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못 속이는 ‘만리장성 킬러’… “아빠 올림픽 기록 깨고 싶어요”

정세영 기자 2026. 5. 13.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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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男탁구 국가대표팀 오상은 감독 - 오준성 선수 父子
30년 만에 세계선수권 단체전서 中꺾고 승리
아들이 승부 겨룰 때 아빠는 벤치서 작전 지휘
엄마도 선수출신… “집에서 대화 90%가 탁구”
오 감독 “탁구 안 시켰는데 벽에 공 튀기며 놀아”
오 선수 “아빠 화려한 경력만큼 키도 닮았으면”
다음 목표는 아시안게임… “개인전서 中 꺾고파”
오준성(왼쪽)과 오상은 감독이 지난 9일(한국시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을 마친 뒤 선수단 숙소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대한탁구협회 제공

런던=정세영 기자

“한번 쳐볼까?”

2026 국제탁구연맹(ITTF) 런던 세계탁구선수권대회 한국 선수단 일정이 마무리된 9일(한국시간). 남자대표팀을 이끈 오상은 감독이 숙소 로비에서 먼저 라켓을 잡았다. 로비 한쪽에는 ITTF 창립 100주년 기념 대회를 맞아 설치된 탁구대가 놓여 있었다. 오 감독이 라켓을 들자, 대표팀 막내이자 아들인 오준성(한국거래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짧은 랠리가 이어졌다. 오준성이 연신 톱스핀 공격을 넣자 오 감독은 여유 있게 받아넘기고, 때로는 공을 깎아 올렸다. 오 감독이 장난스럽게 “너는 나한테 안 돼”라고 하자, 오준성도 웃으며 “설마요”라고 받아쳤다. 두 사람은 탁구대를 사이에 두고 웃고, 받아치고, 또 말로 한 번 더 받아치는 평범한 부자의 모습이었다. 탁구대 앞에서는 평범한 부자였지만, 이번 대회 기간엔 대표팀의 감독과 막내 선수로 같은 승부를 치렀다.

한국 선수단의 이번 세계선수권대회는 남녀 모두 8강에서 마무리됐다. 그러나 남자대표팀은 한국 탁구가 오래 기억할 승부를 만들었다. 시드 배정 리그에서 중국을 매치스코어 3-1로 꺾으며 30년 만의 세계선수권 단체전 중국전 승리를 따낸 것. 중국은 세계 탁구에서 쉽게 넘을 수 없는 최강의 벽이다. 중국이 세계선수권 단체전에서 패한 것은 2000년 쿠알라룸푸르 대회 스웨덴전 이후 26년 만이었다.

그 중심에 대표팀 막내이자 세계랭킹 30위 오준성이 있었다. 오준성은 량징쿤(세계랭킹 21위)과 린스둥(6위)을 모두 잡았고, 8강 재격돌에서도 왕추친(1위)을 상대로 풀게임 접전을 펼쳤다. 한국은 8강에서 중국에 매치스코어 0-3으로 졌지만, 오준성은 이번 대회에서 한국 남자탁구가 얻은 분명한 수확이었다.

두 차례 중국전을 치렀지만, 두 사람이 바라본 장면은 달랐다. 아들은 경기장 안에서 중국 선수들과 직접 부딪쳤고, 아버지는 벤치에서 승부의 흐름을 지휘했다. 오 감독은 중국과의 첫 경기를 떠올리며 “량징쿤은 처음 상대하는 선수라 쉽지 않다고 봤다. 그런데 준성이가 생각보다 잘 풀어갔다”면서 “린스둥까지 이겼을 때는 조금 멍했다. 준성이가 두 점을 잡아 중국을 이겼다는 생각에 선수들도 1분 정도는 멍했던 것 같다. 감독이라 티를 덜 내려고 했지만, 자랑스러운 마음은 있었다”고 떠올렸다.

