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쫓았으나 난개발은 못 막았다 [초보기자의 거침없이 하이킹]

"호랑이 꼬리를 밟아야 합니다."
한양에 궁궐을 애써 지어 놓으면 밤새 무너져 버리기 여러 차례. 호랑이 형상을 한 괴물이 나타나 궁궐을 무너뜨리고 사라진다는 소문이 돌았다. 절망에 휩싸인 태조 이성계 앞에 한 노인이 나타나 한강 남쪽의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호랑이가 한양을 향해 날뛰는 형상을 하고 있어 궁궐이 바람 잘 날 없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꼬리를 밟히면 꼼짝 못 하는 짐승이니,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입니다."
이튿날 태조는 호암산 끝자락에 절을 지었고, '호압사虎壓寺'라 이름 붙였다.

전해지는 설화의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태조가 호랑이의 기세를 누르고자 절을 세웠다는 점은 일맥상통한다. 호암산은 호랑이를 닮은 산이고, '누를 압'자가 들어간 호압사는 그 호랑이의 기운을 누른다는 뜻이다. 관악산이 불의 형상을 한다는 것도 모자라 그 옆의 호암산마저 호랑이로 보인다니, 지금 시점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그 시대에 풍수지리는 미신을 넘어 통치 체제이자 과학에 가까웠다.
호암산(393m)은 삼성산(481m)의 한 봉우리고, 삼성산은 무너미고개로 관악산(632m)과 이어진다. 따라서 삼성산과 호암산은 관악산의 위성봉으로 보는 게 적합하다. 그럼에도 '봉'이 아닌 '산'으로 불리는 데에는 그만한 별개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번 산행은 관악산 서쪽, 삼성산에서 호암산까지 이어지는 여정이다.

성인聖人의 수행처에서 난개발의 현장으로
"여기는 서울시 대중교통 정기권을 사용할 수 없어요."
당연히 서울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삼성산의 주요 들머리인 관악역은 행정구역이 안양시라고 역무원이 설명한다. 한 정거장 떨어진 석수역도 마찬가지다. 작고 아담한 역을 나서자 예상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빽빽한 빌딩 숲 대신 저 멀리 산자락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여지도서>와 <경기읍지>에 따르면 무학·나옹·지공 세 성인이 정진했다는 삼성산三聖山이다.
지도 앱을 열어 삼성산 일대를 확대하니 숨어 있던 산길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면적 대비 이토록 산길 밀도가 높은 곳이 또 있을까. 산길이 모세혈관처럼 얽혀 있다. 등산로가 많으면 좋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나치게 복잡한 길은 산행의 의욕을 시작부터 꺾는다. 마구잡이로 길이 난 까닭은 법망을 비껴나 있어서다. 국립공원·도립공원·시립공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수도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삼성산과 관악산은 난개발에 휘말렸다. 삼성산이 생명이었다면, 이미 과다출혈로 죽었을지도 모른다.
거미줄 같은 산길 중 학우봉능선을 고른다. 삼성산에는 대표 암릉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석수역에서 출발하는 석수능선, 하나는 관악역에서 출발하는 학우봉능선이다. 농사 부자재 따위가 널브러진 야산 같은 초입을 지난다. 번듯한 국립공원만 다니던 이라면 당황할 법하다. 그러나 시골 야산은 이내 국립공원급으로 바뀐다. 땅 위로 솟아오른 화강암이 눈길을 끌고 반쯤 뿌리를 드러낸 소나무가 저마다의 각도로 몸을 틀고 있다. 사람 손길에 반들반들 닳은 소나무 옹이의 촉감이 좋다.


