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눈으로 탐구한 대만의 정체성…소설 '꽃 피는 시절'
![대만 소설가 양솽쯔. [ⓒ YJ Chen.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13/yonhap/20260513151510666alxi.jpg)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백합(百合) 소설이란 문학 장르가 있다.
일본 대중문화에서 나온 장르로, 보통 여성 인물 사이의 우정이나 사랑, 혹은 우정과 사랑에 걸쳐 있는 어떤 감정적 친밀감을 다룬 서사를 말한다.
순수문학 팬에겐 다소 생소한 개념일 수도 있고,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소수만의 하위문화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런 백합 소설에 대한 인식을 바꾼 이가 있다. 역사 소설과 여성 서사를 결합한 '역사 백합 소설'이란 장르를 개척한 대만(타이완) 작가 양솽쯔다.
'1938 타이완 여행기'로 2024년 전미도서상 번역 부문을 수상한 데 이어 202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양솽쯔의 첫 장편소설이자 문학적 출발점인 '꽃피는 시절'이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양솽쯔는 '꽃 피는 시절'에서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1920년대 대만으로 돌아가 대만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역사 속 잊힌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해낸다.
작품은 '타임슬립'이란 다소 빤한 장르적 설정으로 시작한다.
대학 졸업을 앞둔 양신이는 어느 날 대학 캠퍼스의 호수에 빠지는 사고를 겪는다.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사방팔방이 낯설다.
같은 대만은 대만이되, 시대를 훌쩍 거슬러 1926년 타이중의 유력 가문인 양씨 집안의 막내딸인 여섯살 양쉐니(쉐쯔)로 눈을 뜨게 된 것.
중국어가 아닌 대만어와 일본어를 사용하는 1920년대 대만은 양신이에게 오래된 신세계나 다름없다.
그렇게 양씨 가문의 대저택 '지여당'에서 살게 된 양신이는 차츰 1920년대 삶의 방식을 익히며 양쉐니로 살아간다. 또 일본인 화족 집안의 마쓰가사키 사키코(샤오짜오)를 만나 각별한 우정을 쌓는다.
그러던 중 앞서 일본으로 유학 간 오빠 후이펑이 음독자살을 시도하자 집안의 큰 어른인 할머니는 가문을 이끌 사람으로 후이펑이 아닌 양쉐니를 택한다.
사키코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미래를 만들어가겠단 꿈과 지여당을 지켜야 하는 운명 사이에서 양쉐니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꽃피는 시절 [마티스블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13/yonhap/20260513151510865kyla.jpg)
작가는 철없는 막내딸에서 지여당의 기둥이 되어가는 양쉐니의 성장을 통해 역사 속 잊힌 여성의 목소리를 현재로 불러낸다.
특히 '꽃피는 시절'은 1920년대 대만의 풍속을 생생하게 그려낸 생활사 보고서라 할 만하다.
작가는 지여당의 식사 장면, 철마다 보양식을 만드는 모습, 다양한 간식과 제사 음식을 통해 대만 사람들의 진짜 옛 삶을 보여준다.
또 일제강점기 대만을 마냥 어둡고 비참한 곳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쇼와 9년, 서기 1943년. 이것은 양신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시대다. 옛날에 양신이는 일제강점기 50년이 끊임없는 압박과 고난, 그리고 파란 많은 전쟁의 연속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양쉐니의 두 눈으로 지켜본 것은 상상과는 아주 다른, 꽃이 흐드러지고 잎이 무성한 황금시대였다."(265쪽)
작가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해 "타이완인의 정서 속에는 혐오와 그리움이라는 양극단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며 "현대를 살아가는 타이완 사람의 관점에서 예전의 타이완 사람들이 얼마나 복잡한 시대적 상황에 직면했었는지 정리하고, 우리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탐색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작가는 "일제의 억압과 수탈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화민국 정권이 타이완 사람에게 미친 해악은 전자를 완전히 압도한다"며 "바로 이 사실이, 타이완 사람이 일제강점기 경험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과거를 미화하며 마냥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빛과 그림자, 아름다움과 추악함, 꽃과 총포, 강성한 제국이 확장한 시야와 식민지가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할 구속은 동시에 존재했다. (중략) 그것은 꽃 피는 시절이자 또한 꽃 지는 시절이었다."(265∼266쪽)
작가는 '일제강점기'라는 짧은 말 한마디에 담을 수 없는 삶의 구체성을 담아낸다. 꽃처럼 무수히 피고 지며 끝없이 이어온 대만의 역사적 정체성과 여성의 삶을 그려낸 작품이다.
마티스블루. 문현선 옮김. 528쪽.
kih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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