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앨범과 아들의 누룩, 400년 버틴 양조장의 힘 [김성우의 사케 본색]

시즈오카에 위치한 하츠카메 양조장, 이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건 한 잔의 술보다 두 사람의 손이었다. 응접실에서 가족 앨범을 한 장씩 넘기는 아버지의 손, 그리고 양조장 안쪽에서 누룩을 매만지고 술덧 탱크의 뚜껑을 직접 열어 보여주던 아들의 손. 한 양조장 안에 두 세대의 손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1636년 창업. 한국으로 치면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다. 그 시간 위에서 시작된 양조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충분히 흥미로운데, 막상 도착해 보니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게 있었다. 바로 양조장을 함께 이끄는 부자(父子)의 풍경이었다. ‘하츠카메(初亀)’라는 이름은 ‘첫날의 해처럼 빛나고 거북이처럼 오래 번영하라’는 바람을 담아 지어졌다고 한다. 14대를 거쳐 지금은 15대 노리츠구 사장이 가업을 잇고, 그의 아들이자 16대 후계자인 야스히로 전무가 양조장 안쪽 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응접실, 두 사람이 마주 앉다
본가 안쪽 깊숙한 곳, 빛이 잘 드는 곳에는 다다미 응접실이 있다. 옛 기둥과 문살이 그대로 남아있고, 창 너머로는 잘 가꾼 작은 정원이 보인다. 한쪽에는 아버지 노리츠구 씨가, 그 옆에는 아들 야스히로 씨가 앉았다. 두 사람이 늘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재미있었던 건 역할이 자연스럽게 나뉘어 있다는 점이었다. 가문의 옛 이야기는 아버지가 도맡아 풀어준다. 두꺼운 가족 앨범을 한 장씩 넘기며 백 년 전 흑백 사진과 가문의 족보, 옛 시내 지도까지 차근차근 펼쳐 보여준다. 그 사이 아들이 노트북을 열어 자료를 보태거나, 발효 데이터를 짚어가며 거든다. 가문이 어떻게 14대까지 이어져 왔는지를 아버지가 큰 그림으로 그려주면, 아들은 지금 양조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의 디테일을 그 위에 채워 넣는 식이다.
특히 양조장 앞에서 가족이 단체로 찍은 옛 사진을 펼치며 노리츠구 사장이 던진 한 마디가 인상적이었다. “여기 보이는 사람들이 다 저희 가족이고, 양조장은 가족 그 자체였습니다.” 양조장이 단순히 사업체가 아니라 한 집안의 일상이고, 무대였다는 사실이 그 한 장 안에 담겨 있었다.

노리츠구 사장의 어조에는 평생 이 일을 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편안한 자긍심이 묻어 있었다. 자랑하지도, 일부러 낮추지도 않고, 그저 14대를 이어 만들어 온 시간을 옆 사람에게 들려주듯 말이다. 그 결이 그대로 양조장 술맛에도 녹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미율 35%의 세계
응접실 한가운데 옻칠이 된 검은색 쟁반 위에 작은 비닐 팩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왼쪽 두 팩은 정미하기 전의 누런 빛깔 현미, 오른쪽은 깎아낸 정도가 다른 흰 쌀들. 한쪽에는 정미율 40%, 그 옆에는 35%라고 표시되어 있다. 효고현 토조에서 자란 2025년산 야마다니시키(山田錦)다. 그 옆에는 손글씨로 ‘레이와 호마레후지(令和誉富士)’라고 적힌 봉지가 놓여 있다. 하츠카메가 가장 정성껏 다루는 두 가지 쌀을 한자리에 모아 보여준 것이다.

쌀 한 톨을 65%나 깎아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 차이가 어떻게 술맛을 바꾸는지에 대해 두 사람은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이 정도까지 깎으면, 더 깨끗한 술이 된다”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가지런히 놓인 쌀 알갱이들이 그 짧은 말을 대신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웠던 건 하츠카메가 좋은 쌀을 외부에서 사다 쓰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야스히로 전무는 양조장 인근 아사히나(朝比奈) 지구의 농가들과 함께 사케 전용 쌀을 키운다고 했다. 최근에는 양조장 직원들이 직접 논에 들어가 모를 심고 벼를 거두기까지 한다고. 술 공장과 농가의 경계가 거의 없는 셈이다.
옛것과 새것이 나란히 살아있는 양조장
응접실에서 차담을 마치고 양조장 안으로 안내받았다. 들어서자마자 든 생각은 ‘옛것과 현재의 것이 함께 살아있는 곳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한쪽에는 거대한 스테인리스 발효 탱크가 늘어서 있고, 그 옆에는 ‘No.1’이라고 새겨진 낡은 나무 압착기가 자리하고 있다. 새것은 새것대로, 옛것은 옛것대로 자기 역할이 분명하다.
큰 탱크 앞에서 양조 과정을 직접 짚어주는 노리츠구 사장의 모습은 따로 메모를 떠올릴 필요도 없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한쪽 손을 탱크에 가만히 올린 자세가 평생 이 자리에서 보낸 시간을 말해준다.

