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통에 하늘길 대혼란, 우회항로 ‘에어잼’ 심각[이규화의 지리각각]
코카서스와 아라비아해 좁은 회랑에 운항 집중
유럽 관제당국 “일부 항공관제 부하, 위험수위”
러, 서방 항공사에 영공 폐쇄, 중‧인도엔 개방
中항공사들 어부지리…“지정학이 경쟁력 좌우”

세계 항공업계가 ‘대혼란’을 겪고 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영공폐쇄 사태에 이어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對)이란 공습 이후 이란·이스라엘·시리아·이라크 일대 상공까지 사실상 비행 위험공역으로 변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항공로가 연쇄적으로 장벽이 쳐졌기 때문이다.
항공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우회 항로를 찾아 나섰지만 여의치 않다. 코카서스와 중앙아시아, 아라비아 남부 하늘길에 전 세계 항공기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에어잼’(공중 트래픽 잼)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와 유럽항공항법안전기구(Eurocontrol), 항공 데이터업체 OAG 등에 따르면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와 이란 등 중동 영공 폐쇄에 따라 현재 국제 항공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우회 경로는 크게 두 축이다. 하나는 터키·아제르바이잔·카자흐스탄으로 이어지는 ‘코카서스 회랑’이고, 다른 하나는 사우디아라비아 남부와 오만 영공을 거쳐 아라비아해로 빠지는 ‘남부 아라비아 항로’다.
문제는 러시아 북부 하늘길과 이란 남부 하늘길이 동시에 막히면서 이 좁은 회랑들에 유럽·아시아 항공편이 대거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 관제 당국은 “이미 중앙아시아 일부 구간의 항공관제 부하가 위험 수위에 접근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루프트한자, 에어프랑스 등 러시아 영공을 사용할 수 없는 항공사들은 서울·도쿄·파리·런던을 오가는 노선에서 기존보다 2~4시간 긴 우회 항로를 이용하고 있다. 과거 인천~파리 노선은 러시아 시베리아 상공을 직선으로 가로질렀지만, 지금은 중국 서부를 지나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카스피해·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향한다. 여기에 이란 전쟁 이후에는 이란 북부조차 위험구역으로 간주되면서 항공기들이 카스피해 서쪽의 좁은 공역에 더욱 몰리고 있다. 런던~델리 노선 역시 과거 이란·아프가니스탄 상공을 통과했지만 현재는 사우디와 아라비아해를 크게 우회 중이다.
반면 중국 및 인도와 일부 중동 국가 항공사들은 러시아 영공을 여전히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압도적인 경쟁 우위를 누리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유럽·한국·일본 등 자국 제재에 참여한 ‘비우호국’ 항공사들에는 영공을 폐쇄했지만, 중국·인도·아랍에미리트(UAE)처럼 제재에 동참하지 않은 국가 항공사들에는 시베리아 항로를 계속 개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 항공사들은 유럽 노선에서 비행시간을 2~3시간 줄일 수 있고, 연료비도 크게 절약한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 3월 OAG 자료를 인용해 “중국 항공사들이 올해 하계 시즌 중국~유럽 노선을 전년보다 2891편 늘릴 예정”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중국 항공사 에어차이나는 1120편, 중국남방항공은 839편, 중국동방항공은 654편을 각각 증편한다. 유럽과 한국, 일본 항공사들이 긴 우회 항로와 연료비 부담으로 노선을 줄이는 사이, 중국 항공사들이 그 공백을 빠르게 메우고 있다는 분석이다. SCMP는 특히 “중동 전쟁으로 중동 상공이 폐쇄됐지만 중국 항공사들은 러시아 항로를 이용할 수 있어 충격이 상대적으로 작다”고 전했다.
항공유 가격 급등 상황도 심각하다. 항공정보업체 시리움(Cirium)에 따르면 5월 전 세계 예정 항공편 가운데 약 1만3000편이 취소됐다. 항공유 가격은 이란 전쟁 이전 대비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 항공유는 원래도 항공사 운영비의 30~40%를 차지하는 핵심 비용인데, 지금은 가격 상승에 더해 공급 자체까지 불안정해졌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이어지면서 세계 항공사들은 연료 확보 경쟁까지 벌이고 있다. 일부 항공사는 급유 문제 때문에 중간 기착지까지 변경하는 상황이다.
결국 러시아 영공을 쓰지 못하는 한국·일본·유럽 항공사들은 ‘삼중고’를 겪고 있다. 첫째는 비행시간 증가, 둘째는 항공유 폭등, 셋째는 항공기 회전율 저하다. 비행시간이 길어질수록 조종사 교대와 승무원 체류 비용까지 늘어난다. 반면 러시아 영공을 통과하는 중국·인도 항공사들은 더 짧은 시간과 더 적은 연료로 운항하며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유럽 항공업계는 이를 두고 “지정학이 항공시장 경쟁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사실 지정학적 영공 차별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도 한국 항공업계는 북한 공역 문제로 비슷한 경험을 했다. 현재는 한-러 간 운항이 중단된 상태지만, 과거 러시아 국적 항공사인 아에로플로트는 인천~블라디보스토크 노선에서 북한이 관할하는 평양 비행정보구역(FIR)을 통과해 동해상 직선 항로를 사용할 수 있었다. 반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 시행된 5·24 조치로 북한 공역을 이용하지 못해 일본 방향으로 크게 우회해야 했다. 러시아 항공사는 2시간 이내에 도착했지만 한국 항공사는 3시간 가까이 걸렸다. 당시에도 항공업계에서는 “지정학이 항공권 가격과 경쟁력을 결정한다”는 말이 나왔다.
지금 세계 하늘길은 그때보다 훨씬 복잡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란과 이스라엘, 시리아와 이라크 상공이 연쇄적으로 닫히면서 유라시아 하늘의 북부 대부분과 서남부에 거대한 공백지대가 생겼다. 전 세계 많은 항공기들은 그 두 공백 사이의 좁은 코카서스와 그 남쪽 아라비아 항로에 몰려들고 있다. 냉전 시절 군사전략의 영역이던 영공 통제가 이제는 민간 항공사의 생존과 글로벌 물류, 관광산업, 개별 항공권 가격까지 좌우하는 시대가 된 셈이다.
이규화 기자 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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