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100년 이웃 ‘차이나타운 골목’ [알보달보 인천지역유산·(14)]
무대와 현실, 이렇게 ‘차이나’
청국 조계지 시절 ‘中華街’ 상업 중심지로 성행
명절 의식 치르며 공동체 문화 이어간 ‘의선당’
영사관 있던 영화가 골목, 소학교·중고교 위치

2015년 개봉한 김혜수, 김고은 주연의 영화 ‘차이나타운’은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을 배경으로 한 느와르다.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으로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 속에서 스토리가 전개된다. 여성 중심 느와르물이라는 점에서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 영화와 달리 실제 인천 차이나타운은 사람들로 붐비는 활기찬 분위기다. 인천지역유산으로 지정된 차이나타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어떨지 궁금했다. 서울·경기지역에 사는 지인들에게 ‘차이나타운’ 하면 어떤 느낌인지 묻자 조심스레 ‘무서운 곳 아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으레 수도권에 위치한 차이나타운은 분위기나 정서가 다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천 차이나타운이 간직한 이야기를 찬찬히 뜯어보면 달리 보이게 된다.
■ 인천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화교의 거리

지난 11일 오전 찾은 인천 중구 북성동 차이나타운 골목. 경인전철 1호선 인천역에서 내려 광장으로 나오면 도로 건너편 패루(牌樓)에 한자로 ‘中華街(중화가)’라고 적힌 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개항기 청국 조계지 시절 중화가는 음식점과 상점이 모인 상업 중심지로 성행했다.
패루를 지나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차이나타운을 대표하는 유명 중화요리 식당들이 골목을 사이에 두고 길게 늘어서 있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요리사들이 손님을 맞기 위해 분주하게 식자재를 손질하는 듯, 도마 위 칼질하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온다.
중화가 중심부에는 ‘의선당’이라는 사당이 있다. 차이나타운 화교들은 이곳에서 춘절과 중추절, 쌍십절 등 명절이 돌아오면 단체 참배와 제례를 치르며 화교 공동체 문화를 이어왔다. 매년 열리는 축제 행사에서는 가면극이 열리고 폭죽놀이가 진행된다. 올해 역시 4~5월에 ‘차이나는 문화공연’이라는 이름으로 주말마다 사자춤과 용춤 등 전통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축제를 통해 화교들은 시민·관광객이 어울리는 화합의 장을 펼친다.
차이나타운에서 공연이 열릴 때마다 일종의 객석 역할을 하는 장소가 있다. 차이나타운 골목과 자유공원을 연결하는 ‘황제의 계단’이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의 ‘사진 스폿’으로 자리 잡은 이곳은 ‘계단을 오르면 복을 얻어간다’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계단을 끝까지 오르면 ‘선린문’이라는 패루가 등장하고, 곧장 자유공원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온다.
자유공원을 뒤로하고 삼국지 벽화거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청국 조계지 시절 ‘계후가’라는 이름이 붙었던 이 거리는 개항기 당시 청국 고위 관료와 상류층이 거주하는 주거지역이었다. 이곳에서는 인천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높은 건물이 없었던 개항기 무렵에는 인천 앞바다를 조망할 수 있었던 만큼 상류층의 주거지역으로 인기가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지 벽화거리를 지나 조계지 계단으로 내려오면 ‘영화가’ 골목에 이른다. 이곳은 현재 인천화교협회 건물과 화교소학교·중산중고등학교 건물이 모여 있다. 과거에는 청국 영사관도 이 골목에 있었다. 한마디로 인천 차이나타운에 거주하던 화교들의 ‘행정 타운’이었던 셈이다.
학교 앞을 지나가니 화교 학생들이 저마다 악기를 들고 합주하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웃고 떠들며 악기를 다루는 학생들의 모습은 여느 학교 분위기와 다를 게 없다. 영화·드라마 속 차이나타운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곳에 사는 화교들 역시 인천 사람으로서 지역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일제강점기·한국전쟁 거치며 대만계 화교 중심
中 본토 침략 당시 조선인과 대일투쟁 벌인 역사
매체 통해 부정적 묘사·소비되는 점 아쉬움 남아
■ 개항기의 ‘국제도시’ 차이나타운

