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헌법이 묻고 시민이 답하다

대구·부산·태안 김다은 기자 2026. 5. 14.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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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로 15세 이하 초중고생이 참여해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 방향을 숙의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 참여한 여러 인물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숙의 민주주의’ 현장을 톺아봤다.
4월4일 열린 기후위기 대응 공론화 토론회에서 광주 미래세대 참가자들이 의견을 발표하고 있다. ⓒKBS 유튜브 영상 갈무리

국내 ‘공론화 토론회’ 역사에 새로운 장면이 새겨졌다. 올해 3월, 국내 최초로 만 10세 초등학생이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 방향을 숙의하는 공론화 토론회에 참여했다. 15세 이상으로 구성된 ‘시민대표단’ 319명과 초등학교 5학년(만 10세)부터 중학교 3학년(만 15세)으로 구성된 ‘미래세대’ 40명은 전국 다섯 개 권역에서 진행한 기후위기 대응 공론화 토론회에 참여해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3월28·29일, 4월4·5일 네 번에 걸쳐 학습하고, 토의하고, 숙고하며 정부가 가야 할 가장 올바른 온실가스 감축의 길을 제안했다.

2031년부터 2049년까지 정부가 이행해야 할 탄소 감축 목표, 감축 경로, 이행 방안에 대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 이 자리는, 헌법재판소가 2020년 청소년 기후 활동가들이 제기한 기후 소송에 손을 들어주면서 마련됐다. 2024년 8월29일, 헌법재판소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기본법(탄소중립기본법)’의 일부 조항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정부가 2030년 이후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은 것은 미래세대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환경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아시아에서 청소년이 주도한 기후 소송이 승소한 첫 사례였다.

탄소중립법 개정을 위한 과제가 입법부로 넘어왔다. 국회 기후위기특별위원회(기후특위)는 법안 개정에 앞서 국민의 숙의를 통한 의견을 듣고자 올해 2월, 공론화 토론회를 이끌 공론화위원회(공론화위)를 출범시켰다. 토론회는 한국방송(KBS)을 통해 생중계되어 전 국민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를 두고, 만 10세 초등학생부터 60대 노년층까지 동등한 위치에서 학습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숙의 민주주의 실험’이 이루어진 생생한 현장이다. 이 도전적인 실험에 참여한 다섯 명의 인터뷰를 통해 ‘대한민국 최초의 사건’을 재구성했다.

■ “어려우니까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

초등학생 4명, 중학생 4명. ‘미래세대’라는 이름표를 단 앳된 얼굴들이 둥근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3차 공론화 토론회가 열린 4월4일 KBS 대구 방송국 스튜디오 풍경이다. 그런데 장소에 맞지 않게 이들의 테이블 위에 페트병이 하나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작은 거미가 있다. 생물학자가 꿈인 중학교 1학년 고지후 학생(12)은 토론회 중간 쉬는 시간에 조원 친구들과 방송국 앞마당에서 ‘흰눈썹깡충거미’를 잡아 페트병에 넣어두었다. “거미줄을 치지 않고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흰눈썹깡충거미는 “5㎜밖에 안 되는 작은 크기에, 머리에 꼭 눈썹처럼 하얀 줄이 있고 눈이 여덟 개라 귀엽기까지 한” 지후가 좋아하는 곤충이다.

공론화 토론회에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미래세대 대표단 40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지역별로 8명씩 한 조를 이루어 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 다섯 개 권역에서 시민대표단과 같은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각 의제에 대해 토의해 그 결과를 발표했다. 고지후는 그 고단함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루에 6~7시간씩 주말에 네 번이나 토론회 참석을 해야 하니까 숙제할 시간도 없고 너무 힘들 것 같잖아요.” 생활인의 피곤함은 구체적이었지만, 의외로 결심은 대범하게 이루어졌다. “그래도 나 하나 (토론회 참여를) 실천하면 모두가 큰 꿈을 이룰 수 있잖아요. 그래서 참여하기로 마음먹고 엄마에게 말했어요.”

