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왕 시대’ 열릴까...“공주를 천황으로” 정치권까지 번진 논의 [이윤정 기자의 소소월드]

이윤정 기자 2026. 5. 1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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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小騷)월드: 소소하게 소란스러웠던 세계 이야기를 전합니다
지난해 1월 새해 축하 행사에서 아이코 공주가 국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AP연합뉴스

“아이코 공주가 차기 일본 천황에 올라야 한다.” 한때는 파격적으로 들렸던 이 말이 이제 일본에선 거스를 수 없는 여론이 됐다. 최근 조사에선 일본 국민 10명 중 9명이 여성 천황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 여성은 법적으로 황위를 계승할 수 없다.

일본 정치권은 최근 황실전범 개정 논의를 다시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 12일 마이니치신문·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중·참의원 의장단과 여야는 ‘안정적 황위 계승’을 위한 제도 개편 논의를 재개했다. 핵심 안건은 결혼한 여성 황족의 신분 유지와, 전후 일반인이 된 옛 황족 남성 후손의 황실 복귀 문제다. 표면적 이유는 ‘안정적인 황위 계승’이다. 현재 젊은 남성 황족이 사실상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정치권의 온도차다. 국민 여론은 아이코 공주(24) 쪽으로 기울어 있는데, 자민당 보수파는 오히려 ‘옛 황족 남성 복귀’에 무게를 싣고 있다. 여성 천황 논의는 최대한 피하면서, ‘남계 혈통’을 유지할 방법을 찾고 있는 셈이다. 반면 입헌민주당 등 야권에서는 여성·여계 천황 논의를 더 이상 미뤄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온다. 다만 황실 문제 자체가 워낙 민감한 영역인 만큼, 야권 역시 공개적으로 ‘아이코 천황’을 강하게 밀어붙이진 못하는 분위기다.

‘비호감’ 차기 천황 후보 VS ‘호감’ 아이코 공주

아이코 공주는 현재 일본 천황인 나루히토(65)와 마사코 황후(62)의 외동딸이다. 학습원 유치원과 초·중·고를 거쳐 가쿠슈인대 일본문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일본적십자사에서 근무 중이다. 하지만 아이코 공주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황위 계승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2020년 나루히토 일왕이 왕세제 지위를 얻은 친동생 후미히토가 왕위 계승 1위인가 됐음을 알리는 ‘릿코시 선포식’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래서 현재 법적으로 가장 유력한 차기 천황은 나루히토의 남동생인 후미히토 왕세제(60)다. 후미히토에게는 세 자녀가 있다. 장녀는 2021년 결혼과 함께 황실을 떠난 마코 전 공주(34), 차녀는 가코 공주(31), 그리고 막내이자 유일한 아들이 히사히토 친왕(19)이다.

현재 일본 황실에서 젊은 남성 후계자는 사실상 히사히토 한 명뿐이다. 일본 사회에서 “황위 계승 기반이 지나치게 취약하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그런데 일본 국민들이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젊은 황족은 오히려 아이코 공주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 사회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성장했다. 2000년대 후반 가쿠슈인 초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학교 내 괴롭힘과 스트레스로 등교 불안을 겪기도 했다. 당시 일본 사회는 “황족도 학교폭력을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아이코 공주는 ‘특권층 공주’보다 압박과 시선 속에서 성장한 평범한 청년 이미지로 대중의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2017년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아이코 공주. AP연합뉴스

성인이 된 뒤의 모습은 이런 이미지를 더 굳혔다. 2024년 일본적십자사에 취직해 일반 직원처럼 출퇴근하는 모습, “10년째 같은 물통을 사용한다”는 검소한 일화 등이 반복적으로 화제가 됐다.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귀족적인 모습보다 차분하고 성실한 이미지가 일본 젊은 세대에게 특히 호감을 얻었다.

반면 현재 계승 1순위인 후미히토 왕세제 일가는 각종 구설 속에 ‘비호감’ 이미지를 굳혔다. 장녀 마코 전 공주(34)는 대학 동창 고무로 게이(34)와의 결혼 문제로 수년간 거센 논란 중심에 섰다. 2017년 약혼 발표 이후 고무로 측 가족의 금전 문제 의혹이 불거지며 결혼은 여러 차례 연기됐고, 일본 주간지들은 사생활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결국 마코는 2021년 결혼과 동시에 황실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이 과정에서 궁내청은 마코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증상을 겪고 있다고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2021년 2월 26일 아키히토 일본 상왕의 손녀 마코 공주가 집을 나서고 있다. 마코 공주는 이날 결혼식을 생략하고 대학 시절 만난 연인과 혼인신고를 마쳤다. 도쿄 | AP연합뉴스

후미히토 왕세제 부부를 둘러싼 잡음도 적지 않았다. 왕세제 부부가 거주하는 아키시노노미야 저택 개보수 비용이 약 30억엔(약 270억원)에 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검소함과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나왔다. 코로나19 시기와 맞물리며 여론은 더 냉담해졌다.

차녀 가코 공주(31)를 둘러싼 언론 보도 역시 반복적으로 화제가 됐다. 패션과 사생활, 결혼 여부 등이 지나치게 소비되면서 “연예인식 황실 보도”라는 비판이 이어졌고, 일부 보수층은 후미히토 일가 전체를 두고 “황실의 품위가 예전 같지 않다”는 반응까지 보였다.