중국전 승리에는 오상은 부자의 묘한 연결고리도 있었다. 오 감독은 현역 시절인 1996년 싱가포르 아시아선수권 단체전 결승에서 세계랭킹 1위 쿵링후이를 꺾어 한국의 금메달 획득을 이끌었다. 30년 전엔 아버지가, 이번엔 아들이 중국전 승리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런데 오준성은 중국전 이야기가 나오자 진한 아쉬움부터 드러냈다. 한국은 시드 배정 리그에서 중국을 꺾었지만, 8강에서 다시 중국과 맞붙어 메달을 놓쳤다. 오준성은 “이번 대회부터 대회 방식이 바뀌었다. 중국을 한 번 이겼는데도 예선을 통과한 정도의 결과만 남은 느낌이다. 우리가 한 것에 비해 많이 얻어진 것이 없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실 가족은 오래 설명하지 않아도 통한다. 두 사람은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듯했고, 오 감독도 같은 대목을 아쉬워했다. 오 감독은 “허무하다. 잘한 것 같은데 결과가 남지 않았다. 결국 모두 결과를 본다. 과정은 최상의 과정을 가져왔다고 생각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아쉬워했다. 중국전 이야기가 끝나자 대화는 자연스럽게 집 안의 ‘부자 이야기’로 넘어갔다. 집에서도 대화의 대부분은 탁구다. 오준성은 “집에 있으면 대화의 90% 정도가 탁구 이야기인 것 같다”고 웃었다. 그래도 탁구만 있는 부자는 아니다. 오 감독은 아들이 컴퓨터 게임, 특히 ‘롤’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오준성은 ‘라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느냐는 질문에 “MZ 욕심이 있으신 것 같다. 한 번씩 본인이 꼰대 같냐고 물어보신다”며 웃었다.

오준성이 지난 7일(한국시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단체전 오스트리아와 16강전에서 공격을 시도하고 있다. 대한탁구협회 제공

오준성은 탁구인 가족 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국가대표 출신 오 감독이고, 어머니도 실업 탁구 선수로 뛰었다. 오준성은 “어릴 때는 축구선수가 꿈이었다. 그런데 탁구를 쳐 보니 축구만큼 재미있었고, 나중에는 탁구가 더 재미있었다”고 했다. 오 감독도 “처음에는 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유치원에 다녀오면 방문을 잠가놓고 벽에 공을 계속 튀겼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했다. 본인이 좋아서 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오 감독은 한국 탁구의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였다. 2005년 상하이 세계선수권대회 남자단식 동메달, 2012년 런던올림픽 남자단체전 은메달을 따냈고, 국내 최고 권위의 종합선수권 남자단식에서는 역대 최다인 6차례 정상에 올랐다.

그런데 아들 오준성이 닮고 싶은 것은 아버지의 화려한 경력보다 먼저 ‘키’였다. 오준성은 “아빠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만 더 컸으면 탁구가 더 쉬웠을 것 같다. 170㎝ 후반 정도만 됐어도 더 만들어낼 수 있는 시스템이나 쉬운 시스템이 몇 개 생겼을 것 같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때 아들과 눈이 마주친 오 감독은 아들의 장점으로 화제를 돌렸다. 오 감독은 “저는 연결 능력보다는 구질이나 초구에 빨리 끝내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준성이는 상대가 아무리 강하더라도 기본적인 연결을 할 줄 안다. 누구와 하더라도 경기가 된다. 기본기가 탄탄해서 누구라도 이길 수 있는 장점을 가진 선수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그러자 오준성의 어깨엔 힘이 팍 들어갔다. 오준성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기록을 꽤 많이 깼다고 생각한다. 비록 국내 기록이지만, 하나씩 깨는 게 재미있었다. 부담보다는 깨는 재미가 더 컸다. 오픈대회나 큰 메이저대회에서도 그런 기록을 깨보고 싶다”고 말했다. 오 감독은 말을 보태려다 잠시 웃었다. 아들의 대답이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부자의 다음 목표는 아시안게임이다. 오 감독은 “세계선수권 시드 배정 리그에서 중국을 이긴 것은 큰 영광이다. 다만 중국을 이기긴 했지만 결과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 숙제를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준성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준성은 “개인전이든 단체전이든 앞으로 큰 대회가 많이 남아 있다. 가까이는 아시안게임이 있고, 올림픽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때도 무조건 중국을 만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서 “이번 경기를 좋은 데이터로 삼아 한국에 돌아가서 더 디테일하게 연습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준비하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고 생각한다. 다음 기회를 다시 노려보겠다”고 다짐했다.

정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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