조원 여덟 명은 ‘미래세대’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렸지만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도 경험도 모두 달랐다. 자연을 좋아하는 지후에게 기후위기는 좋아하는 동물과 곤충을 지키는 일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곤충은 진딧물. 사람들은 징그럽고 피해만 준다고 생각하지만 진딧물은 육식 곤충의 먹이가 되는 귀한 곤충이다. 지후는 나무와 물이 있는 곳으로 가족과 자주 나들이를 간다. 비슬산 용연사 계곡도 즐겨 찾는데 그곳에서 물고기와 가재도 잡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가재를 보기가 어려웠다. 수온이 올라가서 가재가 사라진다고 했다. 지후가 걱정하는 건 가재만이 아니었다. 지후는 어릴 때부터 대구시 달서구에 위치한 성서공업단지를 보고 자랐다. “어딜 가든 공단을 볼 수 있어요. 그중에는 검은 연기가 나오는 엄청 큰 건물들도 있거든요. 그걸 보면 몸에 안 좋을 텐데,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래세대도 행동해야겠지만, 어른들도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후는 인터뷰 중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4월17일 대구시 달서구 월서중학교 도서관에서 만난 박수빈(왼쪽)·고지후 학생. 두 학생은 기후위기 대응 공론화 토론회에 미래세대로 참여했다. ⓒ김흥구

아이돌 그룹 팬인 박수빈 학생(15)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앨범을 수백 장씩 사는 팬덤 문화에 피로감을 느끼던 참이었다. 지금은 “앨범은 사지 않고 ‘좋아요’만 누르는” 팬이 됐다. 기후위기는 학교에서 배우는 이론에 불과했다. “수업 시간에 환경 관련 TV 프로그램을 보여주고 끝나면 학습활동도 해요.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환경문제 순서 매기기’ ‘지구에 관한 N행시 짓기’ 같은 거. 이런 활동은 늘 하고 있으니까 기후위기가 심각하다는 걸 모르는 친구들은 없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마약·음주·도박·자전거 안전 이런 주제로 교육을 받잖아요. 사실 기후위기도 그중 하나처럼 느껴지기는 해요. 엄청 피부에 와닿지는 않는다고 해야 할까?” 매년 여름이 오면 대구의 최고기온은 꾸준히 경신됐다. ‘이게 맞나’ 싶지만 자신도 친구들도 더위에 익숙해지는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다.

3월29일 두 번째 토론회 날, 박수빈과 고지후 학생이 참여한 대구권역 미래세대 조에서는 ‘2050년 미래 모습’을 직접 그림으로 그리며 감축 목표에 대한 토의를 했다. 조원들은 온실효과로 지구가 너무 더워져 금성에 가서 살아야 한다거나, 대기질이 너무 안 좋아서 방독면 같은 안전 장비를 이용하지 않으면 야외에서 지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다른 듯 닮은 미래 모습이었다.

점심을 먹고 초등학생 조원은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기후위기 극복법을 얘기하려고 모인 건데 왜 점심시간에 일회용기에 담긴 도시락이 나오는 걸까?” 수빈과 지후는 깜짝 놀랐다. 특히 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수빈은 “나이가 어리니까 뭘 잘 모를 거라는 어른들의 생각은 틀렸다”라는 것을 토론회를 하면서 여러 차례 깨달았다. “초등학생 조원들의 질문을 듣고 ‘아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이 많았다. 사실 어른들은 너무 아는 게 많아서인지 이렇게 하면 이런 일이 벌어질 거야, 저렇게 하면 저런 일이 벌어질 거야 하고 미루는 것 같다. 미래세대들은 오히려 뭐가 옳은지 알면 바로 행동하고, 바로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인다. 추진력이 대단하다.”

흔히 어른들은 기후위기를 둘러싼 과학적 사실과 사회적 갈등을 어린이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지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려운 내용 맞아요. 그런데 어렵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고 저는 열심히 공부했어요.”

