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는 오랫동안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하나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루지 못했다는 이유로 '미완의 국가', '패망한 나라'라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그 인식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계기가 됐다.
가야는 서기 42년 건국해 562년까지 존속하며, 단일 체계를 거부하고 6개의 나라들이 수평적·병렬적 관계를 맺으며 함께 성장한 문명이었다.
바로 그 다원성과 개방성이 동아시아 고대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은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가야 연맹체의 중심 권역이 오늘날 경남도의 지리적 범위와 상당 부분 겹친다는 사실이다. 김해·함안·고령·합천·창녕·고성 등 가야고분군이 분포한 지역 대부분이 경남 땅이다. 150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가야의 역사가 오늘의 경남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유다.
고성 송학동 고분군.
◇산 위의 산, 가야의 위용
고성군 고성읍 송학동 고분군, 탁 트인 남해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릉 위에 소가야 지배자들의 14기의 고분이 늘어서 있다. 5~6세기(1400~1600년 전) 동아시아 국제 교역의 거점으로 살아 숨 쉬던 소가야(小加耶)의 심장이 바로 이곳이다.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1호분에서 3호분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연접 고분이다. 구릉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세 기의 무덤이 마치 산 위에 산이 하나 더 솟은 것처럼 연결되어 있으며, 전체 길이가 무려 70m에 이른다.
이 초대형 연접 무덤 형식은 다른 가야 지역은 물론 백제나 신라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오직 소가야만의 독창적인 장례 양식이다. 1호분은 들덧널(수혈식 석곽묘), 2호분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으로 묘제가 서로 다른 점 또한 눈길을 끈다.
김상수 고성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한 고분군 안에 서로 다른 묘제가 공존한다는 것은 소가야가 당대의 장례 문화를 폐쇄적으로 고집하지 않고 개방적으로 수용하고 변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 분구묘 양식은 가야 권역에서 소가야가 유일하고, 백제와의 교류 흔적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고분군의 위치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선언이다. 송학동 고분군은 후기 가야 최대의 항구로 평가받는 고성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구릉지에 자리한다. 소가야의 지배층이 남해안 연안 교역망을 장악한 정치 권력이었음을 하늘과 바다를 향해 동시에 선포하는 위치 선정이었다.
송학동 고분군 주변에는 소가야의 방어·교역 체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유적들이 함께 자리한다. 고분군 동쪽 당항만이 바깥 바다와 만나는 자리에는 사적 고성 내산리 고분군이, 그 바로 옆에는 15기 규모의 양촌리 고분군이 위치한다. 고성만 서쪽 높은 언덕에는 해발 89.1m의 만림산 정상부를 두른 만림산 토성(경남도 기념물)이 자리한다.
김 학예연구사는 "송학동 고분군이 소가야의 가장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내산리 고분군은 바다와의 교역·교류 기능을 집중적으로 수행한 곳"이라며 "소가야는 이처럼 다원적인 구조로 분화된 세력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고 말했다.
올해 발굴이 예정된 연당리 고분군(약 95기 규모)과 2027년 발굴을 앞둔 양촌리 고분군은 아직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지 않은 상태지만, 발굴 성과에 따라 사적 지정 등 문화유산 등록 절차가 추진될 것으로 기대된다. 고성 일대의 가야 유산 지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소가야의 국제 해상 교역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변한 12국의 하나로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것이 오늘날 고성 지역 소가야, 즉 고자국(古自國)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삼국유사'는 '소가야는 지금의 고성(固城)'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소가야는 고성을 중심으로 사천·진주를 포함한 남강 수계와 연결된 산청 지역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활발한 해상 교역을 바탕으로 5~6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기원후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금관가야 침공으로 남해안의 교역 질서가 재편되면서, 오히려 고성 일대는 남해안 최대 규모의 국제 교역항으로 거듭나는 전기를 맞게 된다. 중국과 영산강 유역의 문물이 가야로 들어오는 입구이자, 경상도 내륙의 신라계·대가야계 문물이 일본 열도와 영산강 유역으로 나가는 주요 출발지로서 동아시아 교역의 십자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러한 국제성은 송학동 고분군 출토 부장품들이 여실히 증명한다. 소가야에서 만들어진 유물과 함께 대가야·아라가야계 유물, 영산강 유역과 왜(倭)의 문물, 백제와 신라의 부장품이 고분 안에 나란히 들어 있었다.
