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조의 아트홀릭] 프랑스 대성당이 반한 'K-빛', 60년 만에 고국에 닿다

■ 글 : 정승조 아나운서 ■
한 단어에 60년을 매달린 화가가 있습니다.
바로 '방혜자'입니다.
1937년에 태어나 2022년에 떠난 이 화가의 단어는 '빛'이었습니다.
1961년 국비유학생 1호로 파리행 비행기에 올라, 평생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빛을 그렸습니다.
샤르트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를 동양인 최초로 맡았던 화가입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 국공립미술관에서는 이번이 첫 회고전입니다.
빛을 평생 좇은 사람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남겼을까요.
'정승조의 아트홀릭'은 그 궁금증을 안고, 전시를 기획한 '방초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에게 일곱 가지를 물었습니다.
■ 방혜자 작가는 평생을 '빛'이라는 한 가지 화두에 매달렸습니다. 한 작가가 60년을 한 주제로 밀고 가는 일이 흔치 않은데요. 그 출발점은 어디였다고 보시는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작가는 유년 시절에 집 근처 개울가에서 조약돌 위로 흐르는 맑은 물에 비친 빛에 영감을 받아, 어떻게 하면 저 빛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합니다. 반짝이는 빛에서 시작했다 하더라도, 작가의 삶과 창작 여정에서 빛은 점차 넒고 심오한 차원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지요.
1937년부터 2022년까지의 작가의 일생에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격변의 시기가 있었고, 유약한 신체의 작가는 전쟁기를 지나며 병고에 시달리기도 했었지요. 또한 국비유학생 제1호로 1961년 도불했으나 일찍이 유학하여 여성으로서 외국인으로서 힘든 시간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로 간 후로 두 문화를 오가며 변화 속에 삶을 이어갔지요. 이 과정에서 작가는 영적인, 내적인 수련을 쌓아갔습니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작가에게 빛은 단순히 광학적인 차원의 빛에만 머물지 않고, 생명의 빛, 마음의 빛, 우리 본연의 빛, 우주를 이루는 빛, 초월적인 빛이었습니다. 즉 작가에게 빛은 회화적 화면의 세계와 표현 방식을 탐구하는 데에 매개이자 지향점이면서도, 삶과 창작의 길에서 여러 층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 그 작품들이 그동안 한국이 아닌 프랑스에 흩어져 있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출품작 67점 중 절반 이상이 국내에 처음 공개된다고요. 이번 전시를 계기로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방혜자 작가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여성작가로서 초기 추상회화를 선보인 소수의 작가 중 한 명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행보를 모아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습니다. 그 이유로, 작가가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작업한 사이, 일부 국내 작품 외 다수의 작품이 프랑스에 있는 것도 한몫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국내에 선보인 작품들 외에도 작가의 세계를 이루는 다양한 실험들과 다채로운 과정을 모두 펼쳐 보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후반기 대표작 또한 새로운 맥락 위에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자 했습니다.
한국과 프랑스의 두 문화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이룬 방혜자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두 곳에 있는 작품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두 문화를 이은 작가의 창작 활동의 의의를 살려 해외 기관을 설득하였고, 특히 현재 프랑스국립 퐁피두센터는 리노베이션 기간이라 원칙적으로는 대여가 불가함에도 특별히 작품을 대여해주었습니다.
나란히 전시된 동일한 제목의 초기 추상회화 두 작품이 각각 국립현대미술간과 퐁피두센터의 소장품인 점 또한 방혜자 작가의 두 국가 간 예술 업적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방혜자 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파리에 소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파리시립 세르누치 박물관에서도 유수 작품을 흔쾌히 대여해주었고요. 이로써 국내에 선보인 적이 없거나 드물었던 대표작, 초기작, 말기작 등을 한데 아울러 전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퐁피두센터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샤르트르 대성당에 동양인 최초로 일부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기획한 작가로 방혜자의 위상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국공립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방혜자 작가의 회고전으로서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작업 세계 전반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 방혜자 작가는 그림뿐 아니라 말과 글로도 깊은 인상을 남긴 분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시며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작가의 말 한 구절이 있다면 어떤 것이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작가가 머물렀던 작업실에 있는 한 책에는 마음의 방을 들여다본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늘 바쁜 삶을 사는 우리에게 그러한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이처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노력으로 작가가 작업에 임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가의 노트에는 인상 깊은 말이 많은데, 직접 시를 쓰기도 했던 작가의 시 중에서 아래의 시가 매우 핵심적으로 그의 성찰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우주의 중심을 향해 걸어간다
텅 빈 가운데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안으로 가는 길은
마음이 깨어나는 길
(중략)
새로 태어나는 길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이 시의 마지막 문구를 전시의 부제로 삼기도 했는데요, 이처럼 작가는 본연의 빛, 내면의 빛을 찾아서 수행하듯이 작업을 하고, 또 창작의 과정이 빛을 세상에 심듯이, 흩뿌리듯이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인상 깊은 부분입니다. 이처럼 작가에게 빛은 단순히 밝아서 보이는 빛이 아니라, 부단한 창작의 길 위에서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 그런 내면의 수행이 작업 과정에도 그대로 이어졌을 것 같습니다. 한지, 흙, 천연 안료를 쓰고 작업 전 명상과 기공으로 몸을 가다듬었다고 하는데, 이런 과정이 화면 위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관람 팁을 주신다면요?