‘초등학생을 공론화 토론회에 참여시킬 것인가?’ 토론회 설계를 총괄한 이창훈 공론화위원장은 이 질문이 공론화위에서도 큰 고민이었다고 설명했다. 우려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논의 끝에 초등학생 스무 명, 중학생 스무 명을 미래세대로 토론회에 참여시켰다. 4월13일 만난 이창훈 공론화위원장은 그 결정을 두고 “믿어보기를 잘한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이번 토론회에 ‘시민대표단’이 참여했다. 이때 말하는 ‘시민’은 생활인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의 의사결정에 공동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주권자로서의 시민을 말한다. 이 역할을 우리 초등학생(또한 중학생)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시간을 들여 정보를 접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나이가 어리다 해도 주체적인 시민으로서 의견을 제시할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 사회가 알게 된 것이다.”

미래세대 40명은 네 차례 토론회가 진행되는 동안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자리를 지켰다.

4월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접견실에서 공론화위원회 백서 전달 및 미래세대 대표 면담식이 열렸다. ⓒ국회의장실

■ 전 국민의 기후위기 인식 축소판, 시민대표단 319명

무작위로 선발된 프랑스 시민 150명이 ‘2030년까지 온실가스 40%를 감축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모였다. 기후위기 대응을 명분으로 유류세를 인상하자 노란조끼 시위가 촉발됐고, 결국 정부는 시민들에게 직접 ‘정의로운 방안’을 제안해달라고 요청했다. 2019년, 프랑스 기후시민협의회가 시작된 배경이다. 시민들은 한 번에 2박3일씩 긴 시간을 할애해 학습과 토론을 반복했다. 그 결과, 구체적이고 전문성 있는 감축 방안 149개를 스스로 도출했고, 상당 부분이 ‘기후·회복력법(Loi Climat et Résilience)’에 반영됐다. 흥미로운 것은 참여자들의 태도 변화다. 처음에는 기후 정책에 회의적이던 사람들도 충분한 정보와 토론을 거치고 나면 온실가스 감축에 더 적극적인 입장으로 바뀌는 경향이 나타났다. 아일랜드에도 시민의회라는 공론화 과정이 있다. 시민의회는 동성 결혼 합법화, 임신중지 허용 같은 첨예한 사회적 의제들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이창훈 공론화위원장은 기후위기라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야말로 숙의 과정이 필요한 주제라고 말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슈라면 투표를 통해서도 충분히 의사가 반영될 것이다. 그런데 기후위기는 우리가 매일 겪고 있기 때문에 잘 아는 주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과학적 메커니즘과 이것을 둘러싼 기술·경제적, 정치·사회적 문제들이 무척 다층적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생각을 재고하고, 진지하게 학습하는 숙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더 나은 답을 찾아낼 수 있는 주제인 것이다.”

공론화위원회는 숙의를 위한 기초 토대를 튼튼하게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공론화의 핵심의제에 대한 일반 국민의 여론을 최대한 정확하게 반영한 시민대표단을 모집해야 했다. 먼저 기후위기 대응 방안에 대한 국민들의 전반적 의견을 확인하기 위해 1만명을 대상으로 기초 인식 조사를 했다. 이 조사 결과를 통해 기후위기 대응 및 감축 경로에 대한 국민의 입장 분포를 확인하고 그 비율에 맞춰 360명 표본을 추출했다(이 중 319명이 1차 토론회에 참가했다). “1만명 기초 인식 설문조사 결과, 2050년 탄소중립에 대해 51.2%가 동의했다. 현재 기후위기 상황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69.3%가 동의했다. 이런 비율이 시민대표단에도 똑같이 적용되도록 선발했다.” 기후 이슈에 관심이 많은 고관여층이 과대 대표되지 않도록 장치를 둔 셈이다.

여기에 미래세대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독특한 방법이 더해져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공론화 형식이 만들어졌다. 미래세대 40명을 토론회에 참여시켰을 뿐만 아니라, 시민대표단 300명을 구성할 때 국민 10%에 해당되는 0~14세의 권리를 반영하기 위해 이들의 근세대, 즉 10대(15~19세)와 20대(20~29세) 각각에 0~14세 비중을 50%씩 추가로 반영한 것이다. 공론화지원단장을 맡은 이관후 입법조사처장은 “국회가 특정 법안을 개정하기 위한 공식적인 공론조사 과정에 15세 이하를 참여시킨 것, 또 미래세대를 시민대표단과 구분되게 별도로 구성하고 이들의 의견을 동등하게 입법부에 제시한 것은 사실상 세계 최초”라고 설명했다.

