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아트페스티벌 디렉터' 그레이스 랭 “K팝과 클래식 만남 기대”

최한종 2026. 5. 1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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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대표 공연축제 이끈 프로그램디렉터
내년 K팝·오케스트라 협업 구상차 방한
홍콩의 변화와 정체성 축제에 담아내
“세계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원동력”
이솔 기자

“K팝 아티스트들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홍콩아트페스티벌 무대에 오르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관객에게 새로운 감각을 안겨줄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그레이스 랭 홍콩아트페스티벌 프로그램 디렉터는 최근 한국경제신문을 만나 “젊은 세대가 축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홍콩아트페스티벌은 1973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는 아시아 대표 공연예술 축제다.

랭 디렉터는 1993년부터 33년째 축제에 오를 예술 작품을 선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내년 페스티벌에 오를 한국 아티스트들을 찾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정경화가 오랜 우상”

랭 디렉터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가장 큰 배경은 클래식 음악이었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연주를 들으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당시 세계 무대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보인 아시아 연주자가 많지 않았던 만큼 그를 존경했다”고 말했다.

그의 첫 한국 방문은 1989년. 이후 여러차례 한국을 찾으며 전통예술부터 현대극, 클래식 음악까지 폭넓게 접했다. 1990년대에는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공연예술축제연맹(FACP) 회의에 참석했다가 판소리 명창 임진택의 공연을 보고 감정 표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97년 홍콩아트페스티벌 무대에 그를 한국 예술가 최초로 초청한 이유다.

국내 극장에서 본 김민기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독일 뮤지컬을 한국적으로 각색한 이 작품은 당시 작은 극장에서 공연되고 있었지만 이미 100회 이상 무대에 오른 상태였다. 랭 디렉터는 “그건 하나의 발견이었다”며 “그 작품을 홍콩에 소개할 기회를 얻게 됐다”고 회상했다. ‘지하철 1호선’은 2006년 홍콩아트페스티벌 무대에 올랐다.

홍콩아트페스티벌의 한국 공연예술 소개는 꾸준히 이어졌다. 정명훈, 백건우, 선우예권, 노부스 콰르텟, 에스메 콰르텟과 같은 클래식 음악가를 비롯해 국립무용단, 국립극단, 극단 여행자 등 다양한 장르의 한국 예술가와 단체가 홍콩 무대에 올랐다. 2024년에는 한경아르떼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국내 교향악단 최초로 현지에 초청됐다. 올해 페스티벌에서도 임윤찬과 손민수, 노부스 콰르텟, 국립극단의 ‘빛의 제국’ 등이 소개됐다.

랭 디렉터는 특히 임윤찬을 두고 “화려하고 과시적인 유형이 아니라 음악에 아주 깊이 집중하는 연주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요즘 많은 아티스트들이 서로 비슷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임윤찬은 확실히 달랐다”며 “그가 슈베르트와 스크랴빈 프로그램을 홍콩에서 처음 선보였다는 점은 우리에게도 큰 영광이었다”고 말했다.

젊은 관객 큰 관심 기대

랭 디렉터가 이번 서울 방문에서 염두에 둔 것은 K팝과 클래식 음악의 접점이다. 내년 55주년을 맞는 홍콩아트페스티벌에서 K팝 아티스트와 오케스트라가 함께하는 무대를 구상하고 있다는 설명. 그는 “K팝 기획은 단순히 마케팅이나 대중성을 겨냥한 프로젝트가 아니다”며 “지금 세대에 속한 음악을 다루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K팝에 주목하는 배경에는 젊은 관객에 대한 고민도 있다. 홍콩아트페스티벌은 1973년 시작된 오래된 축제다. 충성도 높은 관객층이 있지만, 축제가 지속되려면 새로운 세대와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는 “홍콩의 젊은 세대, 그리고 축제 사무국의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도 K팝은 잘 알려져 있다”며 “젊은 세대가 기획 과정에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의견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홍콩아트페스티벌은 언제나 높은 수준, 혁신성, 취향의 다양성 등을 추구해왔다”며 “이번 새 프로젝트도 관객에게 새로운 감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했다.

홍콩의 변화와 함께한 축제

랭 디렉터가 홍콩아트페스티벌에 합류한 것은 1993년. 당시 홍콩은 영국 식민지였지만 이미 국제적인 문화도시였다. 그러나 1997년 영국의 홍콩 반환을 앞두고 축제의 성격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는 “그 시기의 변화는 ‘우리는 영국인인가, 중국인인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었다”고 했다.

홍콩아트페스티벌은 그 과정에서 홍콩 예술가들이 자기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홍콩에 대해 이야기하고, 홍콩계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창작물이 늘어났다. 이후 축제는 자체 제작과 국제 공동제작도 확대했다. 세계적인 안무가 피나 바우쉬의 첫 아시아 프로젝트였던 ‘윈도 워셔(Window Washer)’가 1997년 홍콩에서 초연된 것도 그 흐름 속에 있었다. 홍콩 반환을 앞둔 주민의 불안을 다룬 공연이었다.

이솔 기자

랭 디렉터는 국제 협업이 예술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중요한 방식이라고 했다. 여러 도시와 기관이 자원을 모으면 더 큰 규모의 프로덕션을 만들 수 있고,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관객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에는 미국, 영국, 독일 등의 공연이 많았지만, 지금은 남미, 북유럽, 동남아 국가와의 협업도 늘리고 있다. 작년에는 베트남과 협력했다. 프랑스 오페라단이 홍콩을 방문한 뒤 베트남 하노이 오페라하우스로 가는 방식이었다. 그는 “지금은 이웃 국가들과의 협업이 매우 중요하다”며 “한국과 홍콩도 많은 투어와 자원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객층의 변화도 축제 운영에 영향을 미쳤다. 1973년 첫 페스티벌 때부터 공연장을 찾던 관객들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며 고령으로 밤에 공연장을 찾기 어려워진 이들이 늘었다는 설명이다. 랭 디렉터는 “최근에는 토요일, 일요일뿐 아니라 평일 낮 공연도 많이 마련하고 있다”며 “낮 공연은 최근 2~3년 동안 늘 객석이 가득 찬다”고 했다. 

“세계를 발견하는 즐거움”

그가 30년 넘게 같은 일을 이어올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랭 디렉터는 ‘세계를 발견하는 일’이 자신을 계속 움직이게 한다고 했다. 멀리 떨어진 국가의 문화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홍콩 안에서도 아직 모르는 지역과 사람, 사라져가는 노래와 삶의 방식을 계속 발견한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홍콩 야우마테이 지역을 새롭게 본 경험을 들려줬다. 지금은 번화했지만, 예전에는 여성이 쉽게 방문하지 않는 위험한 곳으로 여겨졌다. 그는 “직접 그 지역을 걸어 다니며 부엌칼만 파는 가게, 오래된 LP 레코드를 파는 벼룩시장 같은 곳을 발견했다”며 “흥미로운 경험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지난 페스티벌에서는 사라져가는 홍콩 어부들의 노래를 다룬 프로젝트도 선보였다. 홍콩은 한때 어촌 중심 지역이었지만, 어부와 정크선(중국 전통 목조선박) 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한 젊은 예술가가 어부들의 노래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었고, 축제를 통해 관객을 실제 어부들의 삶이 남아 있는 장소로 초대하기도 했다. 

랭 디렉터는 한국에서도 새로운 아티스트와 문화를 마주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찾는 것은 단지 현대적인 것만이 아니다”며 “삶이 곧 문화이고, 그 땅에 닿아 있는 문화를 계속 발견하는 일이 예술 프로젝트를 흥미롭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최한종 기자 onebe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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