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큼 오래된 나무가 들려주는 ‘한여름 밤의 꿈’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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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는 영원처럼 아득하면서도 거짓말처럼 무상하다.
"세상만큼이나 오래되고, 옹이와 갈라진 틈으로 가득"한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실바람보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사는 척하다가, 모두 잠든 밤이면 공중제비를 도는 나무늘보의 하루는 만화 속 이야기 같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곤충과 물고기, 양서류와 파충류, 포유류와 조류는 모두 이 세상만큼 거대하고 오래된 나무를 둘러싼 생태계의 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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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는 영원처럼 아득하면서도 거짓말처럼 무상하다. “세상만큼이나 오래되고, 옹이와 갈라진 틈으로 가득”한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나무늘보와 강꼬치고기, 달나방 애벌레, 십자거미, 곰개미, 얼룩무늬 다람쥐, 제비, 불곰, 두꺼비와 오리너구리, 초록 진딧물, 금눈쇠 올빼미, 정원 달팽이, 공벌레 각자의 생멸을 다루는 이야기라면 더욱이….
네덜란드에서 온 이 환상적인 이야기책을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그 나라에서는 ‘2025년 최고의 어린이 철학책’으로 꼽혔다고 한다. 충분치 않다. 세상만큼 거대한 나무의 시선과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우주 물고기의 존재는 신화의 그것 같다. 실바람보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사는 척하다가, 모두 잠든 밤이면 공중제비를 도는 나무늘보의 하루는 만화 속 이야기 같다. 나뭇잎을 허겁지겁 뜯어 먹는 동생들을 ‘먹음직스럽게’ 바라보던 초록 진딧물이 자고 일어나니 통통한 막냇동생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공포나 스릴러물 같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데 각자의 특별함을 주장하며 “특별한 두꺼비랑 특별한 오리너구리”가 되기로 결의한 두 동물 앞에 총천연색 카멜레온이 등장하는 장면에선 웃음이 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곤충과 물고기, 양서류와 파충류, 포유류와 조류는 모두 이 세상만큼 거대하고 오래된 나무를 둘러싼 생태계의 일원이다. 2022년 네덜란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 주어지는 ‘황금연필상’을 받았다는 작가는 고작 2~3쪽 분량에 각 존재의 매혹적인 서사를 담아낸다. 우화의 겉옷을 입은 이야기는 때로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데, 유머 가득한 이 동화는 어린이와 어른 모두에게 영감을 준다. 책에 등장하는 모든 생명은 종을 대표하는 동시에, 존재의 개별성을 잃지 않는다.

특히 인상적인 이야기는 달나방 애벌레의 일생이다. 친구들이 세번이나 허물을 벗는 사이 주인공 애벌레는 성장을 거부한다. “난 더는 안 할 거야.” 다른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더 많이 먹고, 더 멀리 날고, 더 아름다워지고 싶어 할 때 그는 선언한다.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아.” 그리고 조용히 늙어간다.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채 나방 친구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늙어가는 ‘애벌레’라니, 이 책의 세계관에선 이런 전복적 상상조차 자연스럽다. 밀도 있는 번역 또한 신비롭고 몽환적인 작품의 색깔을 조금도 해치지 않고 지켜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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