학우봉 이름의 유래는 명확히 알려진 바 없지만, 그 위용만큼은 관악산 사당능선에 뒤지지 않는다. 늠름히 솟구친 학우봉은 16세기 해상을 제패했던 에스파냐 무적함대의 뱃머리 같기도,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 불리는 지브롤터 절벽 같기도 하다. 이집트 기자 지역에 고고한 자세로 앉아 수수께끼를 던지는 스핑크스도 닮은 듯하다.
땅보다 하늘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봉우리가 이어진다. 고도감이 상당하다. "쿠우우우우- 슈우우우우-"하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동체에 새겨진 'KOREAN AIR'가 눈에 들어온다. 김포공항이 가까워서 비행기가 유독 낮게 난다. 산 아래로는 제2경인과 강남순환 두 고속도로가 터널을 뚫고 위로는 비행기가 5분 간격으로 지나가니, 세 성인이 도를 닦던 고요한 정취는 이제 찾아볼 수 없다.
학우봉에서 삼막사를 지나 삼성산 정상까지 꼬불꼬불한 임도가 나 있다. 관악산 연주대에 질세라 정상에는 통신탑과 구조물이 난립해 있다. 한참을 헤맨 끝에 정상석을 발견한다. 통신탑에 가려 안 보이던 연주대와 국기봉, 경인교대가 눈에 담긴다. 답답했던 속이 뻥 뚫린다.
장군봉능선을 타고 호암산으로 곧장 넘어가도 무방하다. 이 구간은 자칫 길을 잘못 들기 쉬우므로 초행이라면 지도를 틈틈이 확인해야 한다. 호암산으로 접어들면 산세 변화가 느껴진다. 육중한 바위가 잠시 물러나고 흙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산의 겨드랑이까지 파고든 주택가
호암산 정상에 이르자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음성들이 4중주로 겹쳐 들려온다. 한국어, 영어, 염불 소리도 아니다. '외계인이 우주선과 주고받는 신호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품고 풀숲을 헤치자 기도에 몰입 중인 네댓 명의 무리가 나타난다. 정체를 묻자 OO교회에서 왔다고 답한다. 터가 좋은 것인지, 평일 낮의 정상은 기도터로도 쓰이고 있었다.
외계어를 배경음 삼아 데크전망대에 선다. 금천구와 관악구가 볼록렌즈를 댄 듯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요즘 기 받으러 관악산에 갔다가, 정작 사람에 치여 기 빨리고 왔다는 웃지 못할 후기가 많다. 굳이 인파 속에서 스트레스 받을 필요 있을까.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화기火氣 대신, 바로 옆 호암산 정상에선 호랑이 기운을 독차지할 수 있다.

다만 날씨가 따라주지 않는다. 호연지기를 떨쳐보려 애쓰지만 미세먼지를 뚫기엔 역부족이다. 봄철 미세먼지 앞에서 한양을 삼킨다던 호랑이 기운도 속수무책이다.
마당바위를 지나 호압사로 내려간다. 관악산 못지않게 호암산은 지형의 결함을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비보裨補풍수'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산이다. 산이 없어 허한 곳에 흙과 돌을 쌓고 물이 필요한 곳에는 연못을 파는 비보풍수는, 구시대 풍습 같지만 사실 가구 배치 하나에도 신경 쓰는 우리의 일상과 닿아 있다. 호압사 탱화에는 창건설화와 관련해 호랑이가 그려져 있고, 인근에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고자 조성한 한우물과 석구상이 남아 있다.

대부분 호압사에서 석수역이나 서울대 방면으로 내려가지만,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독산동 방향을 택한다. 지도를 보면 북서쪽으로 호랑이 꼬리를 닮은 길고 가느다란 능선이 이어진다. 도시가 산을 파고 든 건지, 산이 도시를 파고 든 건지 분간하기 어렵다. 최근 10년간 본지에서 호암산을 세 차례 다룰 동안, 한 번도 소개되지 않은 길이라 답사 정신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 능선을 타는 기분은 묘하다. 산의 고도는 낮아질 만큼 낮아져서 시선은 건물 높이와 같아진다. 둑처럼 얇디얇은 산줄기 양옆으로 주택가가 산의 겨드랑이까지 바짝 파고든다. 산 위에 자리 잡은 아파트와 주택은 꽤 봤어도, 등고선의 가장 안쪽까지 들어선 풍경은 생경하다. '독산자락길'이라 불리는 이 산길은 호압사부터 독산자연공원까지 약 5km 이어지며, 동네 주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된다.


13km 산길은 안양에서 시작해 서울에서 끝난다. 지하철로는 다섯 정거장. 10분 남짓한 거리지만 굳이 산길을 걸었다. 화강암 능선과 호랑이 설화 그리고 난개발의 현장을 한 번에 만나고 싶었기에.


