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까지 고려한 기술이 첨단" 가르친 천재 공학자, 그 뜻 따라 10억원 기부한 제자

송옥진 2026. 5. 15.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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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 교수 가현욱·학생 정인서의 '사제동행'
포용적 인공지능(AI)을 연구하는 가현욱(오른쪽) 카이스트 교수와 정인서 학생이 11일 대전 유성구 카이스트 본원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대전=하상윤 기자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재학생 정인서씨는 최근 창업 수익 10억 원을 학교에 기부했다. "기술의 빈틈을 채워달라"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포용적 인공지능(AI) 연구를 하는 대학원 학위과정을 마련하는 데 써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큰 결심을 한 데는 "진심으로 연구하는 법을 배운 선생님의 영향"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 스승은 가현욱 카이스트 융합인재학부 교수다. 중도장애인이 아닌 선천적 시각장애인으로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공학 박사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자 스마트 휠체어,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합성 기술(TTS), 뇌병변 장애인을 위한 전화 통화 시스템, 와상 환자를 위한 재활 로봇 등 수많은 포용적 기술을 개발한 천재 공학자다. 가 교수도 질세라 얼마 전 완성된 차세대 점자 번역 엔진을 기술사용료를 받지 않고 기부했다. '사제동행(師弟同行)'이란 말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을 11일 대전 카이스트 캠퍼스에서 만났다.


"첨단에는 좌우도 있다"

어떤 물체의 뾰족한 끝. 공학에도 '추구미'(이상적인 모습이나 스타일)가 있다면 아마 '첨단'(尖端)이 아닐까. 그러나 가 교수는 강단에 서서 첨단만 추구하는 기술은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소외시킨다고 강조해 왔다. 공학자인 동시에 장애 당사자로서 자주 기술 접근 격차나 기술 활용 격차를 느끼기 때문이다.

"문서나 그림을 카메라로 찍으면 말로 설명해주는 시각보조기구 인공지능이 있어요. 그럼 사람들이 나이브(순진)하게 시각장애인도 이제 그림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은 정작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모르는 거예요. 제대로 찍었는지 확인도 못 하고요. '문서 오른쪽 끝이 잘렸어요' '아랫부분이 안 보여요'라고 알려줘야 되는데 거기까지 생각을 못 하는 거죠."

선천적 시각장애인인 가현욱 교수는 가난 탓에 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황하다 27세에 늦깎이 대학생이 됐다. 대학교 2학년 때 컴퓨터공학을 복수전공으로 택하며 공학자의 길에 들어섰고 각고의 노력 끝에 졸업해 2009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재활공학과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있다가 2019년 고국으로 돌아와 카이스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전=하상윤 기자

기술뿐 아니라 장애인 정책도 정교함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다. 공공건물 입구의 점자 팻말만 해도 시각장애인은 팻말이 상하좌우 어디에 붙어 있는지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더듬어야 할 때가 많다. 가 교수도 과거 문 앞에서 팻말을 더듬어 찾다 문이 닫혀 손톱이 빠진 적이 있다. 점자 유도 블록도 점은 멈추고, 선은 계속 가라는 두 가지 정보만 줄 뿐 왜 멈추라 하는지,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무엇이 나오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인공지능 개발 과정에서 소수자 데이터를 배제하는 것도 기술 격차를 키우는 주요 요인이다. "음성인식 기술(STT)만 해도 뇌병변 환자나 고령자처럼 어눌하게 말하면 못 알아듣거든요. 애초에 음성 수백만, 수천만 개를 집어 넣어 학습시킬 때 정규 분포 곡선 양 끝단에 있는 5%는 뺍니다. 그것까지 포함시키면 성능이 떨어지니까요. 그런데 만약 모든 인터페이스가 음성인식으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만 해도 예전엔 지하철에 가면 매표소가 있었어요. 귀를 쫑긋 세워서 동전 같은 게 옮겨다니는 소리를 듣고 매표소를 찾았거든요. 그런데 이제 다 무인으로, 터치로 바뀌었잖아요. 저 같은 사람은 살기가 더 힘들죠."

