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에세이 ] 떠나는 날에야 우러른 쿰빌라 ‘쿰부의 하늘 샘’

배두일 전문기자 2026. 5. 1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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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에 온통 녹색 지붕,

히말라야 ‘초록 마을’의 비밀
계곡이 없는 고산 마을의 뒷산이나 앞산에서 눈이 사라짐은 생명수의 젖줄이 마를지 모르는 비상사태이리라.

[<사람과 산>  배두일 객원기자]     길 떠나기 좋은 날이다. 햇살은 쨍쨍 눈부시고, 코끝의 공기는 상큼하고, 까옥거리는 까마귀 울음이 귓가에 낭랑하다. 잠꾸러기인 줄만 알았던 흑과 백의 얼룩 강아지도 좀이 쑤시는지 고샅길 어귀를 괜스레 어슬렁댄다.

좁직한 계단 길이 사뭇 되알져 허리 펴고 고개를 돌리자, 육중한 꽝데 연봉(Kongde Ri·6,187m)이 남체 바자르의 상공 위로 히말라야 툴쿤의 허연 몸통을 일떠세워 끔벅끔벅 작별의 눈짓을 한다. 어제 늦도록 자욱했던 눈안개가 말끔히 걷혀 마을을 나서는 오늘에야 남체의 온전한 모습이 발아래로 한 눈에 펼쳐진다.

움펑하게 꺼진 산자락에 다닥다닥한 지붕들이 거대한 통나무의 나이테를 반으로 쪼개 놓은 듯 부채꼴이다. 고대 유적의 원형극장과도 같은 모양보다 확 눈에 띄는 것은 지붕을 온통 연녹색으로 칠한 '초록 마을'의 색감이다. 한가운데는 반대 색에 가까운 주황색의 지붕들이 몇몇 모여 있으니 꼭 나이테 속심의 적목질(赤木質) 아닌가.

터덕터덕 한참을 걸어 올랐으나 이제나저제나 끝날 듯 말 듯 질기게 가슴팍을 풀무질하는 돌계단 층층대에 지쳐 다시 멈출 수 밖에 없다. 아니? 8시쯤 출발해 아직 이른 아침이라고 느긋한 참인데, 오른쪽 높직이 거의 중천에 해가 솟아 있다. 쿰부의 스테고 사우루스 공룡인 쿠숨 캉구루(Kusum Kanguru·6,367m)보다 높이, 왼쪽 구름 위로 빼꼼하던 쌍용 왕관의 탐세르쿠(Thamserku·6,608m)보다 높이, 두 설산 첨봉의 한가운데 떠서 고작 100m쯤 등고선 하나를 넘느라 개미처럼 꼬물거리는 미물을 한심하게 만든다.

오늘 여정이 어떻게 되더라. 컁주마(Kyangjuma·3,550m), 사나사(Sanasa·3,600m), 푼키텐가(Phunki Tenga·3,250m), 텡보체(Tengboche·3,867m), 디보체(Deboche·3,820m)의 동선인데…. 이럴 수가. 고도의 오르내림이 하 수상타. 푼키텐가까지 7.6km를 가면서 단 몇 미터라도 고도를 높이진 못할망정 남체 출발지보다 200m쯤 내려간다. 그 어름에서 하루의 여장을 푼다면야 나쁠 것도 없겠는데, 막판 2.8km 구간에서 무려 617m의 수직 상승을 하는 거 아닌가. 그렇구나. 

엊그제의 남체 페이스, 며칠 뒤의 로부체(Lobuche) 고개와 함께 3대 깔딱고개로 악명 높은 텡보체 고개를 바로 오늘 맞다닥뜨린다는 거잖아. 그제 첫 고개부터 초주검이 된 몸뚱이가 오늘은 완전 강시가 될지 모를 일이나 이판사판 내친걸음이다.

저건 뭐지? 남체의 뒷동산 위로 뾰쪽 이마만 내민 봉우리가 푸른 수평선에 감실대는 흰 돛단배처럼 초현실적이다. 저만 높이와 위용의 봉우리라면 제법 명망이 있을 법한데 가만, 쿰비율라(Khumbi Yulha·5,761m)?

남체의 정수리 너머에 은둔하듯 멀찍이 떨어져 볼 수 없었다지만, 쿰부란 이름의 발원지인 성스러운 수호자를 찾아볼 생각도 않고 여태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한심하다. 어제 들렀다가 내부 수리 중이라 못 들어간 셰르파 박물관은 남체의 오른쪽 끝머리에 있으므로, 마당의 텐징 노르가이 동상 앞에서 꽁지발로 두리번댔다면 분명 쿰빌라(Khumbila)를 볼 수 있었지 싶다.

'수평선에 감실감실 흰 돛단배' 남체 뒷동산 위의 눈봉우리

초장부터 기신기신해 어쩌나 했는데, 뒷걸음치던 황소가 뭘 한다고 지금이나마 셰르파의 당산(堂山)을 우러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쿰빌라가 셰르파들 사이에서 얼마나 신성시되는지는 '절대 절대 입산 금지'로 알 수 있지만, 색달리 얘기되는 정황증거도 있다. 어느 해인가 눈부시던 쿰빌라의 꼭대기까지 거친 암벽이 거무죽죽히 드러나 그 발치에 안긴 쿰중(Khumjung·3,780m)의 셰르파들을 아연케 했다. 어제 갑작스러운 눈만 아니었다면 방문했을 뒷동산 너머, 힐러리가 세운 학교가 있는 마을이다.

