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를 파괴한 심리 스릴러… 몬테카를로 발레단 '백조의 호수'
프로이트적 무의식과 영화적 미장센의 결합
발레 테크닉 넘어 '동물적 신체 언어'로 쓴 잔혹 미학
클래식 발레 레퍼토리 '백조의 호수'가 가진 압도적 위상은 안무가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Jean-Christophe Maillot)에게 오히려 이를 파괴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 듯하다.
2011년 모나코에서 초연된 그의 각색작 제목에 붙은 'LAC'는 프랑스어로 호수를 뜻하지만, 그 이면에는 정신분석학적 의미의 '결핍(Lack)'을 교묘히 숨겨뒀다. 지난 13일 한국 초연으로 상륙한 이 작품은 상실과 욕망, 그리고 인간의 정신 속에서 세상의 다채로운 색들이 어떻게 흑백으로 박제되어 가는지를 서늘하게 증명해 냈다.

깃털을 뽑아낸 자리에 돋아난 '야생 손톱'
마이요의 '백조의 호수'는 순백의 백조 대신 유약하고 결핍된 왕자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는 트라우마를 짊어진 인물이다. 어린 시절 첫사랑이 어둠의 세력에 납치된 사실이 그의 무의식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프로이트적 무의식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서사는 장 콕토 감독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초현실적 미장센과 만나 고전의 고정관념을 산산이 깨부순다. 무대 위 거대한 장막과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는 관객을 우아한 궁정이 아닌 잔혹 동화의 한복판으로 몰아넣는다.
가장 먼저 관객의 시각을 배반하는 것은 무용수들의 파격적인 신체 언어다. 마이요는 무용수들에게서 전형적인 백조의 '날갯짓'을 박탈했다. 부드러운 깃털 장식 대신 무용수들의 손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형상화됐다. 팔을 우아하게 젓는 대신, 무용수들은 어깨 근육을 들썩이며 공기를 혓바닥으로 핥는 듯한 기괴하고 동물적인 움직임을 선보인다.
이는 영화적 연출인 동시에, 고전 발레의 정제된 아름다움을 야생의 생명력으로 치환한 파격이다. 무용수들의 등 근육은 날개 대신 근육의 꿈틀거림으로 감정을 토해내며, 관객은 아름다움이 아닌 생존의 본능을 마주하게 된다.

폐쇄 공포와 심리적 감옥을 형상화한 안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시각적 긴장감은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에서 보이는 폐쇄적 공포와 맞닿아 있다. 왕자가 처한 상황은 화려한 왕실 생활이 아니라 밤의 여왕의 감시 아래 놓인 심리적 감옥에 비견될만하다. 마이요는 원작의 악마 로트바르트를 강력한 여성 캐릭터인 '밤의 여왕'으로 재구성했다. 밤의 여왕은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무대를 지배하며 왕가를 혼란에 빠뜨린다. 차갑고 어두운 조명 아래 인물들이 유지하는 날카로운 각도의 구도는 인물의 내면적 붕괴를 시각화한다.
안무의 밀도 또한 숨 가쁘다. 마이요는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빠른 템포의 스텝과 급격한 방향 전환을 통해 인물 간의 신경전을 묘사한다. 특히 왕자의 두 눈을 찌르는 흑조의 과격한 마임과 무대 위에 털썩 주저앉아 괴로워하는 왕자의 모습은 관객의 신경계를 직접적으로 타격한다. 발레 특유의 공중 도약(Grand Jete)조차 이 작품에서는 자유로운 비상이 아니라 땅으로 곤두박질 치기 전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이는 발레를 눈으로 보는 즐거움을 넘어 뇌와 신경을 자극하는 심리 스릴러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관객은 일종의 심리 공포증을 공유하며 극 중 왕자가 느끼는 압박감을 피부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치정 드라마로 변주된 권력의 2인무
이 작품을 '영화같다'고 느끼는 또 하나의 이유는 마이요는 밤의 여왕을 통해 왕족의 은밀한 치정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밤의 여왕이 사실은 왕과 부적절한 관계이며,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존재가 바로 흑조라는 설정은 고전 발레의 권선징악 구조를 완전히 해체한다.
완전한 선도, 악도 없는 무질서의 공간이 궁전이며 이곳에서 왕과 밤의 여왕, 왕자와 흑조의 파드되(2인무)가 한 무대에서 펼쳐진다. 이를 지켜보는 왕비의 처절한 고통은 또 한번 관객을 전율시킨다.
고전 발레의 파드되가 두 무용수의 기술적 조화를 뽐내는 시간이라면, 마이요의 '백조의 호수' 속 파드되는 서로를 갈구하면서도 밀어내는 성적 긴장감과 권력욕의 각축장이다. 흑조가 왕자의 신체를 휘감고 올라타는 도발적인 포즈와 서로의 목을 죄는 듯한 팔의 곡선은 왕실과 어둠의 세계가 결코 뗄 수 없는 공생 관계임을 은유한다.
특히 네 명의 주역이 엉키고 설키는 대형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움직이며 신분과 혈통 뒤에 숨겨진 추악한 욕망을 드러낸다. 무용수들의 거친 숨소리와 바닥을 치는 발소리는 클래식 선율에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다.

붕괴하는 무의식, 잔혹한 수작의 완성
유약한 왕자는 자신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행복하면서도 불안했던 유년 시절의 첫사랑에 대한 기억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왕자가 백조를 만나도 밤의 여왕과 그녀의 수하들인 '키메라'들에 의해 그가 끊임없이 내동댕이쳐진다. 이 상황을 지켜보게 되는 관객이 감당해야 할 정서적 무게는 덩달아 상당해진다. 관객은 극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백조와 흑조는 선악 구도가 아니고 왕자가 가진 거세 공포와 애정 결핍이 투영된 환상 통제 장치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마이요는 무용수의 몸을 하나의 필름 프레임처럼 활용해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의 무의식을 파고들었다. 무대 배경의 미니멀한 전환은 왕자의 의식 흐름을 따라 분절되며, 앙상블들의 군무는 거대한 파도처럼 왕자의 모습과 자아를 집어삼킨다. 결말에 이르러 왕자가 마주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회복 불가능한 정신적 파국이다.
마이요의 '백조의 호수(LAC)'는 무대 예술을 통해 인간 심연의 결핍을 똑바로 보게 만드는 잔혹한 수작이다. 가슴 속 묻어둔 근원적 공포를 건드리는 마이요의 발레는 이 장르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현대적인 정점이라 할 수 있다. 공연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16,17일, 대전 예술의전당에서 20일 이어진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역대급 불장에서 혼자 폭락"…한전 담은 개미들 '눈물' [종목+]
- "너무 비싸" 대통령 나서더니…'100원 전쟁' 다이소도 참전 [프라이스&]
- "퇴근하고 야장 가실래요?"…직장 동료 한마디에 '대박' [트렌드+]
- "소주는 아재들 마시는 술?"…MZ 여성들 홀린 깜짝 비결
- "부산 모텔 가격 실화냐"…'1박에 32만원'까지 치솟은 까닭 [트래블톡]
- "또 일본 갈 줄 알았는데"…5월 황금연휴 1위 여행지 어디?
- CIS, 첨단 정밀 장비로 日 배터리 업체도 홀렸다
- "한국에 최우선 공급하겠다"…중동 6개국 '깜짝 선언'
- "호텔서 커피 마셨더니…" 조회수 '300만' 대박 영상의 비밀 [현장+]
- "32만전자 간다"…삼성전자, 역대급 잭팟 예고에 주가 '들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