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로 떠나는 성지순례] 직접 서 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 접경에서 만난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
파주는 한반도에서 북녘과 가장 가까운 땅이다. 자유로를 따라 임진강을 거슬러 오르면 강 건너편이 더 이상 다른 도(道)가 아니라 다른 세계임을 알게 된다. 이 접경지역의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 안쪽, 해이리 예술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참회와 속죄의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처음 찾은 방문객들이 가장 먼저 받는 인상은 종교적 요소가 아니라 익숙한 듯 낯선 건축의 독특함이다. 한국 전통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 형태의 본당, 그 옆에 솟은 종탑, 그리고 뒤편의 또 다른 서양식 석조 건물. 이 조합은 지금은 사라진 북한의 건축물을 재현한 결과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은 미국 메리놀 외방선교회 본부 지하 고문서고에서 찾아낸 진사동성당의 사진과 서류를 바탕으로, 당시 벽돌 크기와 건물 비율을 계산해 원본의 약 1.5배 크기로 재현한 것이다. 성당 내부 구조는 함경남도 덕원의 베네딕도 수도원 대성전을 모델로 했다. 덕원수도원 역시 1949년 북한 당국에 의해 강제 해산된 후 폐허가 됐다.

성당 내부에서 주목할 부분은 제대 위 반원형 천장의 유리 모자이크다. 1.5톤의 유리 알갱이로 제작된 이 작품은 제작 과정 자체가 남북 협력의 결과물이다. 서울대교구 소속 신부가 밑그림을 그리고, 북한 '평양 만수대 창작사 벽화창작단' 소속 공훈 작가 등 7명이 중국 단동에서 제작을 맡았다. 완성된 작품은 파주로 옮겨와 5개월에 걸쳐 부착됐다.

◇ 왜 참회와 속죄인가
문득 '성당 이름이 왜 참회와 속죄의 성당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누구의 어떤 죄를 누구에게 속죄한다는 것인가. 이 건물을 기획한 측의 설명에 따르면, 분단을 막지 못하고 그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무관심에 대한 반성이라고 한다.

◇ 풍경이 단절되는 곳, 오두산 통일전망대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있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해 서해로 흘러가는 지점, 그 합수머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다. 강 건너편은 황해북도 개풍군으로, 맑은 날에는 망원경 없이도 북녘의 마을과 들녘이 또렷이 보인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풍경은 의외로 평범하다. 산과 강, 논밭과 집들이 있을 뿐이다.

◇ 함께 가봐야 할 곳, 갈곡리성당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차로 약 30분 거리, 파주시 법원읍에 갈곡리성당이 있다. 옛 이름은 칡이 많은 골짜기라는 뜻의 '칠울'이다. 19세기 말 박해를 피해 강원도 홍천과 풍수원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옹기를 구우며 정착한 마을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 해병대 군종 마티뉴(Edward Martineau) 신부와 한국 해병대 군종 김창석 타대오 신부의 도움으로 1954년 강당이, 1955년 본당이 봉헌됐다.
이 성당이 흥미로운 이유는 화강암 석조 건축이라는 점이다. 명동성당, 약현성당 등 한국의 대표적 근대 성당이 모두 벽돌조인 것과 대비된다. 전쟁 직후 경기 북부에서는 벽돌과 시멘트의 공급망이 끊긴 상태였고, 인근 양주 덕정리 돌산에서 채취한 화강암이 가장 현실적인 자재였다.
기록에 의하면, 신자들이 직접 돌을 운반하고 다듬어 쌓아 올렸다고 한다. 미군 제1군단의 자금과 기술 지원으로 1953년 재건된 의정부성당이 모델이 됐고, 이후 경기 북부 일대에 비슷한 석조 성당들이 잇따라 들어섰다. 갈곡리성당에는 전쟁 직후 한국 사회의 경제·사회적 여건과 한미 협력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한 가치를 인정받아 경기도 등록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됐다.
◇파주향교, 600년을 견딘 조선의 공교육 현장
파주읍 향교말길 안쪽,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파주향교는 1398년(태조 7년)에 처음 세워졌다. 조선 건국 후 6년 만에 지어진 것으로, 새 왕조가 지방 교육 시스템 정비를 우선 과제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향교는 조선의 지방 공립 교육기관이자, 공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결합해 추모의 기능까지 겸한 공간이다.

파주향교의 현재 건물은 한국전쟁 중에 소실된 것을 1971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두고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뒤에 배치한 구조다.
향교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은 세 개의 문, 신삼문(神三門)이다. 문을 셋으로 나눈 이유는 신(神)이 다니는 길과 사람이 다니는 길을 구분하기 위해서다. 가운데 문이 신문(神門)으로, 신이 다니는 길이며 평소에는 항상 닫혀 있다. 봄가을 제향(春秋祭享)이나 매달 초하루와 보름(朔望)에만 열리며, 그것도 제사를 주관하는 헌관(獻官)만이 통과할 수 있다.
양쪽의 두 문은 인문(人門), 즉 사람이 다니는 문으로, 평상시 열어 둬 일반 참배객의 출입을 허용한다. 일반 제관들의 동선도 정해져 있어, 동쪽 문(東門)으로 들어가서 서쪽 문(西門)으로 나오도록 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까다로운 규칙으로 보이지만, 이는 조선 사회의 작동 원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공간을 위계에 따라 나누고, 그 위계를 문(門)이라는 단순한 건축 요소로 가시화하는 방식이다. 향교를 단순히 오래된 건물로만 보지 않고 공간을 통해 가치를 가르치던 교육 장치로 본다면, 신삼문 앞의 짧은 머무름도 그 의미가 달라진다.
파주의 두 장소는 각기 다른 시대의 질문을 품고 있지만, 직접 걸어 들어가 봐야 비로소 그 가치와 무게가 전해진다. 어느 쪽이든 그 공간 안에 직접 서 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김지영 헤리티지포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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