쿰빌라는 까맣게 빛을 잃었지만 변함없이 하얗게 빛나는 것이 있었으니 아연으로 도색한 마을 지붕들이었다. 너무도 강렬한 빛과 열이 추운 방을 좀 따습게 할 수 있겠지만, 쿰빌라와 맞짱 뜨는 방 사열로 인해 그 많던 눈이 조금이라도 빨리 녹지 않았을까. 셰르파들이 온 마을의 지붕을 녹색으로 바꾼 뒤 언제부턴가 쿰빌라는 다시 흰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마을은 '초록 계곡(green valley)'으로 널리 알려졌다. 남체의 샘물을 위해 성물(聖物)을 땅속에 묻기가 그랬듯이 그 자체로 딱히 효험을 바랐다기보다 필사적 소원의 정성에 티끌이나마 있을까 갈닦는 마음 다잡기가 아니었을까.

재 너머 동네의 노심초사와 지극 정성에 대해 여기 남체 주민들이 빠삭할 수밖에 없을뿐더러 강 건너 불이라고 팔짱 끼고 있을 수도 없었을 거다. 감히 쿰빌라의 눈빛을 흉내내듯 빛나던 지붕을 한 집 두 집 새로 칠한 것이 바로 저 '초록 마을'이리라. 쿰빌라든 뒷동산이든 산 위에서 눈은 곧 생명수의 젖줄이기에 아무리 삼가고 조아려도 지나친 일이 아니고 말고. 우리야 드높은 눈봉우리를 보면 무심결에 "멋있다!"는 탄성이 나오지만, 여기 셰르파 들은 본능적으로 "하늘 샘!"이란 경외감이 북받치지 않겠는가.

시나브로 쿰빌라가 솟아오르는 모습에 이끌리던 발길이 뚝 멈춘 곳은 직각의 갈림목 앞이다. 야크 통행 금지의 구조물이 있는 왼쪽 길은 남체의 뒷동산으로 계속 올라야 하는 된비알이다. 여기는 바로? 어제 새벽 눈을 맞으며 설산의 커피를 마시러 가던 샹보 체(Syangboche·3,775m) 길이 분명하다. 까르르 소리가 나더니 가방을 멘 남자아이들 대여섯이 달리기 시합이라도 하듯 비탈을 평지처럼 내달려 올라간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힐러리 스쿨의 쿰중을 거쳐 결국 좌우 산길이 합류된다고 하고, 사가르마타를 더불어 음미하는 커피가 당기기도 하고, 가장 크게는 쿰빌라의 위용을 고스란히 보고 싶기도 하지만, 때론 욕심을 자제도 해야 하는 법이지. 조금의 미련일랑 없이 정말 모처럼 넋을 놓아도 좋을 평탄하고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굽이돈다.

근데 로지가 있네? 여기서 잤더라면 첫밗부터 40분간을 헉헉대며 치받이 돌계단에서 헛심 쓰느라 낑낑댈 건더기가 하나도 없었지 않은가. 눈부신 설산의 조망이 좋다고 우리 고층 아파트처럼 '뷰값' 프리미엄이 붙어 숙박비가 비싸다면 그래, 꼭대기야 얼마든 양보할 수 있지. 올라오는 내내 좌우로 보이는 게 죄다 로지이니 중간 어디라도 적당히 조금 덜 비싼 집을 골랐으면 좀 좋았을까.

두 번이나 40분을 깔딱깔딱, 된비알서 깨달은 히말라야 가성비

하필 맨 밑 골바닥에 방을 떡 잡아 놓아 그제 남체 페이스에서 곤죽이 돼 도착했을 때 한 번은 살았네, 좋아했지만 어제 어둑새벽 에 이어 오늘 아침까지 두 번씩이나 무슨 조조(早朝) 유격 훈련을 이리 빡세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저만치 앞서가는 새파란 가이드가 밉상스럽기 짝이 없으나, 아무 생각 없는 히말라야의 순박함 때문인지도 모르지. 기회를 보아 '로어 남체'가 아니라 '어퍼 남체' 에 숙소를 잡으면 손님들에게 얼마나 고맙다는 말을 들을지, 단단히 귀띔해야겠다. 현대인에게 필수적인 가성비(價性比) 생존술이 심심산천의 히말라야에 더 절실할 것도 같으니까.

글.사진 배두일 객원기자│   <사람과 산> 주최 한국산 악문학상 제1회(1991) 중편 등반수기('포효하는 토왕성'), 제3회(1993) 중편소설('환상방황') 수상으로 등단한 유명한 산악작가이다. 일간지 언론인으로 재직 때부터 암벽 과 빙벽 등반 등 산행을 하며 2006년 이후 월간 <사람과 산>에 산행 에세이를 연재 중 이다. 저서로 <환상방황(공저)>, <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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