3월28일 열린 1차 토론회에서는 헌법재판소 결정의 의미와 기후위기 실태를 중심으로 한 학습이 이루어졌으며, 2차 토론회에서는 ‘감축 목표’, 3차 토론회에서는 ‘감축 경로’, 4차 토론회에서는 ‘이행 방안’을 다루었다. 2~4차 토론회는 전문가와 토론자의 발표와 조별 토의, 전문가에게 질의응답하는 시간으로 구성됐다.

기후위기 대응 숙의 토론회를 총괄한 이창훈 공론화위원장이 4월13일 <시사IN>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흥구

■ 기후위기는 이념 아닌 경제문제

4월14일 충남 태안에서 만난 김은지씨(38)는 “면면이 다른 사람들과 한 조가 되어서 재미있었다”라고 토론회를 회상했다. 화력발전소가 있는 태안에서 태어난 그는 12년간 춘천과 원주에서 환경운동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환경운동을 했다고 ‘빨갱이’라고도 불렀다. 하지만 그는 개발이 아니라 숲과 땅을 ‘지키고’ ‘유지하자’는 의견을 가지고 있으니 “환경에 대한 태도로만 보면 보수”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태안으로 돌아온 것은 2021년. 지금은 카페 겸 서점을 운영한다. 어린이들을 위한 생태·환경 그림책이 눈에 잘 띄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무실은 없지만 그는 ‘환경문제상담소’의 소장이기도 하다. “시골에 사는 어르신들은 환경문제가 생겨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직접 찾아오시기도 하고, 전화를 걸어 상담소 문을 두드리신다.” 누군가 마을 땅에 환경폐기물을 파묻은 것 같다는 연락을 받으면 정부에 민원을 넣어 직접 대응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석탄재를 매립하는 저수지 인근 마을 주민들을 대신해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의견서를 써서 군에 보내주기도 했다.

임신 5개월째인 김은지씨는 몇 달 뒤면 세상에 나올 뱃속의 ‘미래세대’와 함께 ‘환경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설렘’으로 2주간 주말마다 기후위기 대응 공론화 토론회를 찾았다. 오전 9시에 시작하는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대전 KBS까지 가야 했다. 그곳에서 평소 만나지 못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조원으로 만났다. ‘쓰레기 분리배출이 유일한 실천’이라는 30대 주부, ‘기후위기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라는 전역한 20대 남성,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초등학생 딸을 둔 40대 직장인과 퇴직 후 귀촌한 50대 중년, 유튜브로 정보를 접하며 토론회마다 ‘한 가지씩 꽂히는 내용을 설파’한 60대 어르신 등이다.

“어르신들이 유튜브로 다양한 정보를 접하다 보니, 환경 공부도 유튜브로 하시더라. 어떤 날은 이산화탄소가 나쁜 게 아니고, 이산화탄소로 온실효과가 생겨서 사람들이 지구에 살 수 있는 거라고 주장했다. 조별 토의할 때 규칙이 있는데, ‘상대방이 말할 때 끼어들지 않는다’이다. 다 듣고 나서, 마음 상하지 않게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아서 생기는 일들에 대해 설명을 해드렸다. 이런 일이 하도 반복돼서 나중에는 다들 단련되는 분위기였다(웃음).”

4월14일 충남 태안에서 기후위기 대응 공론화 토론회에 시민대표단으로 참여한 김은지씨를 만났다. ⓒ김흥구

2018년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토론회에 참여해본 적 있는 그는 당시의 격렬했던 토론 분위기와 비교하면 기후위기 대응 공론화 토론회는 차분히 공부하고 생각하는 시간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질문을 계기로 조원들의 생각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퍼져 나가는 ‘다이내믹한 순간’도 있었다. 전기요금에 관한 대화가 그랬다. “조원 중 한 분이 온실가스를 초기에 많이 감축하면 전기요금이 세 배나 오를 건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주저할 수 있는 얘기였지만, 조원 대부분이 ‘필요하면 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더라. 그러면서 내 뱃속에 아기가 있으니까 ‘나는 얼마 안 살고 떠나더라도 아이가 살아갈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어느 정도 손해를 보더라도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지가 조원들 사이에 커지는 게 느껴졌다.”