방혜자 작가는 한지가 빛을 투과시키는 투명함도 가지고 있으면서 질기고, 구기면 우연하게 아름다운 주름을 만들어내는 데에 매료되었습니다. 또한 한지 중 닥지에는 나무 껍질이 점점이 있는데 마치 세상을 이루는 존재나 빛의 한 점 한 점 같아 보인다고도 하였지요. 이러한 한지의 영역을 점차 넓혀갔습니다.
1996년부터는 프랑스 남부 루시용 흙을 작품의 재료로 활용하면서 자연의 에너지 자체를 작품에 도입하고자 하였습니다. 천연 안료도 마찬가지이고요. 작가는 기법상으로도 어려서부터 해 왔던 서예에서 영향을 받거나, 파리에서 유화, 벽화, 이콘화, 판화, 스테인드글라스 등의 기법을 연마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사용했을까요? 작가는 빛을 자유자재로 표현하고자 이처럼 다양한 기법과 재료를 탐구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화면에는 작가의 손길이 닿은 섬세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재료를 단순히 도구로서 다룬 것이 아니라, 재료의 질감이나 우연한 주름의 형상을 들여다보고 이에 따라 흐르듯 선을 가미하는 등 재료와 조우하듯 작업한 작가의 태도는, 작업 전의 명상과 기공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작가의 작품에는 동서양의 재료와 기법이 한데 어우러져 있기도 하지요.
밝은 빛, 내면의 빛, 생명의 빛에도 물성이 있다면 어떠한 재질감을 가지고 있을지 상상해봅시다. 작가는 이를 어떻게 표현했을지 전시에서 만나실 수 있을텐데요. 작품을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그리고 오가며 보시면 좋겠습니다. 평면의 회화라도 빛을 깊이 있게 담아내고자 한 작가의 화면을 입체적으로 감상하는 사이, 작가가 그려내고자 한 빛의 세계에 들어와 거닐게 됩니다.
■ 그 빛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 입구에 놓인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라고 들었습니다. 샤르트르 대성당 '빛의 탄생' 재현작인데요, 여러 대표작 중 이 작업을 입구에 둔 이유가 있을까요?

