은 스즈(고다희·라선영 분)와 K(도원·장원혁 분) 사이에서 개인주의와 옹졸함을 변주하며 죄의식을 쌓아왔고, 나는 그들의 관계를 탐구한다.

결국 선생은 유서를 통해 비극의 실체를 털어놓았으나 나는 이를 돌이키기 위해 다시 그들의 과거로 선회한다. <운베난트>의 Y도, <마음>의 선생도, 결국 자기 안의 죄의식과 고독으로 무너진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제자들은 더 깊이 매혹된다. 그들은 정답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복잡성과 모순 자체에 끌렸을지 모른다.
연극 <모어 라이프>(로런 무니·제임스 예이트먼 작, 김수아 번역, 민새롬 연출, 김종석 무대, 이현규 조명, 이수경 영상, 도연 의상, 박승원 음악감독, 권지휘 음향)는 이 질문을 50년 후 미래로 전가한다. 망자의 뇌를 스캔해 보관해 두었다가 먹지 않고 자지 않아도 존재하는 안드로이드를 개발해 이식하는 시대 속 브리짓(이진경 분)이 되살아났다.
본인이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당시 보호자였던 남편 해리(이윤재 분)가 동의해서 벌어진 일이다. 해리는 이미 늙었고 세상은 달라졌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다. 작품은 전원을 온오프 하며 계속 다른 존재의 기억을 갈아 끼우는 안드로이드의 육체성을 재현한다.
기억이 바뀌면 목소리부터 바뀐다. 기억을 갈아 끼운 안드로이드가 말할 때마다 다른 배우들이 번갈아 가며 더빙하는 장면은 기묘하다. 미래사회 생명 연장 실험실에 대한 상상력이다. 기억이 같으면 같은 인간인가? 죽음을 제거한 삶은 정말 삶인가? 결국 브리짓은 주변인들이 모두 죽은 후에도 살아남으며 이 질문에 대해 통찰한다. 어쩌면 브리짓에게 스승은 특정 인물이 아닌 시간 그 자체다.

누군가를 보며 살아가는 법 배워
신구와 박근형에 의해 세상에 태어난 창작연극 ‘연극내일 프로젝트’의 세 작품은 연대와 배려, 시대적 균열에 대해 묻는다. <탠덤>(김남언 연출, 강훈구 작·협력연출)은 폭주족 문화와 이주 난민 서사를 결합한 신체극이다.
한국 청소년과 난민 청소년이 몸의 힘을 빼고 서로에게 체중을 맡겨야 가능한 오토바이 탠덤에 몰입하는 장면은 생존을 위한 신뢰이자 살아내겠다는 의지다. <여왕의 탄생>(이민구 작·연출, 오세혁 협력연출)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지만, 민주화 재현극으로 흐르지 않는다. 88서울올림픽 공식 납품 시계 공장과 사이비 종교, 권력형 비리, 여공들의 삶이 비정형의 장면들로 충돌하며 1980년대 후반 한국사회의 균열을 드러낸다.
<피르다우스>(류사라 작·연출, 김정 협력연출)는 세 작품 중 가장 희망적인 미래를 그린다. 보호 시스템이 종료된 지구에 10명의 아이가 방출된다. 아이들은 서로를 지배하지 않고 차이를 인정하고 연대하며 살아간다. 이 세 작품을 관람할 때마다 객석에는 박근형 배우가 있었다.
그에게 소감을 물으니 “짧은 시간에 다들 대단하다. 신체 움직임이 놀라운 수준이다. 작품이 모두 표현주의적이라 전통극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창작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이들 중 오디션으로 선발한 5명이 전통극인 <베니스의 상인> 앙상블로 참여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배우 신구와 박근형은 지난 5월 12일 대학로 NOL 서경스퀘어 1관에서 열린 연극 <베니스의 상인>(7월 8일 해오름극장 개막) 기자간담회에서 “대학로에 와보니 배우들이 예술가보다는 생활인에 가깝다. 무대는 배우 예술이므로 예술가가 나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청년 연극인들에 대한 응원을 전했다.
이들 작품에서 스승은 권위적인 존재가 아니다. 서로의 시간을 끝까지 존중해주는 지지자다. 정답이 없는 시대다. 누군가 완벽한 답을 가르쳐줄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누군가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기자간담회에서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솔직히 말하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현장을 누비는 노배우들에게 젊은 배우들이 몸을 기울여 질문을 전달하던 그 장면의 여운이 길다. <마음>·<모어 라이프>는 끝났고, <운베난트>는 6월 7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 <나빌레라>는 서울 공연 후 밀양·대구 투어를 이어간다.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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