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영 "세계 어딜 가도 집 같지 않죠, 오직 음악만이 안식처"

조민선 2026. 5. 13. 09:24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arte] 조민선의 아티스트룸
피아니스트 문지영 인터뷰
안드라스 쉬프의 한국인 1호 제자
부조니 콩쿠르 아시아 최초 우승자
파리 미술관은 영혼의 안식처
올해부터 3년간 슈베르트 탐구
사진. ⓒGRZEDZINSKI

"저만의 공간이요? 편하게 쉬고 위안받는 공간이 어딜까 생각해보면, 전 없는 것 같아요. 파리, 잘츠부르크, 서울. 어디를 가도 집 같지 않은 느낌이에요."

파리에 살며 세계를 누비는 피아니스트 문지영(31). 살면서 도시를 옮기고 소속을 바꿔도 '내가 이곳에 속한다'는 감각을 얻지 못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물리적 공간을 넘어 그에게 안식처는 그가 몰두하는 '음악'이고 '무대'다.

2015년 아시아 최초의 부조니 국제 콩쿠르 우승자, 2014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 콩쿠르 우승자. 문지영에겐 화려한 왕관이 많다. 유독 거장들의 애제자로도 꼽힌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김대진을, 베를린 바렌보임-사이드 아카데미에서 안드라스 쉬프를 사사했다.

3년간 잘츠부르크 생활을 접고, 지난해 파리에 정착한 그가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참석차 잠시 귀국했다. 그가 사랑하는 도시 파리, 그리고 음악 이야기를 직접 만나서 들어봤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자주 들른다는 문지영이 좋아하는 작품 '에로스에게 길들여진 켄타우로스' 조각상. 문지영 제공.

파리와 미술관

"왜 파리였냐면, 미술관이 많기 때문이에요."

어느 도시를 가든 미술관부터 찾는 그에게 루브르·오르세·오랑주리를 이웃 삼을 수 있는 파리는 최고의 도시였다. 파리에 정착하자마자 '루브르 멤버십'부터 끊은 것도 그래서다. 저녁 야간 개장 시간에 두어 시간씩 맘에 드는 작품을 찾아보고 또 보는 것. 파리 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스·로마 시대의 2000년도 넘은 작품들을 보면 경이로워요."

유명한 <모나리자>가 걸린 방을 들르지만, 정작 그는 맞은편에 걸린 파올로 베로네세의 <가나의 결혼식>을 좋아한다. 들라크루아의 <프레데리크 쇼팽의 초상>, <에로스에게 길들여진 켄타우로스> 조각상, 이집트관. 그가 하염없이 머물며 영감을 받는 공간이다.

문지영이 좋아하는 작품, 들라크루아의 <프레데리크 쇼팽의 초상>. 문지영 제공.

피아니스트의 미술관 방문은 음악과 동떨어진 취미가 아니다. 수백 년 전 완성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마주할 때, 음악가로서 영감이 샘솟는다.

"훌륭한 미술 작품을 보고 와서 피아노 연습을 하면, 다른 느낌을 받아요. 음악적 상상력이란 건 어떤 스토리를 갖는 게 아니에요. 음악은 스토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흐름을 쫓아가죠. 그래서 어떤 이미지, 장면, 연상은 음악을 표현하는데 바로 적용이 돼요."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 라벨의 곡을 배울 때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는 건 효과가 크다. 눈 앞에 펼쳐진 선명한 이미지가 눈에 안 보이는 음악을 표현하는 데 직접적인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피아노 소리가 맘에 안 들 때, 오랑주리에 가서 모네의 '수련'을 보고 오는 거죠. 그러면 이미지와 상상이 엄청 큰 영감이 되고 바로 제 마음이 달라지는 게 느껴져요."

문지영은 그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뭔가가 있을 때, 음악가로도 예술을 표현한다고 믿는다. "그림을 화면으로 보고 멀리서도 공부할 수 있지만, 실제로 가서 보고 색감, 빛, 질감을 보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이에요. 감동이 커요."

파리 시내를 걷다 발견한, 쇼팽이 머물렀던 파리의 집. 문지영 제공.

미술관 밖에서도 파리는 도처에 예술이 깔려있다. 쇼팽, 마네, 헤밍웨이, 보들레르 등 파리 곳곳에 스며있는 위대한 예술가들의 흔적이 그에겐 또 다른 영감이다.

책, 내 속도대로

파리 시내를 천천히 걷고, 서점에 들르는 것. 그의 소소한 일상이다. "파리에 부키리스트라고 있어요. 센느 강가 가판대에서 책을 파는 곳인데, 흥미로운 책들이 많아 들러서 보는 걸 즐겨요."

문지영이 자주들르는 파리의 서점. 문지영 제공.

"읽는 게 좋은 이유는 제 흐름에 따라 읽기 때문이에요. 책은 내 속도로 가는 거죠. 그 점이 저랑 잘 맞아요."

도스토옙스키의 고전문학, 한강의 소설을 아낀다. "지금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있어요. 한강 작가님 책도 10년 전부터 좋아했어요.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모두 다 읽었어요. 가장 최근엔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제주 4·3 사건 이야기잖아요. 너무 섬세한 묘사에 읽다 보면 제 몸이 아픈 것 같아요."

문지영이 파리에서 즐겨찾는 comédie française 앞 광장. 문지영 제공.