전시의 도록에서는 연대기적 기록을 위해 제작년도의 시간 순서를 따라 작품도판이 삽입되었지만, 전시의 공간에서는 작가의 작업세계를 공간적 차원에서 이해하도록 비선형적인 시간의 순서로 작품들이 배치되었습니다.
작가가 후반기로 갈수록 원형 도상에 집중했듯이, 그의 세계관에서 처음과 끝, 생명의 탄생과 죽음, 빛과 어둠은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마치 윤회사상처럼요. 이러한 작가의 철학을 반영하여, 작가의 전반기 작품, 후반기 작품이 한 공간에서 지금의 시점으로 작가의 작업적 흐름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작품들이 구성되어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작가의 사후 대중에 공개된 실질적인 유작을 5층 전시장의 서두에서 만나도록 배치하였습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실제 빛과 작가의 빛에 대한 집약된 사유가 만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그리고 그 작품을 통과한 색색의 빛 앞에서, 일상의 세계를 벗어나서 전시의 공간인 작가의 세계로 진입하는 전이공간으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후반기의 대작들이 모인 공간을 만나게 되지요. 이 구간에서 관람객이 가장 오래 머무르게 될 만한 작품 한 점을 꼽아 주신다면 어떤 작품일까요?

이 구간은 큰 전면 추상 회화 작품들이 함께 에너지를 이루는 우주와 같은 공간인데요, 이곳에서는 천지의 경계조차 넘어서 우주적이고 내면 깊은 차원의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 흐름 안에서 하나의 작품을 꼽자면 '우주의 춤'(2010,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빛이자 중심이라고 보았던 방혜자 작가의 생각처럼, 작품에는 빛과 그림자 같은 형상이 여러 형태와 크기로 퍼져있습니다. 2미터가 넘는 거대한 화면을 이루는 오묘한 빛깔은 작가가 앞면과 뒷면에서 칠하기를 더하며 오랜 시간 작업해낸 결과입니다.
화면의 색채와 질감을 따라 보다 보면 시간도 공간도 잊은 채 사유의 시간으로 들어서게 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앞에서, 작가가 작업한 시간, 그리고 그 전과 후의 명상의 시간을 만나며 관람객들이 작품의 울림을 느끼고, 보다 넒고 깊은 차원에서 우리 내면 혹은 주변과 세계에 대해 공감의 사유를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전시를 끝까지 보고 미술관을 나서는 관람객이 한 가지를 마음에 품고 갔으면 한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으면 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방혜자 작가는 특정한 믿음이나 형식에 머물지 않고, 예술로써 늘 마음의 샘을 새로이 하고자 정진하였습니다. 내면의 수양은 물론, 표현 방식에 있어서도 자신의 틀을 벗어 새로운 모색을 해 왔고요.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다채로이 펼쳐보이는 것은, 마치 새로 태어나는 길 위에 있는 것처럼 작가의 작업 세계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미술관을 나서는 관람객들도 잠시 이성적인 생각이나 복잡한 사고를 내려놓고 조용히 빛과 마음의 공간을 산책하듯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분열과 분쟁의 상황이 많은 현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이기도 할텐데요.
특히, 전시의 중간부에는 작가의 대표적 원형 작품들이 모인 둥근 공간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원통형 설치 작품이 있고요. 마치 탑돌이를 하는 듯한 동선을 지나며 원형의 화면에 담긴 정신적 기운을 느껴보시기를요.
작가의 작업 중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면모를 담아가는 사이 명상적 시간에 몰입해 보시길요, 이 전시와의 만남이 관람객의 마음에 오래 남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재능기부로 참여해주신 이청아 배우의 오디오 가이드에서 차분한 목소리는 방혜자 작가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에 매우 친근한 도움이 됩니다. 아트홀릭 독자들의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 방혜자 - 천지에 마음의 빛 뿌리며 간다
-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기획전시실, 보이는 수장고, 로비
- 전시 기간: ~ 2026년 9월 27일
- 관람 시간: 화요일~일요일(10:00~18:00) / 월요일 휴관

#충청 #충북 #세종
Copyright © CJB청주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