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트로터와 함께… 여성 작가 11명을 조명하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루이스 트로터 단독 인터뷰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전시장에 들어서면, 1956년 일본 작가 야마자키 츠루코가 만들었던 붉은 모기장 형태의 구조물, 주디 시카고의 깃털로 가득 찬 방, 그리고 1970년 당시 ‘정치 선동’이라는 이유로 전시 개막 사흘 만에 강제 철거당했던 한국 아방가르드 작가 정강자의 ‘무체전(無體展)’이 50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다시 호흡한다. 보고, 만지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비로소 완성. 오늘 우리가 ‘설치 미술’ 혹은 ‘인터랙티브 아트’라 부르는 장르의 원형이,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지워졌던 여성 작가들의 손끝에서 시작되었음을 증언하는 자리다. 전시 ‘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은 2023년 뮌헨 하우스 데어 쿤스트에서 처음 선보인 뒤 밀라노 MUDEC, 로마 MAXXI, 홍콩 M+를 거쳐 오는 11월 29일까지 리움미술관에서 전 세계 관객을 맞는다. 안드레아 리소니(Haus der Kunst 예술감독)와 마리나 푸글리에세(MUDEC 관장)가 4년에 걸친 아카이브 조사 끝에 큐레이션한 이번 전시는 야마자키 츠루코, 주디 시카고, 리지아 클라크, 라우라 그리시, 알렉산드라 카수바, 정강자, 마르타 미누힌, 타니아 무로, 난다 비고, 마리안 자질라 등 11인의 작품을 정밀하게 복원했다.

서울 리움미술관에서의 전시는 두 큐레이터가 “지금까지 가장 완성도 높은 버전”이라 말했듯, 한국 작가 정강자, 그리고 마리안 자질라·라 몬테 영·최정희가 함께 만든 ‘드림 하우스’까지 더해 가장 두꺼운 서사를 갖춘 전시로 승화했다. 보테가 베네타와 리움미술관과의 협업은 이번이 세번 째.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루이스 트로터가 직접 한국을 찾았다. 영국 선덜랜드에서 태어나 조셉, 라코스테, 카르벵에서 각 하우스의 코드를 새로 써낸 그녀는 지난해 1월 보테가 베네타에 합류했다. 지난 1~2년 사이 글로벌 럭셔리 업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대이동’ 속에서 그녀는 메이저 하우스를 이끄는 드문 여성이기도 하다.
경계를 허문 현장, 지금의 서울을 체감하다.
지난해 9월 2026 봄여름 데뷔 컬렉션과 지난 2월 두번째 컬렉션을 통해 그녀가 그려가는 새로운 보테가 베네타의 윤곽이 더욱 또렷해지는 시기, 리움미술관 전시 오프닝에 맞춰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그녀와 일간지로는 단독으로 1대1로 마주했다. 한국 방문은 처음이지만 서울이 그녀에게 아주 낯선 것은 아니다. 동료는 물론 자신의 아이들을 통해 한국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싱그럽게 웃는 모습 속 예리한 눈빛은 서울의 모든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겠다는 신호로 들린다.

-서울에서 시간을 보낼 기회가 있으셨나요? 더 넓은 문화적 맥락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어떻게 인식하시는지, 그리고 이 전시를 지원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무엇을 가장 기대하시나요?
“이번이 첫 방문이고 오늘이 이틀째입니다. 동료들과 아이들에게 서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꼭 오고 싶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개인적으로 지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도시를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저에게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한국은 보테가 베네타에게 매우 중요한 지표입니다. 그래서 거리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서울에서 보테가 베네타와 어떻게 함께하는지 직접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어제 도착했지만 벌써 지역 예술가들과 제작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최근 이탈리아 밀라노 가구 박람회(살로네 델 모빌레·Salone del Mobile)에서 함께 세 번째 프로젝트를 진행한 한국 예술가 이광호 작가와도 다시 연결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테가 베네타가 1956년부터 1976년 사이 여성 예술가들의 공간과 환경에 공명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후원을 넘어선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의 어떤 면에 가장 먼저 마음이 움직이셨나요?
“우선 20년에 걸친 이 전시가, 당시 경계를 허물며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스템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 예술가들을 한데 모은 독보적인 큐레이션이라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예술가들은 목소리를 낼 자격이 있고, 그들의 작품이 세상에 보여져야 하며, 그들의 서사가 미술사에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는 매우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흥미로운 점은 이 전시가 이곳 서울 커뮤니티에 미칠 깊은 영향력입니다.”