올해 1월 새해 축하 행사에 참여한 가코 공주와 히사히토 왕자. AP 연합뉴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코 공주는 반대로 조용하고 안정적인 이미지로 존재감을 키워갔다. 일본 안에서 “누가 더 천황다운가”라는 비교가 자연스럽게 따라붙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실제 여론도 뚜렷하게 움직이고 있다. 2024년 교도통신 조사에선 일본 국민의 약 90%가 여성 천황을 수용할 수 있다고 답했다. 보수 성향 독자가 많은 요미우리신문의 최근 조사에서도 여성 천황 찬성 의견은 69%에 달했다. 반대는 7%에 그쳤고, 24%는 판단을 유보했다.

자민당이 여성 천황을 반대하는 이유

하지만 일본 정치권의 움직임은 여론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최근 일본 국회가 다시 논의에 들어간 것도 여성 천황 허용보다는 ‘황족 수 감소 대책’에 가깝다. 현재 논의되는 안은 크게 두 가지다. 결혼 후 일반인이 된 여성 황족이 계속 황실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그리고 전후 일반인이 된 옛 황족 가문의 남성 후손들을 다시 황실로 복귀시킬 것인가다.

자민당 보수파는 두 번째 방안에 무게를 싣고 있다. 여성 천황 논의는 최대한 피한 채, 남성 혈통 원칙을 유지할 우회로를 찾고 있는 셈이다. 천황의 외동딸인 아이코 공주가 국민적 호감을 얻고 있는데도, 굳이 수십 년 전 황실을 떠난 먼 친척 남성을 다시 데려와야 하느냐는 반응이 적지 않다. 실제 일본 인터넷과 방송에서는 “직계 딸보다 방계 남성을 우선하는 게 더 비자연적”이라는 말도 자주 등장한다.

아이코 공주. 위키피디아

자민당 보수파가 여성 천황 논의를 경계하는 이유는 단순히 “여성이라서”가 아니다. 핵심은 ‘남계 혈통’이다. 일본 보수층은 천황제를 단순한 왕위 계승 제도가 아니라, “끊기지 않은 부계 혈통의 역사”로 받아들인다. 일본 황실은 스스로를 초대 진무천황 이래 이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라고 주장해왔다. 진무천황은 일본 신화 속 존재에 가까운 인물로, 전설상 기원전 660년에 즉위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현대 역사학계는 이를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는다. 초기 천황 기록 상당수는 신화와 전설의 영역에 가깝다는 게 일반적 해석이다. 그럼에도 일본 보수 진영은 여전히 이 ‘남계 계승의 연속성’을 천황제 정통성의 핵심으로 여긴다.

그래서 이들이 진짜 경계하는 건 여성 천황 자체보다 ‘여계 천황’이다. 사실 일본 역사에도 여성 천황은 있었다. 일본 정부도 공식적으로 8명의 여성 천황 존재를 인정한다. 다만 보수 진영은 이들을 어디까지나 예외적 존재로 해석한다. 모두 부계 혈통 안에서 즉위했고, 대부분 다음 남성 계승자가 등장하기 전 잠시 왕위를 맡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보수 정치권에서 경계하는 건 아이코 공주의 ‘다음 세대’다. 만약 아이코 공주가 천황이 되고, 이후 그의 자녀가 다시 천황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이의 아버지는 일반 가문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일본 황실은 역사상 처음으로 모계 중심 계승 체계에 들어가게 된다. 보수층은 바로 이 지점을 “황통의 단절”로 받아들인다. 쉽게 말해, 지금 일본 보수파의 고민은 “여성이 왕이 될 수 있느냐”보다 “부계 혈통 원칙이 무너지느냐”에 가깝다.

그래서 자민당 보수파는 여성 천황 허용 대신, 전후 일반인이 된 옛 황족 가문의 남성 후손들을 다시 황실로 복귀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국회 논의에서도 이 안이 핵심 축 중 하나다.

이들이 원래부터 일반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른바 ‘옛 황족’으로 불리는 이들은 원래 일본 황실의 친척 가문이었다. 쉽게 말해, 천황의 직계 가족은 아니지만 같은 남성 혈통에서 갈라져 나온 일종의 ‘황실 분가’들이다. 과거 일본 황실은 남성 후계가 끊길 가능성에 대비해 여러 궁가(宮家)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1947년 연합군 점령기 미군정(GHQ)은 일본 왕실 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전쟁 전 일본 군국주의 체제와 결합했던 거대한 황실 조직을 해체하겠다는 목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직계 황실을 제외한 11개 황족 가문이 한꺼번에 황적에서 제외됐고, 일반인 신분으로 바뀌었다. 즉 지금 일본 정치권이 다시 거론하는 ‘옛 황족 남성 후손’들은 원래는 황실 구성원이었지만, 전후 개혁 과정에서 민간인으로 편입된 사람들이다.

문제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점이다. 황적 이탈 이후 벌써 80년 가까이 지났다. 현재 구황족 후손들은 기업인·회사원·학자 등 일반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일부는 황실과 교류를 이어왔지만, 국민 입장에선 사실상 “일반인 남성”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서 일본 안에서도 이런 반문이 나온다. “천황의 친딸은 안 되는데, 80년 전 황실을 떠난 먼 친척 남성은 가능한가.”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여성 천황 논의에 관해 “시대에 맞게 제도를 바꾸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일본 정치권은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국민 다수는 이미 여성 천황을 받아들이고 있는데도, 정치권은 ‘전통’과 ‘혈통’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아이코 공주 논쟁은 결국 일본 사회가 얼만큼 변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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