당장은 소수자를 제외한 기술 개발이 효율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기술 혁신은 종국에 그 5%를 포함시키고자 할 때 이뤄진다는 게 가 교수의 생각이다. '포용적 기술'을 윤리적 차원으로만 접근할 게 아니라는 얘기다.

가 교수는 "극한이란 공간을 다르게 표현하면 장애를 가진 공간"이라며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리고,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 있는, 이 끝단의 사람들을 고려한 기술이 결국 첨단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율주행, 인공지능도 재활공학에서 20년, 30년 전부터 나온 아이디어가 발전된 것이다. "첨단에는 높이와 깊이만 있는 게 아니라 좌우도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씨가 마음에 새기는 가 교수의 철학과 가르침이기도 한다. "교수님은 기술엔 첨단성이 있는데, 포용성을 개발하면 그 기술이 경험의 확장으로 이어져 모두가 편리해지는 보편적 기술로 발전될 수 있다고 항상 강조하신다"고 말했다.

정인서(가운데) 카이스트 융합인재학부 학생이 3월 모교에 포용적 인공지능(AI) 기술 석·박사 프로그램 설립을 위한 발전기금을 기부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씨는 전 세계 40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글로벌 디지털 악보 플랫폼 '엠피에이지(MPAG)'의 창업자이자 대표이기도 하다. 카이스트 제공
가현욱(왼쪽) 카이스트 교수와 정인서 학생이 11일 대전 유성구 카이스트 본원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대전=하상윤 기자

스승의 가르침은 흘러, 흘러, 흘러...

두 사람이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은 건 4년 전 가 교수의 수업에서였다. 정씨가 과제로 청각장애인을 위한 음성인식 기술을 제출한 게 발단이 됐다. 수어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은 일반인보다 사용하는 언어량이 10분의 1 수준으로 적다는 점에 착안해 음성을 문자로 단순 변환하지 않고 이용자 어휘량에 맞게 자동 조절하는 기술이었다. 가 교수는 "인서가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사각지대)을 잘 찾는다"며 "제 관심사다 보니까 잔소리를 많이 하게 됐다"고 웃었다. 해당 기술은 현재 특허 출원 중이다. 잔소리의 탈을 쓴 관심이 싫지 않았는지 물리학과였던 정씨는 이후 가 교수가 있는 융합인재학부로 과를 옮겼다.

연구자뿐만 아니라 스승으로서도 가 교수는 엄격한 구석이 있다. 정씨가 "교수님은 학부생에게도 대학원생 이상의 목표를 요구하신다"고 하자 옆에서 듣던 가 교수도 "좋게 이야기하면 기대가 높고 나쁘게 말하면 좀 까다롭다"고 인정했다. 그는 "학생에게 종강 때까지 '이만하면 됐다'라는 얘기를 안 한다"며 "너무 잘하는 학생을 만나면 '너는 학기 끝나고 방학 때 논문 쓰자' 아니면 '그거 가지고 특허 내자'고 말한다"고 했다. 그는 "지식을 주는 건 저보다 인공지능이 더 잘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어리고 말랑말랑할 때, 최대한 경계와 한계를 넓히도록 도와주는 게 내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가 교수가 좋아하는 영어 표현 중 하나가 'Pay it forward'다. 내가 받은 도움을 남에게 이어 베푼다는 뜻이다. "번역하면 흘려보내라 정도 될까요. 내가 빚을 갚지는 못해도 흘려보내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그 빚에는 전공서적을 16개로 쪼개서 각자 오디오북으로 만들어주던 친구들과 그가 수업을 들으면 판서를 자제하고 유난히 말을 많이 하던 스승들이 있다.

정씨는 '기부할 때 아깝지 않더냐'는 우문에 "돈이 재테크로 흘러가면 숫자로 남는데 대학원으로 흘러가면 지속적인 해결책으로 바뀔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며 "수익률로 치면 이것도 꽤 높고 가치 있는 투자"라고 대답했다. 스승의 가르침은 제자에게로, 또 다른 후학에게로 흘러가는 중이다.

대전= 송옥진 기자 cli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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