전기요금에 가장 동요한 건 20대 대학생이었다. 2031년부터 온실가스 초기 감축에 들어가며 전기요금이 인상되면, 30대부터 50대까지 한창 ‘돈 버는 나이’에 자기 세대만 손해를 보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런 대화를 통해 김은지씨는 기후위기 대응법을 ‘이념 문제’로 보던 과거의 관점과 달리, 이를 ‘경제문제’로 바라보는 시민들이 무척 많이 늘었다는 점을 실감하기도 했다. 감축의 속도와 방향에 따라 내가 지불해야 할 비용이 얼마인지, 일자리 변화에 따른 중장기적 손익은 얼마인지에 관심이 컸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의 비용’을 짐작하기 위한 꼼꼼한 계산이기도 했다.

기술 투자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탄소포집 기술이 발전하면 탄소배출 저감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는 낙관적 기대가 나왔다. 하지만 어떤 관점으로 기후위기에 대해 말하든, 정권이 바뀌어도 환경정책이 통일성 있게 이어져야 한다는 의견은 같았다. 예상하고 대비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경제적’인 일이었다.

김은지씨는 토론회의 아쉬운 점으로 “농지와 산림 등 탄소 흡수원의 중요성을 더 많이 다루지 않은 것”을 꼽았다.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언제였을까? “토론회에 참석한 모든 시민대표단이 의견을 내는 10대 청소년을 향해 ‘어린애들’이라 부르지 않고 ‘미래세대’라고 존중하며 호명하던 순간”이었다. 숙의를 위해 모인 모든 이들이, 서로 똑같은 권리와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학습의 시간이었다. 토론회의 부수적 효과다.

숙의의 시간은 분명 많은 사람들을 조금씩, 혹은 크게 변화시켰다. 토론회 전 1차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같은 문항으로 토론회가 끝난 뒤 2차 설문조사를 했다.

숙의를 거친 이후, 다양한 항목에서 ‘잘 모르겠다’라는 응답이 줄어들었다. 예컨대 감축 경로를 묻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는 응답이 1차 조사 결과 4.8%였지만, 2차 조사 결과 0%가 되었다. 감축 목표에 대한 질문에도 ‘잘 모르겠다’는 응답은 5.1%에서 0%로 줄었다. 의견이 구체화되고 분명해졌다. 그 외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많아졌다. 탄소중립 추진 과정에서 ‘누구라도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는 정의로운 전환을 고려해야 한다’는 응답은 1차 조사 결과(21.4%)와 2차 조사(51.3%)를 비교하면, 29.9%포인트나 증가했다.

공론화 토론회 결과, 시민대표단의 다수는 우리나라가 전 지구적 감축 경로 이상의 책임을 부담해야 하고(74.9%), 미래에 부담을 전가하지 않도록 조기 감축 경로를 택해야 한다는(77.9%) 결론을 내렸다.

