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겁의 시간을 간직한 '돌의 침묵' …김용호가 포착한 제주의 美
드러내지 않는 본질적 아름다움 '유현'
추사, 서경덕 등 옛 선비들이 강조한 미학
제주 하늘 땅 사람 돌에서 찾은 깊고 그윽한 감각
제주돌문화공원에서 7월 26일까지 전시
6월 12일엔 정원산책과 박정자 공연 등 특별행사
제주시 조천읍엔 신화와 역사가 숨 쉬는 ‘돌의 성소(聖所)’가 있다. 100만 평의 드넓은 곶자왈에 20년 전 개원한 제주돌문화공원이다. 제주 사람들의 삶 속에 투영된 돌 문화를 집대성한 곳. 이곳엔 이 섬의 창조 신화인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의 서사가 흐른다. 억겁의 시간을 견뎌온 귀한 돌들이 이 공원의 주인이다. 돌에 소원을 빌고, 돌을 쌓아 집을 짓던 제주 사람들의 정체성을 오롯이 드러낸다.


지난달 25일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서 개막한 김용호 작가(70)의 사진영상전 <남국재견南國再見: 제주, 다시 보다-유현>은 제주의 자연이 축적한 시간의 층위를 다시 뒤집는다. 우리가 알던 제주의 얼굴을 완전히 낯설게, 깊이 마주하는 기록들이 펼쳐진다.

김용호 작가는 40여 년 전 돌문화공원의 전신인 목석원 시절부터 이 장소를 찾았다. 당시 ‘아는 사람만 안다’던 제주 속 숨은 치유의 장소를 수십 번 마주했다. 그에게 이곳은 단순히 풍경을 찍는 장소가 아니라 지질학적 기억과 신화적 상상력, 민속적 정서가 응축된 복합적인 대상으로 다가왔다고. 그리고 스스로 질문했다. “우리가 잃어버린 한국적 아름다움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 모든 감각의 끝엔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 아름다움의 본질, ‘유현(幽玄)’의 미학이 있었다.


드러내지 않는 본질적 아름다움-유현(幽玄)
그윽할 유, 검을 현. 유현의 미학은 과장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으나, 분명하게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뜻한다. 선명한 형상보다는 모호한 여운으로 남는 가득하고 고요한 신비로운 감각이란 이야기다. 예컨대 추사 김정희는 기운을 드러내기보다 여백 속에 숨길 것을 강조했다. 서경덕은 비어 있는 듯하나 만물의 에너지로 가득 찬 상태를 유현이라고 했다. 김용호 작가는 “어둠과 안개, 침묵과 여백, 완전히 해석되지 않는 이야기의 틈에서 유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며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어느 순간 조용히 스며드는 아름다움을 통해 제주 스스로도 아직 충분히 알지 못했을 본모습을 찾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는 풍경을 설명하거나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제주의 거친 바람, 검은 현무암, 눈과 비, 생과 사의 경계를 품은 바다 등 극단적인 요소들을 희미하게 드러낸다. 우리가 알던 제주의 풍경이라고 하기엔 낯설다.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동자석,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모호해진 형상들, 사진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풍경까지. 과도한 연출을 배제하고 돌과 나무, 하늘과 바람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조건만을 남긴 이번 작업은 옛 선비들의 미학적 태도와도 닮아 있다.

제주의 사계와 붉은 바다, 그리고 천지인
전시는 하늘, 땅, 사람, 그리고 제주 고유의 물질적 근원인 ‘돌’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전개된다. ‘하늘과 땅’에선 안개에 잠긴 오름과 바람에 흔들리는 풀의 형상으로 제주의 기운을 온전히 전한다. ‘사람과 생명’에선 땅의 기억을 지키는 뱀과 하늘과 인간을 잇는 말의 기운을 빌려 자연과 인간, 신화와 일상의 경계를 허문다. 작가는 제주의 풍경 속에 스며든 이 존재들을 통해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제주의 이야기를 포착했다.
작가는 설문대할망 설화부터 조선시대의 유배사, 현대의 4·3 사건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깊은 상처를 사진 이면에 녹여냈다. 특히 붉은 파도와 검은 현무암은 고립과 억압의 역사를 견뎌온 제주인의 견고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전시실 한가운데 흰 모래와 자갈 등을 오름처럼 쌓아 올린 곳에 붉은 바다의 영상이 투사된다. 파도가 용암이 되고, 용암이 물결치며 작품에 리듬을 더한다.

“제주의 바다는 늘 평온하지 않고,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기억들이 출렁입니다. 제주는 오랫동안 배로만 오갈 수 있었던 섬이자 유배와 단절, 억압의 역사를 견뎌온 고립된 공간이었습니다. 제주로 향하는 바닷길에서 마주한 파도는 마치 한라산의 활화산에서 분출되는 붉은 용암처럼 거센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고, 제게 돌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바다를 건너야 했던 수많은 제주인의 두려움과 결단, 그리고 죽음을 건너는 기상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 붉음은 기억의 색이며, 여전히 맥동하는 제주의 상처이자 생명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뜨거웠던 것이 식으며 만들어진 검은 바위는 그 바다를 건너 살아남은 이들의 형상처럼 상처를 숨기지 않고 견뎌내며 견고한 생명력을 가진 제주인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 작업은 제주의 비극을 재연하기보다 죽음의 바다를 통과한 이후에도 돌처럼 남아 끝내 부서지지 않은 존재들의 침묵과 지속되는 삶의 무게를 바라보는 기록입니다.”

일부 작품은 한지에 인화돼 회화적 정서가 짙게 드러난다. 이번 작품 중 일부는 오는 9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서 깊은 국립박물관 오텔드라마린의 한·프랑스 수교 140주년 기념 전시에 초청받았다. 이번 전시는 7월 26일까지 열리며, 6월 12일에는 전시회를 기념해 특별한 행사들이 마련된다. 오후 1시30분부터 <정원의 황홀> 저자 윤광준과 함께 돌문화공원을 둘러보는 숲속 볕뉘산책이 열린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게릴라 형식으로 진행되는 강은일 해금, 정마리 정가 공연이 있다. 오후 6시에는 연극인 박정자 씨가 출연하는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특별공연이 설문대할망전시관 야외무대에서 펼쳐진다.
제주=김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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