‘만드는 행위의 예술’을 조명하다.
-이번 전시는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간과되었던 여성 예술가들의 감성과 실험적 실천을 재조명하며, 그들의 ‘환경 작품’에 대한 첫번째 평가를 제공합니다. 오늘날 패션계를 이끄는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중 한 분이 이끄는 하우스에서 이 이니셔티브를 지원한다는 점이 상징적으로 다가옵니다. 여성들의 선구적인 공헌을 앞세우는 작업에 개인적인 유대감을 느끼시나요? 오늘날 패션 산업이 이러한 재조명에 어떻게 반응하거나 공명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우선, 이 여성 예술가들을 하나의 큐레이션으로 묶어낸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개별적인 것보다 ‘집합체(collective)’로서 모였을 때 더 크고 위대한 것을 조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성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너무나 자주 봅니다. 오늘날 패션 하우스를 이끄는 몇 안 되는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중 한 명으로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우리 모두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성의 목소리가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떤 정체성을 가졌든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보테가 베네타 내에서 ‘창의성(creative)’과 ‘창조(creation)’가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화적 이니셔티브를 선택하는 당신의 접근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만드는 행위의 예술(art of making)‘은 우리가 지원하는 모든 선택과 이니셔티브의 핵심입니다. 이는 수공예와 예술을 아우르는 다차원적인 것입니다. 보테가 베네타에게 중요한 점 중 하나는 이미 정평이 난 거장들뿐만 아니라 덜 알려진 예술가들도 지원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자신의 플랫폼을 사용해 타인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논의하는 예술가들의 경우, 당시 예술로 수용되던 일반적인 틀 밖에서 광범위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보테가 베네타에게 매우 자극이 되며, 우리 역사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는 보테가 베네타 가치의 핵심과 맞닿아 있습니다.”
-당신은 수공예, 자신감, 편안함과 같은 가치를 지속적으로 강조해 오셨는데, 보테가 베네타의 문화 후원 방식이 다른 곳과 차별화되는 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우선 우리 자신이 ‘만드는 사람들(makers)’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협업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이 곧 우리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발성이 아닌 장기적인 협업과 관계를 중시합니다. 리움미술관과는 벌써 세 번째 협업입니다. 우리는 이 기관과 그 가치, 그리고 이곳 커뮤니티에 기여하는 바를 믿습니다. 문화를 유지하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협업의 일부가 되어 그 논의의 중심에 있고 싶어 하며, 항상 수공예와 연결된 예술가들을 큐레이션하는 데 집중합니다.”
루이스 트로터의 보테가 베네타가 인상적인 것은, 이 두 ‘집합체’를 같은 자리에서 같은 무게로 들어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을 패션계 ‘드문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중 한 명’으로 호명하면서도, 그 자리에 머무르는 대신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로 옆자리를 끌어당긴다. ‘만드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자신의 작업을 위치시킨다. 이것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로 좁히기보다, ‘개척’과 ‘선도’라는 더 본질적인 단어로 읽혀야 하는 태도다. 이번 리움미술관 전시가 ‘여성 작가전’이 아닌 ‘여성 작가들이 만든 새 장르의 첫 번째 평가’인 것과 같은 결에서.
비범한 사람들과 ‘평범한 일상’을 엮어내다.


지난해 9월 밀라노에서 공개된 2026 여름 데뷔 컬렉션은, 그녀 스스로 밝힌 대로 ‘시작점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보테가 베네타 창립자 렌초 젠지아로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편,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하우스의 첫 여성 크리에이티브 리드이자 한때 앤디 워홀의 ‘팩토리’ 멤버였던 로라 브래기언의 자취를 좇았다.
‘베네치아의 화려함, 뉴욕의 에너지, 밀라노의 본질주의’를 키워드로 삼은 컬렉션의 정서는 ‘해방(liberation)’이었다. 그녀는 보테가 베네타의 또 다른 ‘로고’나 마찬가지인 상징적인 짜임 기법 ‘인트레치아토’의 원형을 복원하고 생명을 불어넣어 컬렉션 곳곳에 새 호흡을 불어넣었다. 어깨를 강조한 인트레치아토 가죽 코트,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가죽 가닥으로 짠 플로어 렝스 케이프, 단추 대신 토마스 마이어 시대의 ‘놋(Knot) 클러치’ 매듭을 차용한 피코트 칼라, 그리고 재활용 파이버글라스로 만들어 빛에 따라 일렁이는 컬러풀한 니트와 스커트. 가죽이라는 ‘올드’한 소재를 ‘가볍고, 견고하고,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데뷔는, 글로벌 패션계에서 “쇼맨십을 걷어내고 본질로 돌아온 진짜 첫 컬렉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 2월 말 공개된 두 번째 컬렉션인 2026 겨울쇼는 이탈리아 밀라노 두오모와 라 스칼라 사이에 자리한 보테가 베네타 본사 ‘팔라초 산 페델레’에서 열렸다. 한 해 동안 밀라노에 살며 그녀가 발견한 도시의 얼굴, ‘브루탈리즘과 관능 사이의 대화’가 주제였다.

