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 찍어내기 산업 아닌 ‘문화’로 전환해야”[M 인터뷰]

권도경 기자 2026. 5. 15.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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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인터뷰 - 타워팰리스 설계한 박상진 건축가협회 신임회장
韓 건축, 자본논리에 밀려… ‘주거 최저기준 미달’ 300만명 달해
랜드마크 몇 개 짓는 것보다 ‘국민 삶의 질’ 향상에 더 집중해야
한옥, 한국적 정서가 융합된 ‘보자기 문화’ 강점 살려도 좋아
추천 건축물? 5·18 역사 살리기 위해 지하로 내린 亞문화전당
박상진 한국건축가협회 회장이 지난 7일 서울 양천구 목동 대한민국예술인센터 내 한국건축가협회 사무국 테라스에서 두 팔을 펼친 채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김동훈 기자

산업화 시대에 가장 많이 지어진 건축물은 아파트다. 좁은 땅에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집을 빨리 짓는 데는 아파트가 제격이다. 그만큼 도시 미관은 삭막해졌다. 천편일률적인 회색 도시인 서울은 지방 중소도시에 복제됐다. 단조롭게 늘어선 개성 없는 건물은 미관을 해쳤고, 도시 정체성도 담아내지 못했다. 최근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개인 취향을 존중하는 문화가 퍼지면서 분위기는 바뀌고 있다. ‘아파트 공화국’으로 불리는 서울에도 예술성을 품은 건축물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다. 깊은 울림을 주는 건축물은 도시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하지만 한국 건축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지난 7일 서울 양천구 목동 대한민국예술인센터에서 만난 박상진 한국건축가협회 회장은 “한국 건축은 걸음마 단계”라며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인 만큼 문화로서 재정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월 말 35대 회장에 취임한 그는 주상복합아파트의 대명사인 ‘타워팰리스 1차’와 동양투자금융 강남사옥 등을 설계한 건축가다.

―건축은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전문 영역 중 하나다. 건축을 쉽게 설명한다면.

“건축은 우리가 먹고, 자고, 일하는 ‘무대’를 만드는 일이다. 건축은 모든 사람의 삶에 연관된다. 건물(building)은 벽을 세우고 지붕을 얹은 물리적인 결과물로 본다면, 건축(architecture)은 공간에 ‘철학’과 ‘목적’을 담아 사람 삶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공간이 바뀌면 사람도 달라진다.

건축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건물을 하나 짓는 데 설계, 건설, 전기, 설비, 조명 등 수십 개 업종이 협업해야 한다. 건축은 모두의 예술이다. 건축가는 무대가 안전하고 아름다울 수 있도록, 인간에게 딱 맞도록 기획하고 연출하는 ‘감독’이다. 요리와도 유사하다. 건축도 이 공간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짓는 거다.”

―건축에서 가장 중시하는 점은.

“건축에는 두 개의 날개가 있다. 하나는 산업이고, 하나는 문화다. 두 개의 축이 건강해야만 한다. 건축이라고 하면 부동산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문화재’다. 한국은 문화 측면이 취약하다. 자본 논리를 업은 산업에 밀린 탓이다. 모든 국민은 건축 문화를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다. 수세식 화장실, 하수도 설비 등 주거 최저 기준이 있다. 옥탑방과 지하 쪽방에서 최저 주거기준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약 300만 명이다. 우리나라에 랜드마크가 몇 개 있다는 것보다 국민이 행복을 느끼는 주거기준이 상향되는 게 더 중요하다. 이런 부분에서 건축이 일정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인구 감소, 지역 소멸, 고령화, 도시 재생 등 사회·환경 문제를 위해서도 전문가집단으로서 대안을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좋은 건축이란?

“건축은 공공재다. 좋은 건축은 인간, 사회, 자연 3가지와 건강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설계할 때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 건축물이 있는 장소 등에 대한 사회적 맥락을 많이 고민한다. 건축은 화가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캔버스에 그리는 게 아니다. 땅이란 대상이 있다. 건축학과 학생들에게 늘 강조하는 점이기도 한데, 설계할 때는 대지에 답이 있으니깐 대지를 잘 읽으려고 한다. 대지가 말하는 걸 잘 듣고, 그 땅의 속성에 맞게끔 설계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건축은 현장을 가장 중시한다. ‘우리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 즉 우문현답이다.”