악보와 씨름하는 연주자

문지영은 자연스러운 소리의 결로 호평받는다. 부조니 콩쿠르 우승 당시 심사위원장 외르크 데무스는 "이 시대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한 음악의 자연스러움을 그녀에게서 발견했다"고 평했다. 화려한 기교와 소리로 현혹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 내면의 정제된 해석을 물 흐르듯 들려준다.

스승 안드라스 쉬프는 말했다. "내 제자 중에 소리에 대해 이해를 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또 다른 스승 김대진은 문지영을 두고 "맑고 순수한 소리를 내는 연주자"라 했다. 두 거장이 각자의 언어로 같은 지점을 짚고 있다.

한 음을 내더라도 문지영의 소리를 내려고 노력해왔다. "많은 피아니스트가 소리에 신경을 안 써요. 그냥 치는 거예요. 그냥 쳐도 소리는 나니까요. 근데 정말 소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어떤 피아노를 치든 자기의 소리가 있어요."

새로운 곡을 배우는 방식도 자신의 소리를 찾는 과정이다. 레코딩을 찾아 듣는 대신, 악보를 펼쳐놓고 홀로 씨름한다. "악보를 앞에 딱 두고, '이제 친해져 볼까?' 하며 시작해요."

다른 연주를 먼저 들으면 그 소리가 무의식에 박혀버리기 때문이다. 귀에 익은 해석을 피아노로 재현하는 건 진정한 자기 것이 아니라고 그는 믿는다. 그래서 철저히 고독한 과정을 거친다. 악보를 천천히 독해하며 최초의 아이디어를 길러낸 뒤에야, 비로소 다른 음악가의 해석에 귀를 연다.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리지만,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오른쪽)와 피아니스트 문지영이 지난 3월 6일 영국 런던 위그모어홀에서 공연을 마친 뒤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는 모습. 문지영 제공.

쉬프와 김대진, 인생의 두 스승

문지영은 스승 복을 타고났다. 10대에 전남 여수에서 상경한 그는 한예종의 김대진 교수에게 10년을 배웠다. 한예종 졸업 후엔 2022년 베를린 바렌보임-사이드 아카데미에서 안드라스 쉬프의 제자가 됐다. 쉬프의 첫 번째 한국인 제자다. 오디션 당일 쉬프 본인이 심사석에 앉아 있는 걸 보고 긴장해 제 실력을 못 냈다는 그가, 결국 합격했다.

두 스승은 스타일이 다르다. 쉬프는 리허설을 많이 하되, 말보다 함께 치는 방식을 택한다. 언어 없이 서로를 들으며 맞춰가는 것. 문지영은 스승의 소리를 바로 곁에서 듣는 매 순간을 "다시 경험하지 못할 귀한 것"이라 여기며, 한순간 한순간 기억에 새긴다고 했다.

인간적인 면에서도 남달랐다. 파리로 거처를 옮긴 뒤 한두 달 연락을 드리지 않았더니, 쉬프가 먼저 이메일을 보내왔다. 왜 소식이 없냐고, 잘 지내고 있냐고. "아, 이분은 완전 다른 사람이구나 느꼈죠. 언제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는 분이세요. 진짜 인간적인 분이시죠."

그를 피아니스트로 만든 건 김대진이다. "저는 참 운이 좋았어요. 김대진 선생님 아니었으면 제가 과연 피아노를 치고 있을까요? 인생의 스승이십니다."

물리적인 삶의 둥지가 취약하다고 고백한 그지만, 그에겐 두 스승의 너른 품이 있다. 한국에 김대진, 유럽에 쉬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꺼이 품을 내어주는 이들이 양쪽에 있다.

슈베르트, 3년의 약속

2026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갤러리콘서트에서 공연한 문지영(가운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올해부터 3년간, 문지영은 슈베르트에 집중한다. 금호문화재단이 3년에 걸쳐 연 1회씩 그에게 슈베르트를 맡겼다. 오는 11월 12일이 첫 무대다. 슈베르트 후기 피아노 소나타 중 제13번 A장조, 소나타 제16번, 소품들로 구성할 예정이다.

"몇 년간 꾸준히 슈베르트를 배워왔는데, 정말 이 작곡가가 저한테 굉장히 특별한 것 같아요. 슈베르트는 베토벤이나 바흐와는 다르게 인간 삶의 유약함(Fragility)과 한도 끝도 없는 슬픈 아름다움이 공존해요. 연주자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 그중에서도 섬세함과 연약함 없이는 닿을 수 없는 세계죠."

스승 쉬프와의 듀오 무대도, 솔로 리사이틀도 슈베르트다. 지난 3월엔 쉬프와 처음으로 런던 위그모어홀 무대에서 슈베르트를 연주했다. 런던 관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공연 직후, 위그모어홀 대표는 두 사람에게 내년 6월 무대에 재초청했다. 문지영은 거장과 나란히 앉아 슈베르트를 연주하는 매 순간이 "배움"이었다고 했다." 선생님의 슈베르트는 무엇보다 인간적이에요. 어떠한 과시나 경직됨 없이 마음에서 손끝으로 우러나오는 편안함이 있죠."

베토벤처럼, 끝까지

젊은 나이에 이미 성취한 게 많은 그는, 음악가로 여전히 불확신에 차 있다고 했다. 연주가 마음에 드는 날보다 아쉬운 날이 더 많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걸 나쁜 신호로 보지 않는다. "차라리 좋은 사인이라고 생각하려 해요."

"베토벤은 정말 죽을 때까지 계속 올라갔잖아요.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매 순간 고통스러워했죠. 그게 제가 생각하는 음악가의 사명인 것 같아요. 너무 어려운 사명이지만요."

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