인천 차이나타운의 기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2년 10월 조선과 청나라가 맺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따라 중국인의 조선 이주가 공식 허용됐다. 이를 근거로 1884년 현재의 차이나타운 골목에 청국 조계지가 설치됐다. 국내 첫 조계지가 인천에 들어선 것이다.
조계지가 들어설 무렵 200여명도 되지 않았던 화교 인구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1만명을 넘어섰다. 조선과 청나라의 장정 체결 이후 상하이와 옌타이를 거쳐 인천으로 들어오는 배편이 생기자 화교 상인들이 대거 인천으로 들어오면서 양국 간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당시 조선 최대 규모의 무역상 ‘동순태’를 운영한 화교 담걸생(譚傑生·1853~1929)이 인천을 주 무대로 활약한 시기도 이때다.
담걸생을 비롯한 화교 상인들은 인천을 동아시아의 무역 중심지로 성장시켰다. 중국을 비롯해 홍콩, 일본에서 들어온 각종 잡화가 인천을 거쳐 조선 전역으로 퍼졌다. 인천은 자연스럽게 조선 제1의 무역항으로 자리매김했다. 청국 조계지가 형성된 지 10년 후인 1893년 기준 인천항 전체 수입 중 화교 상인을 통한 수입액은 일본 상인보다 2배가량 높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람과 물자가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청국 조계지는 조선과 청을 연결하는 외교 네트워크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무역뿐 아니라 금융·숙박·관광 등 서비스업도 성행했다. 농어업 중심의 생산 활동이 오랫동안 이어졌던 조선에서 인천항과 차이나타운을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이 태동한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송도·영종·청라국제도시와 같은 경제자유구역의 위상을 지닌 국제도시 역할을 했다.
■ 인천의 오랜 이웃 ‘화교’

국내 차이나타운을 조선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인천 차이나타운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중화민국, 즉 대만계 화교들이 중심이 돼 생활권을 형성해 왔다.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뒤 중국 본토로 침략하는 과정에서 당시 인천에 거주하던 화교들도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등 조선인들과 함께 대일(對日) 투쟁을 벌여온 역사도 있다.
일제 패망 이후 중국에서 벌어진 국·공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고 1949년 중국에 공산당 정부(중화인민공화국)가 들어섰다. 그 이듬해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인천에 머물던 화교들은 중국 대륙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실향민이 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대신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중화민국(대만)의 국적을 받으면서 대만 사람의 신분이 됐지만, 정작 한국의 1·2세대 화교들은 대만과 관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천의 화교들은 대만으로 떠나는 대신 대대로 삶의 터전을 이어온 한국을 택했다. 한국인들과 함께 인천 사람으로 살아온 지도 어느덧 140년을 훌쩍 넘겼다. 전 세계 각국의 차이나타운은 중국인들끼리 모여 사는 폐쇄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사례가 많지만, 인천 차이나타운은 지역사회와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부정적으로 편향돼 있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곳에 거주하는 화교들 역시 차이나타운이 각종 매체를 통해 부정적으로 소비되는 점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동시에 100년 넘게 이곳에서 대를 이어 생활해온 화교들의 역사와 활동을 좀 더 발굴하고 연구하는 작업도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주희풍 인천화교협회 부회장은 “인천의 화교 역사에 대해 잘못된 기록들이 여전히 많이 있고 관련 자료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는 점이 아쉽다”며 “차이나타운에는 지금도 발굴되지 않은 역사적 자료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이어 “차이나타운 골목의 인천지역유산 지정을 계기로 화교와 차이나타운에 대한 연구가 좀 더 활발하게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달수 기자 dal@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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