김 학예연구사는 "소가야는 어떤 특정 유물 하나가 대표하는 곳이 아니라, 교류와 교역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라며 "고분이 조성된 모든 시기에 걸쳐 외래 문물이 고르고 다양하게 분포하는 것은, 소가야가 어느 특정 세력에 종속되지 않고 다원적 외교와 교역 전략을 일관되게 견지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강조했다.
소가야의 대외 교역 역량은 사적 고성읍 동외동 유적에서 그 뿌리를 확인할 수 있다. 기원 전후부터 6세기까지 약 600년간 사용된 이 유적에서 새무늬청동기(조문청동기)가 원형 그대로 발굴돼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고성 동외동 유적-새무늬청동기.
방패 모양의 청동판 위에 새와 소용돌이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진 이 유물은 당시 지배층의 높은 예술적 감각과 청동기 주조 기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함께 발견된 청동창·청동검 손잡이, 중국 거울과 화폐 등은 고성의 정치 세력이 일찍부터 중국·왜와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뒷받침하며, 야철지 유적의 확인은 고성이 단순한 교역 중계지가 아니라 철 생산 기반까지 갖춘 자립적 생산·유통의 거점이었음을 말해준다.
소가야의 토기 문화 또한 국제 교류의 산물이자 동력이었다. 가야 토기는 1200℃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내는 회청색 경질 토기로, 소박함과 단아한 곡선미가 특징이다. 신라 토기의 직선적인 외형과 달리, 가야 토기는 유려한 곡선의 굽다리와 상하 일렬로 배치된 투창이 어우러져 강한 역동성을 풍긴다.
넓은 입 긴 목 항아리와 뚜껑 있는 굽다리접시는 소가야 양식의 대표 유물로, 소가야의 문화 영역을 밝히는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소가야를 비롯한 가야의 토기 제작 기술은 5세기부터 일본에 전파돼 '스에키' 문화를 탄생시켰고, 동아시아 문명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고성 송학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옥 장신구
수평구연호.
굽다리 접시
긴목항아리와 그릇받침.
◇다원의 꽃, 전국에 잇다
고성박물관은 기원 전후부터 562년 소가야 멸망까지의 역사 흐름과 함께 '교류'와 '관계' 중심으로 발전한 가야인들의 자취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특히 박물관 내 실감영상관은 관람객들에게 압도적인 몰입 경험을 제공한다. 곡면 스크린을 가득 채운 영상 속에서 관람객은 마치 1500년 전 소가야 고분의 돌방 안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가야인들의 삶과 죽음, 꿈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김 학예연구사는 "고구려·백제·신라가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갖추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기에, 가야는 그 완충지대 속에서 오히려 다원화된 사회를 오랜 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면서 "다양성과 교류, 협력을 중시했던 가야의 가치는 중앙집권이 아닌 다원의 시대를 향해 나아가는 오늘날에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고성군은 세계유산 등재 이후 송학동 고분군 일대를 역사 문화 관광 거점으로 육성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고분군 주변 탐방로 정비와 안내 시설 확충이 이뤄지고 있으며, 가야 역사 문화 벨트 조성 사업과 연계한 광역 관광 루트 개발도 추진 중이다.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후속 지원 및 보존·활용에 관한 특별법' 제정과 함께 국가적 차원의 체계적 지원도 뒷받침되고 있다. 고성이라는 한 지역의 유산이 이제 전국이 함께 보존하고 향유해야 할 인류의 공동 자산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남해안을 굽어보는 송학동 고분군의 초록 봉우리들은 오늘도 묵묵히 그 이야기를 전한다.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우고 바다를 통해 세계와 교류했던 소가야 사람들의 지혜와 기상이, 1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