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없는 농담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김은형 | 문화데스크
3년 전 봄 나는 열하루 동안 떠난, 그러니까 내 인생 최장기간 체류한 휴가지에서 이 칼럼을 마감하며 신세 한탄하고 있었다. 1년 가까이 준비하고 예약하고 계획을 짠 여행지의 첫날부터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온 일을 하느라 몸은 피곤했고 신경은 예민해졌다. 가족 간에 싸움이 일어났다. 여행은 그렇게나 계획하면서 여행을 떠나기 전 끝내야 할 일에 대한 계획은 전혀 없었던 나의 인지 부조화가 빚어낸 참사였다.
지금 나는 3년 전 그날을 그리워하고 있다. 좀 이따가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짐을 싸야 하는 가방은 아직 창고에 있고, 글자를 채워야 하는 화면은 오늘따라 새하얀 게 미백치약 광고 같다. 휴양지에서 짐 풀고 일했던 날은 낭만적인 추억으로 남아 있고 지금은 히치콕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서너시간 뒤 터지는 폭탄 시계가 발아래서 째깍째깍 돌아가는 느낌이다.
쌓인 일을 처리하다가 머릿속은 텅 비고 초조한 마음에 챗지피티를 켜 이 칼럼에 어울리는 소재와 근거 자료를 몇개 제시해보라고 썼다. “이게 딱 김은형 칼럼 감성이 나오는 지점” “김은형 특유의 생활감으로 쓰면 엄청 잘 나올 주제” “이런 건 김은형 스타일이 제일 잘 건드리는 소재 중 하나”.
챗지피티 원래 이렇게 재수 없는 거였어요? 영혼 없는 비서 코스프레를 하면서 ‘네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바로 나’라는 식의 평가질 말투라니, 언젠가 알고 지냈던 수동공격형 인간을 다시 만난 듯해 기분만 상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내 패만 까 보인 것 같아 더 열 받았다. 진짜 하산할 때가 되었다.
사실 나는 이날을 기다려왔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언젠가부터 칼럼을 쓰고 있으면 마지막회에 하고 싶은 말들만 잔뜩 생겨났다. 누가 검열을 하는 것도 아닌데 쓰다 보면 진심을 조금씩 비껴 나가는 경우가 많았고, 안전한 교훈에 도달하려는 나를 발견했다. 징징거리는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려는 위로의 달달함을 갖추려고 나도 모르게 애를 쓰는 적도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단호한 태도로 과감하게 위로도 교훈도 티끌만큼도 없는 글, “제발 자기가 제일 불쌍한 척 좀 하지 말자”거나 “백날 교훈 찾고 의미 찾아 봤자 아무것도 개선되고 있지 않잖아”라는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정말 쓰고 싶어서 담당자에게 마지막회는 꼭 쓰고 싶다고 당부했던 마지막에 도착했는데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꼭 쓰고 싶었던 말들이 타노스의 핑거스냅으로 가루가 되어버린 어벤져스들처럼 스르륵 사라져 버린 것 같다. 중요하다고 여겼던 말들이 다 하찮게 느껴진다.
사실 노년을 어떻게 맞이하자거나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자는 등은 관심사이기는 하나 여전히 회의적인 주제다. 3년 전의 경험이 나에게 아무런 교훈을 주지 못한 것처럼 아마도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 같다. 그때 좀 더 부지런하게 일하고 느긋하게 쉬었어야 하는데, 그때 자식에게 심한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때 친구들에게 좀 더 자주 연락했어야 하는데, 그때 칼럼 마감은 미리미리 했어야 했는데….
교훈이 필요 없는 삶에서 남는 건 무엇일까. 얼마 전 백상예술대상에서 박찬욱 감독은 수상 소감을 말하며 “화가 나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도 끊임없이 농담을 시도하고 주변 사람을 웃기려고 하고 자신을 비하하는 농담을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출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내가 5년 동안 이 칼럼을 쓰면서 하고 싶었던 건 노년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아니라 중년에 깊이 팬 미간의 11자 주름을 잠시라도 펼 수 있는 실없는 농담과 싱거운 웃음이었다. 인상 팍 쓰고 ‘엄근진’의 전형이라고 할 신문의 오피니언 면을 읽는 이들에게 “얼굴 좀 펴시라, 당신의 11자 주름은 날리는 강아지 털만큼도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중년의 머리에 꽉 차 있는 쓰잘데없는 ‘엄근진’에 작은 구멍을 내보고 싶었다.
싱거운 웃음이 세상에 지니는 옅은 호의만이 깨달음으로 가득 찬 글로도, 죽비 같은 경험으로도, 천지개벽으로도 바꿀 수 없는 내 삶에 그리고 (아니라고 주장하는) 당신의 삶에도 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모두 건강하시길. (끝)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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