발효장 한쪽 천장 높이에는 작은 신단(神棚)이 걸려 있다. 양조장의 안전과 술이 잘 익기를 기원하며 매일 손을 모으는 자리다. 사람의 의지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미생물의 영역을 다루는 일이다 보니, 자연 앞에서의 겸손함은 시대가 바뀌어도 그대로다.

코지실에서 마주한 아들의 손
양조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코지실(누룩방)에서의 야스히로 전무다. 응접실에서 단정한 검은 셔츠로 보았던 그 사람이, 여기서는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양팔을 활짝 펼친 채 누룩 침대 사이에 서 있었다.

코지는 사케 양조의 심장 같은 존재다. 누룩곰팡이를 묻힌 쌀이 며칠에 걸쳐 살아 숨 쉬며 쌀의 전분을 당으로 바꾸는 일이 여기서 일어난다. 좋은 누룩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그 다음 모든 과정이 의미를 잃을 만큼 결정적인 단계라, 양조장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서 야스히로 전무는 직접 천을 들춰 안쪽 누룩을 보여줬다. 그리고 한 알 한 알 상태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했다.

이번에는 술덧 탱크 차례. 그가 무거운 나무 뚜껑을 비스듬히 열어 안쪽을 보여줬다. 막 발효가 시작된 술덧이 작은 거품을 일으키며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와서 상태를 봅니다.” 짧게 던진 한마디지만, 가업을 그저 물려받은 게 아니라 자기 손으로 끌고 가는 사람의 자세가 묻어났다.

양조장 또 다른 한쪽에서는 하루 작업을 마친 사케 빚는 천들이 천장에 매달려 마르고 있었다. 줄지어 늘어진 흰 천들이 오래된 사진의 한 장면 같지만, 한 장 한 장에 며칠 전 짜낸 술의 흔적이 그대로 배어 있다. 응접실에서 가족 앨범을 펼치는 아버지의 시간과, 코지실에서 누룩을 매만지는 아들의 시간이 한 양조장 안에서 동시에 흐르고 있었다.


쌀이 다르면 술도 다르다
양조장 투어의 마지막 순서는 시음이었다. 사케 시음이야 동네 다이닝 바에서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술이 빚어진 바로 그 양조장 한 모퉁이에서, 그 술을 만든 사람이 곁에서 잔을 따라주는 시음은 좀 다르다. 흰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잔 세 개와 그 옆으로 가지런히 줄을 선 하츠카메의 사케 병들. 야스히로 전무가 한 잔씩 직접 따라주며 짧게 설명을 곁들이는 동안, 술 한 모금에 그것을 만든 사람의 시간이 함께 담겨 있다는 감각이 처음으로 또렷이 와닿았다.

흥미로웠던 건, 같은 양조장에서 같은 사람의 손으로 빚은 술인데도 한 잔 한 잔이 마치 다른 양조장의 술처럼 캐릭터가 또렷이 갈렸다는 점이다. 그 차이는 결국 ‘쌀’에서 왔다. 하츠카메는 두 가지 쌀을 메인으로 쓴다. 하나는 일본 전국에서 사케용 쌀의 왕으로 통하는 효고현 야마다니시키(山田錦), 또 하나는 양조장 인근에서 직접 키우는 호마레후지(誉富士)다. 두 쌀로 빚은 두 술을 한자리에서 나란히 맛보는 일은 사케 좀 마셔봤다고 자부해 왔던 사람에게도 흔치 않은 경험이다.