이준이 부산대 교수는 공론화 토론회 발제자로 나서 여러 감축 경로의 과학적 의미를 설명했다. ⓒ김흥구

■ 외부의 힘이 가해져야 속도와 방향이 바뀐다

이준이 부산대 기후과학연구소 교수는 기후과학자다. 2023년 발간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6차 평가보고서 책임 주저자로 참여했으며 현재 IPCC 7차 평가보고서 ‘시나리오 챕터’ 책임 주저자로 선정돼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전 세계 과학자 수백 명이 수년에 걸쳐 만드는 이 보고서는 세계에서 가장 공신력 높은 기후위기 종합보고서로, 각국 정부의 기후 정책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2028년 발간 예정인 IPCC 7차 보고서 챕터 책임 주저자(Coordinating Lead Author)로 참여하는 국내 전문가는 이준이 교수와 정태성 국립재난안전연구원 팀장 두 사람뿐이다. 두 사람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기후위기 대응 공론화 토론회에서 시민들에게 기후위기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알려주는 발제자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준이 교수는 IPCC 6차 종합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바탕으로 두 번째 의제인 ‘감축 경로’에 대한 설명을 맡았다. △초기 감축 △매년 비슷하게 감축 △후기 감축 등 각 경로의 과학적 의미를 설명했다. 공론화 토론회 전 진행한 1차 조사에서 시민대표단 51.2%가 초기 감축 방식을 선호했는데 토론회를 마친 뒤 실시한 2차 조사에서는 초기 감축 선호가 77.9%로 늘었다.

4월13일 열린 국회 기후특위 전체회의에서는 공론화 결과 보고가 진행됐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초기 감축을 지지한 시민들의 ‘극적인’ 인식 변화를 두고 의혹을 제기했다. 이 자리에서 김용태 국민의힘 의원은 “이준이 교수는 산업계에서 요구한 C형 경로(후기 감축형)를 ‘진전의 원칙(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는 이전 목표 대비 진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파리협정 제4조 원칙)’만을 근거로 ‘정책적으로 선택하기 어려운 경로’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선택지에서 배제하자는 취지 아니냐”라고 따졌다.

이준이 교수는 감축 경로를 정할 때 우리가 참고해야 할 ‘나침반’은 명확하다고 답했다. 탄소중립기본법이라는 명확한 법적 근거와, IPCC 보고서를 통해 입증된 과학적 근거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C형 경로는 기존 감축 경로 대비 목표 수준을 후퇴시키는 경로로, 진전의 원칙을 담고 있는 탄소중립기본법 제8조 제4항을 위배하는 것이다. 정부가 선택할 수 없는 경로다. 공론화를 할 때 균형(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과학적으로 합의된 결과는 확실하다. 그런 과학적 판단을 밝히는 것을 ‘편향’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3월25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국회 기후특위 공론화위 의제숙의단 시민사회 참여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의제숙의단에서 사퇴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환경운동연합 제공

시민사회에서는 C형 경로를 공론화 토론회의 감축 경로 선택지로 포함한 사실 자체를 두고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토론회가 개최되기 사흘 전인 3월25일, 토론회에서 논의할 의제를 설정한 의제숙의단 8인은 공동 사퇴 기자회견을 열었다. C형 경로는 미래에 감축 부담을 전가하지 말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위배되는 위헌적 감축 경로이며, 의제숙의단에서 이를 시민들에게 선택지로 제시해서는 안 된다고 다수 의견으로 권고했음에도 공론화위가 이것을 선택지에 포함했다는 점을 항의하는 자리였다.

이준이 교수는 사회의 선택이 과학적 답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경우 정치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초기 감축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충격이 너무 크고, 완화 비용이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한다면 법적·과학적으로 명확한 경로가 있어도 그것을 선택하지 못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없다는 그 완화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명확히 제시하고 국민들을 설득해야 한다. 지금은 그런 정보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초기 감축을 하면 감당할 수 없는 경제적 비용이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준이 교수는 토론회가 끝난 후 시민들로부터 질문 메일 60여 통을 받기도 했다. 토론회를 마친 소감은 명료했다. “시민대표단 319명과 미래세대 40명은 토론회를 통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최선을 다해 마쳤다. 이러한 시민들의 노력에 정부와 국회가 최선을 다해 답해야 한다.”

‘뉴턴의 제1법칙’은 관성의 법칙이다. 정지된 물체는 계속 정지된 상태로 머문다. 하지만 외부의 힘이 가해질 때, 물체의 상태는 변화한다. “어떤 힘을 받느냐에 따라 물체가 움직이는 속도가 달라지고, 방향도 바뀐다. 이번 공론화 토론회의 결과가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우리 사회의 관성을 바꿀 강력한 외력이 될 수 있길 바란다(이준이 교수).”

대구·부산·태안 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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