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우리는 저마다 ‘이야기’ 가진 인생의 주인공
우리는 서로에게 나침반… 당신도 누군가의 가장 극적인 사람

“그 사람은 말이죠, 색을 외우는 사람이에요.”
“이 배우가 누군지 아세요? 10년 전 우리 공연에 관객으로 왔다가 배우의 꿈을 꾼 고등학생이었어요.”
“나는 이 극장이 좋아요. 예전에 이 극장에서 뮤지컬을 보다가 눈물을 흘렸는데, 옆자리 관객이 조용히 티슈를 건네주었거든요.”
나는 사람을 소개할 때 이름과 직업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마다 그 사람의 가장 극적인 한 장면을 들려준다. 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의 이야기를 몇 시간이 넘도록 듣고 또 들었다.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은 더 좋았다. 좋은 사람을 좋은 사람에게 소개해 주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취미였다. 서로 모르던 두 사람이 내가 들려준 이야기 한 자락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자기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일이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 날이면, 집에 돌아와 잠이 들 때까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침대에 누워 계속 떠올렸다.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마음 속에 사람의 방이 한 칸씩 늘어났다. 책장 한 칸에 책 한 권이 채워지듯이.
그렇게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며 살다 보니, 어느새 신문에까지 글을 쓰게 되었다. 5년 전, 칼럼을 연재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잘 들려주는 사람이긴 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명씩 차근차근 들려드리자고. 그렇게 5년이 흘렀다. 한 편의 글을 쓸 때마다 한 사람씩 떠올렸다.
적록색약을 숨긴 채 10년 동안 빨간색 목도리와 초록색 코트를 외워온 조연출을 떠올렸고, 비탈길로 떠나신 외할머니가 마루 위에 비벼두신 간장밥 한 그릇을 떠올렸다. 매일 저녁 마주 앉아 ‘후후’와 ‘후릅’으로 대화하셨던 아버지를 떠올렸고, 끝내 나오지 않은 그 친구 때문에 교실의 모두가 노래를 부르며 박수를 쳤던 어느 봄날을 떠올렸다. 결혼식 단상에 처음으로 조명을 받으며 “미안해요, 살면서 한 번도 이런 빛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라고 나직하게 말씀하신 어머님을 떠올렸고, 어둠 속에서 말없이 티슈 한 장을 건네주었던 옆자리의 관객을 떠올렸다.
5년의 시간이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내가 쓴 글을 읽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신 독자분들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글을 쓰는 내내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무대 위에 만들어낸 인물들만이 극적인 것이 아니었다. 가짜 산타인 걸 알지만 하루만 속아준 어린이와, 택시에 탄 손님에게 자신의 시를 권하는 기사님과, 책받침을 축구공처럼 오려서 책상 위에 자기만의 오락실을 만들어내던 친구들이 진정으로 극적인 인물들이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잘 전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그러니 마지막 글을 빌려, 이 글을 읽고 독자분들께도 같은 말을 전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이야기 속 주인공이다. 우리가 무심코 비벼준 간장밥 한 그릇이, 무심코 끓여준 소고기무국 한 그릇이, 무심코 건넨 티슈 한 장이, 누군가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놓았을 수도 있다. 누군가 당신에게서 받은 작지만 소중한 위로 하나를 나침반 삼아서, 10년이 넘도록 자신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명심하면 좋겠다. 우리 모두는 내 인생의 주인공일 뿐 아니라, 어쩌면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등장하는 멋진 주인공일 수도 있다고. 당신은 어쩌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가장 극적인 사람으로 활약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이 글을 읽고 계신 모든 분들이 오늘도 내일도 저 머나먼 미래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누군가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열심히 기원한다.
※‘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과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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