―획일화됐다고 비판받는 한국 건축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은?

“한국 건축 문화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경제 규모에 비해선 상당히 낙후돼 있다. 중국 상하이조차 건축물이 다양하다. 한국은 스스로 근대화되질 못했다. 한옥 같은 아름다운 유산을 부정하면서 건축 자산을 스스로 파괴하기도 했다. 우리 유산을 사랑하고 아끼지 못한 탓에 훌륭한 문화가 그대로 이어지지 못한 게 현실이다. 사대주의도 짙다. 전통 유산을 놔두고 서양 건축물을 베끼기에 바빴다. 한국 주요 랜드마크는 외국인 건축가 손을 거쳤다. 전통 유산인 한옥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건축가 등 장인을 홀대하는 현상도 한몫했다. 우리나라 건물 준공식에는 건축가들이 초대받지 못한다. 시공사만 조명받을 뿐이다. 베스트셀러가 나오면 작가 대신 출판사가 조명받는 셈이다. 건축의 산업적인 측면만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대우받는 사회에서 결국 좋은 건축물이 나온다. 경험과 지식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시간을 줘야 하는데 이를 무시한 채 개성 없는 건물을 찍어내 왔다. 경제 규모에 맞게 이제 건축이 산업에서 문화로 서둘러 전환돼야 한다.”

―국내외에서 한옥이 재조명받고 있는데.

“한 서양학자가 한·중·일 3국의 전통 건축물을 비교한 적이 있다. 중국 집에선 살고 싶고, 일본 집은 소유하고 싶고, 한옥은 만져보고 싶다고 했다. 중국처럼 너무 장중하지도 않고, 일본처럼 아기자기하지도 않으며, 인간적인 척도에 잘 맞게 지어졌다는 의미다. 한옥은 자연스러워 다가가고 싶다는 뜻인데 한옥을 잘 표현한 말이 아닌가 싶다. 한옥은 가분수다. 지붕이 한옥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굉장히 크다. 기초가 없는 탓에 바람이 불면 집이 무너질 수 있어 지붕 무게로 집을 꾹 눌러 안정적으로 유지한 거다. 하지만 지붕이 무거워 보이진 않는다. 지붕 후림(처마가 안쪽으로 휘어 들어간 곡선)과 조로(처마가 위로 휘어 오른 곡선)가 유선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개방적이기도 하다. 여름에 분합문(分閤門)을 다 들어 올리면 대청과 방을 연결하는 큰 공간이 나온다. 한옥 마당엔 나무나 잔디를 심지 않았는데, 햇빛이 마당에서 난반사(여러 방향으로 반사)되면 여러 공간을 간접조명으로 따스하게 비춘다. 사랑채와 안채를 나눠, 개방된 곳에 독립적인 공간을 따로 만드는 등 정말 지혜로운 건축물이다. 대청에서는 제사를 지내거나 다도를 할 수 있고, 마당에서는 곡식을 털고 말리거나, 관혼상제를 치를 수 있다. 한옥 문화를 ‘보자기 문화’라고 하는 이유다. 보자기처럼 다 쌀 수 있는 포용의 문화다. 고택은 그 안에 살아 있는 정신도 중요하다. 지금까지 잘 보존된 고택에는 건축주의 철학과 안목이 깃들어 있다.”

―‘내 인생 최고의 건축물’을 꼽는다면.

“이희태 건축가의 절두산순교성지 성당이다. 이 건축가는 김수근, 김중업과 함께 한국 건축의 3대 거장이다. 정통 건축 교육을 받지 못해 독학했지만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극장, 혜화동성당 등 수작을 많이 남긴 분이다. 국립극장에 가서 살펴보면 여러 기둥이 쭉 서 있고 지붕은 무겁게 보이지 않게끔 톱니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이분이 얼마나 한국적인 걸 생각하고, 한국 전통을 어떻게 현대화할지 고민했는지 알 수 있다.

