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드가 없는데요!"…미끄러지는 발끝을 붙잡은 '자기 믿음' [고태강의 빌드업 클라임]

“자연 암벽을 떨지 않고 등반하고 싶습니다.”
2023년 4월, 코오롱등산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야외 교육을 받던 날, 내가 6명의 동기 앞에서 밝혔던 포부였다. 자연 바위를 탔을 때, 뼈저리게 좌절을 맛봤던 경험을 극복하고 싶은 마음에서 세운 목표였다.
그 좌절의 시작점은 ‘삼성산 숨은암장’이었다. 실내 암장과 리드클라이밍에 재미를 붙여가며 ‘나도 제법 이제 암벽을 타는구나’라며 근거없는 자신감이 차오르던 시기였다. 2022년 7월, KBS스포츠월드 88클라이밍 암장 선생님의 안내로 삼성산 숨은 암장을 처음 찾았다. 이름 그대로 산속에 꽁꽁 숨어 있는 암장이었다. 등산할 때처럼 안내해 주는 이정표가 따로 없기 때문에 자칫하면 삼성산 정상으로 가기 십상이다. 자연 바위를 다니며 느끼는 건데, 클라이머들에게는 등반 루트를 파악하는 ‘루트 파인딩(Route Finding)’뿐 아니라, 자연 암벽장을 찾아다니는 능력도 뛰어나야 한다. 똑같이 생긴 나무들로 둘러싸인 산에서 매의 눈으로 들머리를 찾아내는 선배님들을 볼 때면, 어디서 내비게이션이라도 쓰시는 건지 여전히 신기할 따름이다.

초보자라면 이미 다녀온 선배님들의 발자취를 참고하는 게 좋다. 요즘은 블로그나 온라인에 숨은 암장 가는 길이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길을 가다 보면 바위에 희미하게 칠해진 빨간색 화살표를 찾아가면 된다. 카카오맵에도 ‘숨은 암장’ 가는 길이 나와 있으니 참고하면 좋다.
홀드가 보이지 않는 바위...미끄러지는 발을 견디는 ‘슬랩’의 세계
여름날 찾은 암장은 생각보다 서늘했고, 비가 온 직후였는지 군데군데 젖어 있었다. ‘오늘 자연 바위를 경험하는 건 틀렸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선생님은 하네스에 줄을 매고 거침없이 선등(가장 먼저 퀵드로우를 걸고 로프를 설치하며 등반하는 것)을 시작했다. 내 눈에는 손으로 잡거나 발로 밟을 수 있는 홀드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잠시의 망설임도 없는 스텝에 마냥 입이 벌어졌다.
선생님이 정상에 로프를 걸어둔 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그래도 클라이밍 경험이 1년 반 정도 되니 자연 바위도 어느 정도는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예상했다. 하지만 바위에 붙어보는 순간, 그 작은 희망은 산산조각 났다.
첫 등반은 꼭대기에 로프를 미리 걸고 올라가는 ‘탑로핑(Top-roping) 방식으로 진행했다.등반자가 줄을 걸며 올라가는 리드(Lead) 종목과 달리, 위에서 줄이 등반자를 잡아주고 있으니, 밑에서 빌레이어는 등반자가 오를 때마다 조금씩 줄을 당겨주기만 하면 된다. 줄이 너무 느슨하면 등반자가 추락했을 때 바닥이나 돌출된 바위에 부딪힐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안전하게 탑로핑으로 가는데도 평평한 땅에서 수직의 바위로 체중을 옮기는 첫 동작조차 쉽지 않았다.

암장에서 하는 클라이밍은 알록달록한 손 홀드를 잡고 다음에 홀드를 보고 발을 올리면 된다. 그렇게 조금씩 위로나 옆으로 가면 되는데, 자연 바위는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조차 막막했다.
처음 마주한 바위는 경사가 완만한 ‘슬랩(slab)’이었다. 선생님은 “자세히 보면 작은 돌기들이 있으니 그걸 밟고 서면 된다”고 하셨지만, 자연 바위를 처음 본 초보자의 눈에는 그런 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슬랩은 손가락 두 개로 꼬집듯 잡는 핀치 홀드에 의지하거나 손바닥 전체의 마찰력을 이용해 벽에 붙여야 했다. 그리고 바위에 몸을 최대한 가깝게 붙여야 어느 정도 올라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무엇보다 실내 암장에서 배웠던 ‘삼지점(두 팔을 모으고 다리를 벌려 무게중심을 낮추는 자세)’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슬랩은 암벽화 바닥의 고무와 바위 표면 사이의 마찰력을 극대화하는 게 핵심이다. 바위에 몸을 바짝 붙여야 하는데, 본능적으로 내 엉덩이는 바위와 멀어졌다. 엉덩이가 뒤로 빠지니 발가락이 닿아 있는 바위는 쭉쭉 미끄러지기만 했다.