마리아 칼라스와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라는 이탈리아 문화의 두 영혼을 여성성과 남성성의 안내자로 삼은 그녀는, 정교하게 깎아낸 어깨와 잘록한 허리의 곡선형 테일러링으로 컬렉션을 열고, 후반부에는 2000개 이상의 손재단한 작은 가죽 조각으로 만든 스윙 코트, 실크 프린지 드레스, 재활용 합성 섬유로 제작한 코트로 막을 내렸다. 소재 자체의 질감을 되살려내는 일은, 그녀가 외신을 통해 밝힌 표현대로 ‘친밀함이자 보호(intimacy as much as protection)’의 연구였다. 격자무늬가 새겨진 인트레치아토 트렌치코트 등이 새 컬러로 돌아온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는 단발성 트렌드가 아니라, 그녀가 보테가 베네타에 정착시키려는 ‘시그니처 라이브러리’의 시작이자 루이스 트로터가 펼쳐갈 새로운 보테가 베네타의 지평을 열어주는 장치다.

-보테가 베네타는 항상 장인 정신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도 감각적인 터치, 장인 정신을 볼 수 있는데요. 당신이 보테가 베네타에서 만드는 옷들은 입기 편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세련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작업 아래에는 장인들의 고군분투가 느껴집니다. 당신이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장인 정신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어떤 접근 방식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처음에 보테가 베네타의 여정과 삶을 이해하기 위해 아카이브를 되돌아봤습니다. 그 과정에서 더 작은 스케일의 오리지널 ‘인트레치아토’를 발견했죠. 첫 시즌의 제 과정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시작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반추해야 할 때가 있으니까요. 첫 시즌이 하우스의 삶을 이해하는 반추(reflection)의 시간이었다면, 두 번째 컬렉션은 밀라노에 살면서 하우스에 들어온 제가 본 보테가 베네타의 현재 모습에 대한 견해였습니다. 사람처럼 하우스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으며, 저는 제 창의성을 통해 그 영혼에 밀착해 오늘날 보테가 베네타의 목소리가 되려 노력합니다. 수공예에 대해 말하자면, 보테가 베네타는 ‘경이로움의 집(house of wonder)’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비범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비범한 장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비범한 사람들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엮어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루이스 트로터가 인터뷰에서 거듭 강조한 ‘반추’와 ‘영혼’이라는 단어는, 그녀가 보테가 베네타에서 선보인 두 컬렉션을 이해하는 정확한 열쇠다. 두 컬렉션을 잇는 선은 분명하다. 첫 시즌이 하우스의 ‘과거’를 통해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작업이었다면, 두 번째 시즌은 ‘현재의 보테가 베네타가 자리한 도시’를 자신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낸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사이를 관통하는 핵심은 그녀가 인터뷰에서 말한 그대로, “비범한 장인들과 함께 평범한 일상을 엮어내는 일”이다.

전시장의 1970년 정강자 작품 ‘무체전’ 안에 들어서면, 짙은 연기와 함께 작가의 목소리(AI로 복원된)가 들린다. “당신은 지금 내 작품 안에 있습니다.”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사흘 만에 강제로 철거된 그 작품은, 56년의 시간을 건너 처음으로 다시 ‘공간’이 되었다. 야마자키 츠루코의 1956년작 ‘빨강’은 일본 가정집 침실의 모기장을 연상시키는 붉은색 안에 잠과 치유의 공간을 동시에 품는다.
매듭, 직조, 손으로 엮어 만든 방. 이것은 인트레치아토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고, 보테가 베네타가 ‘만드는 행위의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트로터가 말한 ‘집합체로서의 위대함’은 그래서 두 겹으로 읽힌다. 미술사에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11인 + α의 여성 작가들의 ‘집합체’. 그리고 그녀가 ‘비범한 장인들’이라 부른, 보테가 베네타 아틀리에의 익명의 손들의 ‘집합체’. 한쪽이 미술의 새 장르를 만들었듯, 다른 한쪽은 매일 가죽 한 가닥씩을 엮어 럭셔리의 또 다른 정의를 짠다. 보테가 베네타가 50년 넘게 짜고 있는 인트레치아토처럼, 트로터가 이끄는 새 시대의 보테가 베네타도 한국과 이탈리아, 과거와 현재, 패션과 미술 또 수공예, 그리고 트로터 그녀 자신과 함께 다양한 ‘손’들이 모여 한 가닥 한 가닥 새로운 보테가 베네타의 역사를 엮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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