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웃음 되찾고 직장도 얻었어요”···집 밖에 나와 반찬 만드는 고립 중년 남성들

“오늘의 메뉴는 호박나물이랑 열무 얼갈이김치입니다. 여름철 김치의 제왕 열무김치!”
지난 12일 오후 서울 양천구 신정종합사회복지관(복지관) 조리실에 남성 10여명이 모여 투박한 칼질을 시작했다. ‘노동가’로 경쾌한 트로트 가락이 흘러나왔다. 앞치마를 두르고 모여앉아 열무와 얼갈이를 손질하는 이들은 중장년 독거 남성들이다. 대파를 썰던 한 남성이 “아우 매워, 아이고 눈물 나”라며 너스레를 떨자 웃음이 터져나왔다.
매주 화요일 이곳에서는 고독사 위험군의 중장년 남성들이 참여하는 ‘공유냉장고’ 활동이 펼쳐진다. 사회와 단절된 이들이 매주 함께 반찬을 만들고 이웃들과 나누는 자리다. 1인 가구의 고립을 해소하고 중장년 남성의 고독사를 예방하기 위해 복지관이 2022년부터 시작한 사업이다.
고시원·단칸방에 홀로 살며 끼니를 거르거나 과도한 음주를 하던 이들은 공유냉장고 활동으로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고 했다. 홀로 키우던 두 딸이 독립한 후 고립감을 느끼던 유동근씨(63)는 “활동 참여를 계기로 다시 세상에 나와 직장까지 얻게 됐다”고 말했다.
과거 유씨는 집 안에 술병이 쌓이고 3개월치 가스비가 밀려도 “자존심 때문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문 앞에 걸린 복지관 안내문을 보고도 나오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는 그는 “이 활동으로 삶이 변했다”고 했다.
4년 전부터 활동해온 이진희씨(58)도 20년 가까이 “한 달에 말을 한두 마디 할 정도”였던 고립 생활을 극복했다. 이씨는 “집안일을 돕거나 기부받은 물품을 서로 나누는 문화가 (생활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며 ”과거엔 자존심 상해했을 일도 이제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니 ‘고맙다’며 웃는다“고 말했다.

이들이 만든 반찬은 홀로 사는 중장년층이 많은 인근 고시원과 가게 8곳에서 무료로 제공된다. 복지관 인근 슈퍼마켓 사장 유은경씨는 4년 가까이 가게 한편에 공유냉장고 반찬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유씨는 “반찬이 들어오면 기다렸다는 듯 바로 가져가시는 분들이 많다”며 “반찬 한 통이 이분들에겐 생활의 활력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공유냉장고 활동은 참가자들에게 서로의 보호자가 되는 연결고리가 됐다. 위기의 순간에는 서로 ‘생명줄’이 되기도 했다. 손형래씨(69)는 최근 알코올성 치매를 앓는 동료의 목숨을 구했다. 그는 “술에 취해 죽으려고 한다”라는 전화를 받자마자 복지사와 함께 집으로 달려가 그를 구했다.
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홍수진씨는 참가자들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참가자들이 서툰 표현 방식 때문에 사소한 오해로 다투기도 했다”며 “지금은 표현이 조금 거칠어도 ‘친해지고 싶어서 저런다’라고 웃고 넘길 만큼 화기애애해졌다”고 말했다.
사회적 고립에 따른 위기는 홀로 사는 중장년 남성들에게 더 크게 발생한다. 이진희씨는 “남성들은 밖으로 나가 ‘나 힘들다’고 말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4년 고독사 사망자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2023년 고독사 사망자 3632명 중 약 80%가 남성이었고, 절반 이상이 50·60대였다.
성범룡 복지관 과장은 “고립된 중장년 남성들이 밖에 나와 변화를 체감해야 그 (삶의) 동력이 사회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성 과장은 “이들에게 구체적 역할을 주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임한다”며 “이들의 변화를 뒷받침할 지역사회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은송 기자 ssong@kyunghyang.com, 김태욱 기자 wook@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상헌의 밸류체인지]삼전·닉스, 언제 팔까 고민되시죠…‘피크아웃 신호’ 이익 규모보다 이
- 술 마시고 테슬라 자율주행 켠 만취운전자···음주운전일까? 아닐까?
- ‘준강제추행 미수’ 30대, 실형 선고 후 법정구속되자 흉기로 ‘자해’
- [르포]“웃음 되찾고 직장도 얻었어요”···집 밖에 나와 반찬 만드는 고립 중년 남성들
- 8% 오르내리며 롤러코스터 탄 삼성전자 주가…노사 협상 결렬 여파? 외인·개인 줄다리기 탓?
- [단독]“지잡대 나왔냐” “어머니 공장서 일해”···‘갑질’ 일삼은 용산구의회 전문위원
- [단독]검찰, 모스 탄의 “이 대통령 살해 연루” 허위 발언 재수사 요청···앞서 경찰은 각하
- 용기와 연대의 ‘98번’···‘현역 사상 첫 커밍아웃’ NBA 선수 제이슨 콜린스 별세
- 12명 정원인데 40명 태우고 술 마시고 키잡기···바다 안전 위협한 542명 적발
- [선택! 6·3 지방선거] 인천공항 품은 후보가 초대 영종구청장 꿰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