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야(빈집)’, 우리 앞에 먼저 도착한 미래 [임병식의 일본, 일본인 이야기]

서경IN 2026. 5. 1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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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순천향대학교 초빙교수
학생들이 없어 2014년 폐교한 오이타현 쓰쿠미(津久見)시립 오치(越智) 초등학교. 쓰쿠미시 인구는 1만 4,300명에 불과한 데다 고령화율은 47.4%에 달한다. 임병식

일본 소도시에서 느끼는 감상은 늘 두 가지다. 여유로움과 안타까움이다. 일본에 가면 처음 며칠은 한적함과 고요함에 매료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은 애틋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서 이문열은 사라진 고향을 애잔한 시선으로 돌아봤다. 『관촌수필』 역시 고향 상실과 공동체의 기억을 다룬 작품이다. 일본 소도시는 오래전 사라진 고향의 원형을 간직한 공간처럼 느껴진다.

일본 소도시에서 종종 우리의 내일을 가늠한다. 사람보다 빈집이 더 많고, 아이들이 없어 문 닫은 폐교, 하루 승객이 몇 명 안 되는 무인 역, 셔터를 내린 채 수년째 방치된 상점가는 더 이상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홋카이도 유바리(夕張), 아오모리현 히로사키(弘前), 고치현 시만토(四万十), 가고시마현 이부스키(指宿)는 일본 곳곳에서 마주치는 풍경들이다. 한낮에도 사람 그림자 보기 어렵고, 눈에 띄는 이들은 대부분 70~80대 노인들이다. 북적이고 활기찼던 지역 공동체는 그렇게 조용히 늙어가고 있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2025년 기준 빈집 ‘아키야(空き家)’는 약 900만 채다. 1993년 450만 채와 비교하면 두 배 늘었다. 빈집은 결과일 뿐이다. 그 이면에는 출산율 감소, 수도권 집중, 고령화라는 세 개의 흐름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일본 인구는 2008년 1억 2,800만 명을 정점으로 감소세에 들어섰고, 지난해 출생아 수는 76만 명 아래로 떨어졌다.

세금 제도 역시 빈집 문제를 키웠다. 일본은 한동안 집을 철거하면 세금 부담이 커지는 구조였다. 사람이 살지 않더라도 빈집 상태로 두는 편이 유리했다. 일본 정부는 2015년 ‘빈집 특별조치법’을 제정해 빈집에 대한 세제 혜택을 축소했고, 2023년에는 관리 부실 빈집까지 규제를 확대했다. 그러나 집행 속도는 더디고, 수백만 채의 빈집은 여전히 방치 상태다.

결국 젊은 세대는 도쿄로 몰리고 지방에는 노인들만 남았다. 서울 일극 체제가 심화하는 한국과 다르지 않다. 부모 세대가 세상을 떠나면 고향 집은 빈다. 도쿄에 정착한 자식들이 돌아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빈집 비율은 와카야마현과 도쿠시마현이 각각 21.2%로 가장 높고, 가고시마현(20.4%)과 고치현(20.3%), 에히메현(20.1%)이 뒤를 잇는다. 도쿄 또한 예외는 아니다. 도쿄에 100만 채의 빈집이 있다.

지금 일본은 “도쿄만 살아남는 나라”가 됐다. 수도권 인구만 3,700만 명이 넘는다. 오모테산도와 롯폰기, 긴자, 신주쿠, 시부야 거리는 서울 강남이나 명동보다 더 붐빈다. 도쿄 집값은 계속 치솟고, 지방은 공짜로 줘도 원하는 사람이 없다.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아키야 뱅크(빈집 은행)’를 통해 헐값에 빈집을 공급하고 있다. 1엔짜리 주택, 이주 보조금까지 파격적인 조건에도 효과는 미미하다. 교육·의료·교통·일자리 기반이 열악한 탓이다.

구마모토현 야시로시(八代市) 사카모토마치의 석양 무렵 전경. 사카모토마치 인구는 한때 2만 명에서 지금은 10분의 1인 2,000명으로 쪼그라들었다. 65세 이상 고령화율은 무려 50%에 달한다. 임병식

빈집과 폐교, 폐선은 지방 도시가 처한 현실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철도 왕국이 무색하게 운행을 멈춘 지방 노선이 잇따르고, 학생 수 감소에 따른 폐교도 급증하고 있다. 학교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그 지역의 미래 세대와 공동체가 함께 사라진다는 뜻이다.

이런 풍경은 한국에도 낯설지 않다. 지방 대학은 존폐 위기에 놓였고, 농촌과 중소도시에서는 빈집과 폐교가 늘고 있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향하고, 지방은 활기를 잃었다. 일본의 지방 소멸은 어쩌면 우리가 몇 년 뒤에 마주할 미래인지도 모른다.

최근 정부는 ‘생활 인구’ 확대와 공공기관 추가 이전, 광역 교통망 확충을 대안으로 내놓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재정 지원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청년들이 지역에서도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하고, 교육·문화·의료 수준 또한 뒷받침되어야 한다. 결국 지방 소멸은 단순한 인구 문제를 넘어선다. 국가 균형발전과 공동체를 어떻게 회복하느냐 하는 문제다.

일본 빈집이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경제 침체가 아니다. 사람과 공동체가 사라지는 삭막한 풍경 앞에서 무엇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느냐다. 빈집 증가는 단순한 부동산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붕괴가 남긴 잔상이다. 빈집과 폐교는 지방 쇠퇴를 넘어 무기력을 동반한다.

지방 소멸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재난이 아니다. 청년이 떠나고, 아이 울음소리가 사라지고, 학교와 철도가 멈춘 긴 시간 끝에 찾아왔다. 최근 다녀온 일본 아이치현에서도 암울한 전조를 읽었다. 도요타 자동차 도시로 이름난 나고야(名古屋)를 제외한 도코나메(常滑)와 가마고리(蒲郡), 신시로(新城) 같은 소도시는 쇠락했다. 한낮, 구도심 골목을 걷는 내내 착잡했다. 화려한 나고야역과 자동차 산업 뒤편에서 아이치현 역시 조용히 늙어가고 있었다. 일본 전역에 널린 빈집 ‘아키야’는 우리 앞에 먼저 도착한 미래다.

임병식의 일본, 일본인 이야기

서경IN sk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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