야마다니시키로 빚은 ‘카라카라 베핀(からからべっぴん) 준마이 긴조’는 이름 그대로 ‘맑고 깨끗한 미인’이라는 표현이 떠오르는 술이었다. 잔에 코를 가져다 대니 잘 깎은 배와 흰 꽃을 닮은 향이 가볍게 올라온다. 한 모금 머금자 입안 가득 비단 같은 질감이 퍼졌다. 일본주도 +10이라는 숫자가 무색할 정도로 끝맛이 칼칼하지 않고 오히려 깔끔하게 떨어진다. 야마다니시키 특유의 안정감과 화사함이 단정하게 자리 잡은 술이다.
잔을 비우고 받은 두 번째 술, 호마레후지로 빚은 ‘토쿠베츠 준마이’는 같은 양조장의 술이라기에는 표정이 사뭇 달랐다. 첫인상부터 향이 한층 차분하고 묵직하다. 잘 지은 흰 쌀밥의 구수한 향과 옅은 견과 향이 먼저 코끝에 닿고,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면 첫 번째 술보다 훨씬 또렷한 쌀의 단맛과 감칠맛이 입안에 퍼진다. 끝맛도 곧장 떨어지지 않고 한참을 머문다. 야마다니시키가 화사한 우아함이라면, 호마레후지는 친근하고 푸근한 깊이감이라고 할까. 같은 양조장에서 같은 사람의 손으로 같은 물로 빚은 술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두 술의 표정이 달랐다.
야스히로 전무가 그 자리에서 한마디를 보탰다. “같은 기술로 빚어도, 쌀이 가진 성격이 술의 표정을 결정합니다.” 시음 내내 입안에서 굴리던 두 술의 차이를 가장 정확히 짚어주는 설명이었다. 양조장에서의 시음이 특별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잘 빚은 한 잔이 단지 ‘맛있다’는 감상에서 끝나지 않고, 그 술이 어떤 쌀에서 시작되어 어떤 손을 거쳐 어떤 방식으로 익어왔는지까지 함께 떠오르게 만든다는 것. 일반적으로 식탁에서 잔을 기울일 때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감각이다.
하츠카메와 어울리는 한 끼
두 술의 인상이 또렷이 갈렸으니 페어링도 각각 따로 떠올려 보면 좋겠다. 야마다니시키로 빚은 카라카라 베핀처럼 단정하고 깔끔한 술은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지 않은 가벼운 안주들과 잘 맞는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잘 구운 두부 부침이다. 노릇하게 부친 두부에 간장과 다진 파를 살짝 올린 정도면 충분하다. 두부의 슴슴한 콩 풍미와 술의 부드러운 단맛이 자연스럽게 포개진다. 비슷한 결로 명란을 살짝 구워 따뜻한 흰 쌀밥 위에 올린 한 그릇이나, 김에 살짝 싸 먹는 명란 한 점도 짝이 좋다.
조금 더 가벼운 안주를 찾는다면 동네 마트에서 쉽게 사는 모듬 어묵이나 따끈하게 데운 묵은지 만두도 의외로 잘 맞는다. 묵은지의 시큼한 맛이 술의 산미와 부딪치지 않고 오히려 입안을 정돈해 줘서, 만두 한 입과 술 한 모금이 부담 없이 이어진다.
반면 호마레후지로 빚은 토쿠베츠 준마이처럼 쌀의 풍미가 또렷한 술은 자기 색이 분명한 한식과의 합도 흥미롭다. 잡채의 참기름 향과 당면의 고소함, 두부김치의 발효된 풍미를 술이 자기 주장 없이 받아주면서 한 끼가 한층 풍성해진다. 미지근하게 데운 누룽지탕이나 굴을 넣고 끓인 굴 미역국처럼 따뜻한 국물 요리와도 의외로 궁합이 좋다. 따뜻한 국물이 사케의 단맛을 더 둥글게 부풀려주고, 그 위로 굴이나 누룽지의 구수한 풍미가 길게 남는다.
하츠카메의 술은 굳이 요란한 안주를 곁들일 필요가 없다. 평소 식탁에서 자주 만나는 익숙한 메뉴들에 슬쩍 곁들여 두면, 평범한 저녁이 한 단계 풍성해진다. 그런 종류의 사케다.
두 손이 만들어가는 시간
양조장을 나서며 다시 돌아본 마당의 풍경은 들어올 때와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오래된 양조장이라고만 생각했던 곳이, 한 가족이 400년 가까이 지켜온 일터로 다가왔다. 응접실에서 가족 앨범을 펼치는 노리츠구 사장의 손과, 코지실에서 누룩을 매만지고 시음 자리에서 잔을 따라주던 야스히로 전무의 손. 두 부자(父子)의 손이 같은 양조장 안에서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잘 빚은 사케 한 잔에는 결국 그 양조장을 지켜온 사람들의 시간이 함께 담긴다. 하츠카메 양조의 술 한 잔을 비울 때마다, 우리는 1636년부터 이어져 내려온 한 가문의 시간과, 지금 이 순간에도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두 세대의 모습을 함께 마시는 셈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단정한 술. 자기 자랑을 하지 않지만 한 모금 한 모금에 깊이가 쌓이는 술. 400년 가까운 시간을 견뎌온 한 가문이 마침내 잔 속에 담아낸 답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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