절두산순교성지 성당은 한국 전통 건축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모더니즘의 정수다. 목조 건축을 연상시키는 누각형 건물인데 성당 지붕은 선비들이 쓰는 갓 모양을 형상화했다. 처마의 부드러운 곡선, 이를 받치는 기둥 등에는 한국적 정서가 배어 있다. 한강 변에 있는 지형을 잘 살려 순례자들이 자연스럽게 기도와 묵상의 공간으로 들어서게 했다. 오래전 해 질 녘에 강변북로에서 절두산 방향으로 운전하고 있는데 사다리꼴 종탑 속 종이 달려 있는 구멍에 해가 딱 걸렸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 건축가는 설계하는 내내 대지에 와서 계속 보지 않으셨을까, 그래서 이 장면까지 생각했을 거라고 본다.”

―독자들에게 반드시 한번 가보라고 권유하고 싶은 건축물이 있다면.

“우규승 건축가가 설계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다. 정부 예산으로 지은 건축물 중에 가장 성공적이다. 우 건축가의 철학인 ‘빛의 숲’이란 개념을 토대로 설계됐다. 광주 부지 규모가 꽤 큰 만큼 대다수 건축가들은 랜드마크를 세우기 위해 위압적으로 설계하기 쉽다. 하지만 우 건축가는 모든 건축물을 지하로 내렸다. 옛 전남도청이 위축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서 희생됐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부각시키는 개념이었다. 스스로를 낮춰 도시와 역사를 품었던 것이다. 통상 지하가 환경이 좋지 않지만 우 건축가는 채광창, 자연광, 지하 중정 등을 이용해 빛을 지하로 끌어들였다. 이에 지하가 지하 같지 않다. 그리고 지상의 면적을 원래 주인이었던 일반 시민들에게 되돌려줬다. 건축물이 주인공이 되기보다는 그 안에서 일어난 역사와 활동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는 이런 건축가의 정신, 역사적 가르침 등이 담겨 있다. 공공건축물은 세월이 흐를수록 낙후되기 십상인데, 완공된 지 12년이 지난 지금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여전히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최고의 공공건축물이다.”

설계자로서 책무 다하도록… ‘시공과정 참여’ 법개정도 촉구

■ 박회장의 건축생태계 비전

박상진 한국건축가협회 회장은 지난 2월 말 취임 당시 “모두가 건축이고 모두가 건축가다”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건축은 모든 사람의 삶에 연관돼 있다는 의미로, 건축의 지평을 넓히겠다는 취지다.

박 회장은 “과거에는 개발 논리로 건축을 바라봤다면 이제는 문화로서 건축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면서 “그러려면 건강한 건축 생태계가 먼저 조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개인 취향과 개성이 담긴 공간이 중시되는 등 건축 문화가 변한 가운데 건축의 사회적 역할과 협회의 공적 책임도 강화하겠다는 청사진도 내놓았다.

건축가는 하드웨어인 건물을 설계하는 것 외에도 내부 인테리어 등 소프트웨어도 담당하고 있다. 박 회장은 건축가 권익 보호를 위해 설계업에 대한 정책 지원을 적극 촉구할 방침이다. 현행법상 설계자가 설계를 납품하면 그 이후엔 건축물 건설 과정에 참여할 수 없다. 설계자 의도대로 건물이 지어지고 있는지, 설계자가 선택한 건자재로 제대로 시공되는지 여부를 전혀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이에 설계자가 건축물 시공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건축의 질을 높이는 결과로도 직결될 수 있다. 설계업역에 대한 법적 보호와 건축진흥법 제정도 제언했다. 박 회장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산하 10개 단체 중에서 건축만 진흥법이 없는데 건축진흥법이 제정돼 국민이 건축 문화를 향유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로서 사회적인 책무를 다하도록 6000여 회원들도 독려할 작정이다. 박 회장은 “한 사회에서 전문가로서 존중받으려면 걸맞은 역할을 다해야 한다”며 “종묘 앞 재개발 논란에서도 겁먹고 뒤로 미루는 게 아니라 역사적인 건축물을 살리면서도 우리 후손을 위해 도시 재생을 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할 전문가적 역량이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권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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