“내려주세요” 허공 속 외침은 메아리로 맴돌 뿐
얕은 손톱으로 바위를 긁어대며 내 입에서는 “엄마”, “무서워!”라는 외침이 절로 튀어나왔다. 홀드의 위치를 알려주는 선생님의 말에는 “안 보여요!”, “홀드 없는데요”라며 칭얼거리기만 했다. 무기력하게 미끄러지기만 하는 발을 보며 줄을 당겨달라는 “텐션”만 외치기 바빴다. 선생님은 “안 떨어지니까 믿고 일어서!”라고 하셨지만, 눈앞에서 힘없이 미끄러지는 발을 도통 믿기 힘들었다.
15m 외벽에서 리드할 때와는 다르게, 차원이 다른 높이에 대한 공포감이 나를 덮쳤다. 나무에 스치는 바람 소리가 더 음산하게 들렸다. 살짝 고개를 들어 밑을 봤지만, 선생님의 표정은 단호했다. 완등하지 못하면 땅으로 내려갈 수 없겠구나 확신이 들었다.
그제야 정신이 바짝 들었다. 인생에서 마주하는 고난은 오롯이 혼자 감당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진리를 몸소 깨닫는 순간이었다. ‘인생은 못 먹어도 고(Go)’라고 생각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다리와 땀에 밴 손바닥을 꾸역꾸역 위로 밀어 올렸다. 무조건 저 꼭대기를 찍고 내려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둥거렸다.
처절한 사투 뒤에 찾아온 선물 같은 풍경
그러자 곧 눈앞에 앵커(완등 지점의 확보물)가 나타났다. 탑 부근에 손을 얹고 “완등”을 외쳤다. 등반하면서는 보이지 않았던 선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저 멀리 푸른 나무들이 마치 나에게 고생했다며 손을 흔들어주는 듯했고,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노을빛도 장관이었다. 바위를 오르며 흘렸던 땀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삼성산에 다녀온 직후만 해도 ‘역시 자연 바위는 무리다. 앞으로는 실내 암장만 다녀야지’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완등했을 때 얻었던 풍경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꾸역꾸역 사투를 벌이며 바위를 올랐을 때 내 몸에 각인됐던 짜릿한 성취감에 중독되어 버렸다.

실패가 정직하게 실력으로 쌓이는 곳
그날 이후, 나는 단피치 등반을 넘어 거대한 암벽을 넘는 멀티피치 등반까지 즐기고 있다. 그 뒤에도 삼성산 숨은암장을 몇 차례 다시 찾았는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릴 적 거대해 보였던 초등학교 운동장이 성인이 되어 찾았을 때 무척 작아보이는 것처럼, 그토록 나에게 무서웠던 암장이 아담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손발을 덜덜 떨기만 했던 슬랩도 이제 꽤 수월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슬랩과 페이스성 암벽을 가장 잘 타게 됐다. 조그만 홀드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거나 손바닥 마찰력을 이용하는 요령이 생겼다. 도통 보이지 않던 발 홀드도 이제는 보인다. 북한산 인수봉에 있는 슬랩도 쭉쭉 잘 밀고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등산학교에 들어갔을 때 세웠던 목표도 최근에서야 달성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연 암벽이 무섭지 않다. 물론 아직도 생각지 못하게 발이 미끄러지면 깜짝 놀라서 “엄마”를 부르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 활동하는 동호회 회원들은 내가 바위에서 엄마를 몇 번 불렀느냐에 따라 루트의 난이도를 파악한다고 농담을 던질 정도다. 여전히 처음 마주하는 코스나 예전에 경험해 본 코스나 어려운 건 마찬가지지만,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수월해질 순간이 오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삼성산 숨은 암장에선 10b 코스도 퀵드로우를 걸면서 올라갈 수 있게 됐다. 무수한 실패를 겪어야 고스란히 실력으로 쌓인다는 정직한 법칙을 다시금 몸소 느꼈다.

“나는 할 수 있다” 바위가 가르쳐준 자기 믿음의 힘
클라이밍에서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멘탈이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면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다. 생각한 대로 몸이 움직인다는 말은 바위 위에서 정확히 들어맞는다. 무섭다, 못하겠다, 어렵겠다는 생각 대신에 ‘나는 할 수 있다, 해낸다’라는 굳은 다짐을 새겨놔야 한다.
이런 다짐을 계속 되새기려면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스스로를 믿는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설령 자신이 미덥지 않더라도 나 자신만큼은 용기를 북돋워 주고 믿어줘야 한다. 결국 무언가를 해낸다는 건 본인을 굳건하게 믿는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온전히 믿어줬을 때 비로소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오늘도 바위 위에서 배운다. 어제보다 한 뼘 더 올라갈 내일을 기대하며 이번 주말에도 바위를 올라본다.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카스 천하 뒤집혔다"…국내 맥주시장 1위 오른 반전 정체 [권 기자의 장바구니]
- "한국 없으면 안 된다"…반도체만큼 잘 나가더니 '초대박'
- "여기에 오니 반값이네요"…2030 발 디딜 틈 없이 '우르르' [현장+]
- "하다하다 이것까지 훔칠 줄은"…동네 고물상 비상 걸린 이유
- SK하닉에 전재산 풀베팅한 일본인…2년 만에 계좌 열어보니
- "또 일본 갈 줄 알았는데"…5월 황금연휴 1위 여행지 어디?
- CIS, 첨단 정밀 장비로 日 배터리 업체도 홀렸다
- "한국에 최우선 공급하겠다"…중동 6개국 '깜짝 선언'
- "호텔서 커피 마셨더니…" 조회수 '300만' 대박 영상의 비밀 [현장+]
- "32만전자 간다"…삼성전자, 역대급 잭팟 예고에 주가 '들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