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알았네, 그대가 나임을…" 그림 같은 글씨를 절에 건 까닭
템플스테이 건물 기둥에 연기설 가르침 서예 작품
불전 안엔 지리산 담은 후불탱화·LED 광배 전시
도법 스님 "풍경과 어울리고 세상 고민 품는 불사"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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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미안해 미안해. 이제 알았네, 그대가 나임을. 고마워 고마워.
지난달 19일, 전북 남원시 실상사의 템플스테이 공간인 휴휴당 건물에는 매우 독특한 주련(여러 기둥에 세로로 연이어 건 문구)이 걸렸다. 겉보기에는 한자처럼 보이는데 담은 내용은 한글이다. 실상사 회주인 도법 스님이 불교의 핵심사상인 '모두가 연결돼 있음(연기법)'을 쉽게 풀어 만든 노랫말이다. 6개 주련에 거울문자 형태로 표현돼 얼른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내용을 알고 나면 쉬이 읽힌다.

이 주련은 실상사에서 진행 중인 '문자반야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예가 다천 김종원이 그리고 국가무형유산 각자장 김각한이 판으로 깎은 것이다. 문자반야프로젝트란, 사찰에 달린 문자들을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알리자는 뜻으로 실상사가 진행해 온 '문화불사'를 말한다. 사찰 주련을 한자 대신 한글로 바꿔 적는 사례는 최근 늘어나고 있지만, 실상사처럼 독창적 서체를 쓴 건 또 다른 파격이다.
이날 열린 주련 모심 법회에 참석한 김종원은 그림과 글이 하나라는 서화동체(書畵同體) 정신에 맞춰, 한글 글자를 한자처럼 좌우 대칭으로 '그렸다'고 설명했다. "회주(도법) 스님의 뜻이 '네가 나인 것'이니, 한글을 한자 문자처럼 서로 마주 보는 거울 같은 모습으로 연출했습니다." 보는 이들이 읽기 힘들어하지 않느냐는 말엔 "문자 자체만으로 전달하기 어려운 의미를 새로운 상(像)을 세워 전달해보려 했다"면서 "어렵게 아는 즐거움의 경지, 그게 곧 반야(깨달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828년 신라 흥덕왕 때 창건돼 1,200년의 역사를 품은 실상사가 현대 서예를 비롯해 미술 작품을 절 안으로 적극 끌어들인 건 10년이 넘었다. 실상사를 '생명평화운동'의 요람으로 삼고 전통과 현대를, 예술과 불교를 하나로 잇자는 도법 스님의 뜻에 공감한 예술가와 기획자들이 절을 무대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실상사 주지 운묵 스님은 "불교의 언어와 형상, 정신이 오늘 시대 속에 어떻게 살아 숨 쉴 수 있는지를 묻는 시도"라면서 "전통을 지키되 갇히지 않고, 새로움을 받아들이되 본질을 잃지 않으려는 도법 스님의 열린 사유와 실천의 정신이 있기에 (문화불사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2021년 시작한 문자반야프로젝트의 대표적 결과물은 실상사 입구인 천왕문에 달린 주련이다. 타이포그래피 작가 안상수의 글씨로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라'라고 적혀 있다. 복합문화공간 건물 '선재집'의 현판은 서양화가 오수환이 썼다.
문자반야프로젝트에 앞서 2014년 시작한 '지리산프로젝트'의 흔적도 곳곳에 있다. 옛 목탑이 있던 자리에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조각가 김성복을 중심으로 모인 성신석조각연구회가 세운 돌솟대가 있다. 탑자리 바로 옆엔 장영철의 '생명평화기도소'가 섰다. 세월호 침몰 사건의 희생자 304명의 안식을 기원하고자 대나무 부재 304개로 만든 추모 공간이다.


파격은 불전 안에도 있다.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의 불상 뒤편 그림(후불탱화)은 자연 속 절 풍경을 그려 온 한국화가 이호신이 맡아 2015년에 조성했다.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이란 제목이 달린 그림은 지리산과 남원 함양 산청 구례 하동에 걸친 주변 풍경을 배경 삼아, 지리산 마고할매와 실상사 역사를 증명하는 철조여래좌상을 양쪽에 나란히 그렸다. 이상세계 속 부처와 제자들의 모습을 담아 온 불화의 법칙을 깬 것이다. 극락전에는 설치미술작가 김기라가 2014년 아미타불좌상 뒤쪽에 발광다이오드(LED)로 만들어 단 광배(부처님 몸에서 나오는 깨달음의 빛)가 여전히 빛을 내고 있다.


사찰이 현대미술 전시 무대가 된 사례는 여럿 있다. 인천 강화군 전등사에서 2012년 세운 무설전은 안에 전시공간 서운갤러리를 마련했다. 광주 무각사 내 로터스갤러리도 광주비엔날레의 주요 전시장으로 쓰일 정도로 유명하다. 다만 실상사의 실험은 새 건물을 짓는 것을 넘어 옛 건물에 현대 작품을 넣기까지 한다는 면에서 특별하게 여겨진다.
이 모든 법석의 중심에 선 도법 스님은 오히려 자신이 예술가들의 제안을 받는 입장이라고 했다. "지금의 실상사는 역사가 만들어낸 풍경이고, 새로운 불사를 하더라도 그 풍경에 어울리게 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나는 거기에 공감해서 맞춘 거죠." 2009년 불교와 문화계 전문가들이 모여, 겉만 화려한 대형 불사를 지양하고 공동체를 살리는 생태적인 사찰 공간을 만들자는 뜻으로 '불사십조'를 선포한 곳이 바로 실상사다.
도법 스님 스스로 가장 좋았던 것도 풍경과 어울리고 공동체를 배려하는 불사라고 했다. 그가 꼽은 설치미술가 정재철의 '나한도-부분'은 절 안에 흩어진 큰 돌을 모아 마련한 쉼터다. 수행자나 방문객이 돌 위에 앉았을 때 나한도가 비로소 완성된다는 의미가 담겼다. 이날 법회에 앞서서도 실상사 마야합창단이 이 자리에서 축가로 깨달음의 노래를 연습했다.

실상사가 파격 불사를 이어가는 이유를 묻자 도법 스님은 "방문객들이 역사와 문화를 만나러 오더라도 불교 자체를 만나지는 못했다"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법당 밖으로 꺼내고, 더 나아가 절 전체를 하나의 법당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힙불교'의 미학과 명상에 매료된 청년 세대에 불교가 품은 뜻을 더 깊게 전하려는 오늘날 불교계의 고민을 도법 스님은 일찍부터 열었던 것이다.
주련 제막을 마친 날에도 도법 스님은 세상 고민을 실상사 경내에 품을 새 '작품'을 벌써 고민하고 있었다. "세상에 전쟁 소식이 많으니 지금이야말로 평화를 얘기해야 할 때"라면서 "실상사의 두 석탑 사이에 촛불을 밝히고 기도할 수 있는 '생명평화 국민기도단'을 마련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원=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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