삼성산 정상, 숨바꼭질은 이제 그만!
삼성산 정상을 놓치고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임도 끝에 이르면 오른쪽 주황색 계단으로 올라, 회색 컨테이너 건물을 둘러싼 펜스를 끼고 시계 반대 방향(왼쪽)으로 돌면 정상석이 있다.

산행길잡이
삼성산과 호암산의 등산로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이정표와 지도를 살피며 산행하는 것이 좋다. 관악역 2번 출구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 삼성초등학교와 교회가 보인다. 오른쪽 방향으로 동물병원, 사우나, 카페를 차례로 지나면 삼성산 들머리 계단이 나타난다. 이곳에 화장실이 있어 출발 전 들르기 좋다. 무덤을 지나 능선길을 걷다보면 학우봉 방향으로 거대한 암릉이 펼쳐진다. 학우봉 능선에는 위험한 바위 구간이 많아 주의가 필요하다. 접지력 좋은 등산화를 착용하고, 초보자라면 무리해서 바위를 넘기보다 우회로를 이용하는 편이 안전하다. 삼막사와 삼성산 정상 구간은 길이 복잡하고 임도까지 교차해 자칫 헷갈릴 수 있다. 이곳에서 무너미고개를 거쳐 관악산으로 넘어갈 수 있으며, 통신탑이 들어선 정상보다 조망이 더 좋은 국기봉이 사실상 정상 역할을 한다.
삼성산에서 호암산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장군봉능선이라 불린다. 다만 장군봉 자체는 능선 이름과 달리 특징이 없으며, 능선의 암질이나 조망도 학우봉능선보다 빼어나지 않다.
특히 암봉에 눈길이 쏠려 갈림길에서 호암산 방면 왼쪽 길을 놓치고 오른쪽으로 빠지지 쉬우니 주의해야 한다. 장군봉을 지나 오른쪽 샛길로 빠지면 호암산 정상에 닿는다. 널찍한 바위봉우리 앞으로 데크전망대가 조성돼 있어서 관악구와 금천구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다시 샛길을 내려와 풍화된 화강암 지대를 지나면 호압사가 나타난다. 소나무 아래로 벤치가 있어 쉬어가기 좋다. 이후에는 낮고 긴 능선 따라 목골산을 지나 독산자연공원까지 이어진다.
교통
삼성산의 대표 암릉인 석수능선을 타려면 석수역, 학우봉능선을 타려면 관악역에서 출발한다. 관악역에서 안양예술공원(안양유원지)이나 서울대 안양수목원까지 30분 정도 걸어서 삼성산의 남사면 산행도 가능하다.
삼성산 북쪽으로 하산하면 신림선 관악산역이나 서울대벤처타운역을 이용할 수 있고, 호암산 능선을 따라 북서쪽으로 하산하면 구로디지털단지역·독산역·금천구청역 등이 가깝다. 버스 노선도 다양해 대중교통 접근성은 좋은 편이다.
맛집(지역번호 031)
관악역 삼성초등학교 옆에 있는 착한김밥집(474-3030)은 삼성산 산행 전 김밥을 사기 좋은 곳이다. 참치를 재료로 한 김밥이 인기이며, 포장이 깔끔하다. 라면·떡볶이·어묵탕 등 분식류도 판매한다. 기본김밥(3,800원), 참치김밥(4,500원), 묵은지참치김밥·청양마요참치김밥 (5,000원).
관악역과 경인교대 사이 삼막로를 따라 식당들이 모여 있다. 추오정남원추어탕(472-1977)은 100% 국내산 미꾸라지로 매일 직접 끓여 깊고 진한 국물맛이 특징이다. 샐러드바를 이용할 수 있고, 추어탕+인삼튀김+오리고기+간장게장으로 구성된 정식 메뉴도 인기다. 추어탕(1만3,000원), 추어탕정식(2만 원), 인삼튀김(2만 원), 미꾸리튀김(1만6,000원).
독산동 독산숯불갈비(010-7929-0429)는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양의 갈비를 즐길 수 있는 식당이다. 부위는 목전지에 가깝지만 달콤한 양념이 고기에 잘 배어 있어 식사와 술안주 모두 잘 어울린다. 돼지갈비 600g(2만7,000원), 돼지갈비 200g(1만 원), 삼겹살 200g(1만 2,000원).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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