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 온다" 불안과 희화화 사이의 외침… 정신질환은 어떻게 밈이 됐나
'취준 정병' '외모 정병' 등 다양한 형태 통용
개인 취약점·과업 스트레스를 가볍게 표현
"공감·유대의 요즘 말" vs "회피심리 부추겨"
대학생 김모(23)씨는 "정병 온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정병'은 정신병의 줄임말. 정신질환 진단을 받았거나 의심 증상을 느껴서 그리 말하는 건 아니다. "스트레스보다도 압도적으로 막막하고 불안한 상황일 때 그 표현을 사용한다"는 게 김씨의 말이다. 역시 '정병'을 자주 언급하는 대학생 정모(22)씨는 "화남, 불안, 초조, 우울, 무기력 등이 뒤섞인 복잡한 상태를 함축하고 있어 대체할 단어가 없다고 느껴진다"고 말했다.
'정병 온다' '취준정병' '외모정병'... '정병'이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정신적 고통과 일상의 스트레스를 표현하는 언어로 자리 잡고 있다. 정신질환자를 비하한다는 비판 속에 무분별하게 사용되던 막말성 표현이, 이제는 불안하고 막막한 심정을 가볍게 털어놓는 자조적 유머가 됐다. 청년들은 왜 자신의 고통을 '병'의 언어로 말하게 됐을까.
'정병'으로 압축되는 청년 세대의 불안

'정병'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대상과 결합하며 확장한다. '외모정병'은 외모에 대한 강박적 집착에서 오는 불안을, '취준정병'은 취업 준비 과정의 번아웃과 좌절을 함축한다. 이 외에도 '입시정병' '학벌정병' '나이정병' 등 새로운 표현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정병'의 전파 속도는 가히 팬데믹급이다. 네이터 데이터랩에 따르면 '취준정병' 검색량은 지난해 말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외모정병'은 2020년 전후부터 간헐적으로 등장하다가 최근 검색량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빅데이터 분석 플랫폼 썸트렌드에 따르면 지난달 10일부터 이달 9일까지 블로그에서의 '취준정병' 언급량은 전년 동기 대비 1,700%, '외모정병'은 357% 증가했다.

서진환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최근 20대를 중심으로 실제 정신질환 경험이 증가했고, 정신건강 담론 자체가 과거보다 훨씬 일상 가까이 들어오면서 이런 표현 역시 자연스럽게 확산된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실제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에 따르면 국내 우울증 환자는 2020년 83만7,808명에서 2024년 110만6,603명으로 32.9% 늘었으며, 이 중 20대 환자가 17.5%로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에 비해 청년들이 입시와 취업 등을 위해 투자한 노력의 수준은 높아졌지만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보상이나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으면서 자신이 쌓아온 것들이 무력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며 "이 과정에서 일종의 아노미 상태, 즉 기대와 현실의 괴리 속에서 누적된 소외감과 박탈감을 자조적 느낌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본다"고 분석했다.
유머와 자조로 표현되는 취약성
쉽게 입에 올리기 어려웠던 정신질환의 언어가 어떻게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됐을까.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일종의 놀이문화로 퍼지는 측면이 있다는 입장이다. 임 교수는 "기존의 '정신병' '정신질환'이라는 표현의 무게감을 덜어 '정병'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며 "신조어를 쓰는 데서 오는 재미나 자극, 이를 따라 쓰는 동조 심리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취약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청년 세대의 특성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제일기획 산하 요즘연구소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취약할 권리' 보고서를 통해 Z세대가 자신의 불안과 결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능동적 취약성'을 가진다고 분석했다. 경제적 불안, 기술의 급속한 발전, 예측 불가능한 국제 정세 속에서 성장한 이들에게 불완전함은 숨겨야 할 흠이 아니라 현실과 기본값이라는 것.

정신적 고통을 털어놓기가 주저되는 이들에게 '정병'은 그 문턱을 낮춰줄 자조적 유머로 기능한다. 듣는 사람에게 위로나 해결법 제시의 부담을 지우지 않고, 분위기를 갑자기 무겁게 만들 위험도 없다. 대학생 정씨는 "상대의 위로나 해결법을 크게 기대하지 않으면서 나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주 사용한다"고 말했다. 최모(23)씨 또한 "해결을 요구할 정도로 심각하게 상황을 취급하고 싶지는 않고 감정은 공유하고 싶을 때 이 표현을 쓰게 된다"고 했다.
"진지하게 우울하다고 말해봤자 해결되는 게 없다고 느낀다"는 최씨의 말처럼, '정병' 유행은 청년 세대의 우울감 표현 방식과도 연결된다. 논문 '청년과 중년 세대의 우울감 표현 방식과 이유에 대한 탐색적 연구'(안순태·이하나, 2021)에 따르면, 중년 세대는 문제 해결을 위한 조언을 얻기 위해 우울감을 표현하는 반면, 청년 세대는 상대 반응에 대한 기대보다 우울감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통한 후련함을 기대했다.
서 교수는 "'정병'이라는 표현은 스스로 '병'이라고 말할 정도로 힘들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다' '그냥 농담이다'라는 식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이중적 메시지(double bind)처럼 읽힌다"고 짚었다. 이어 "어쩌면 청년 세대가 힘들 때 자신을 지지해 줄 사회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지 못해 기대 자체를 하지 않게 된 것일 수도 있다"고 해석했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겉으로는 자포자기나 체념처럼 보일 수 있지만, 과도한 사회적 압박 속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읽을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공감과 유대를 만들어내는 '정병'
임 교수는 토로하는 말에는 회복하는 힘도 있다고 지적했다. “(‘정병’과 같은 표현을 쓰면) 희화화 과정에서 병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덜 느끼게 되는 측면이 있다”며 “일부에게는 ‘나만 그런 게 아니다’ ‘극복할 수 있다’는 감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 자체에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기 때문에 가벼운 우울감이나 스트레스를 ‘정병’이라는 단어로 표출하는 것이 일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온라인상에서는 ‘정병’이라는 표현을 주고받으며 서로 불안과 무기력을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모습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단지 개인 감정을 배출하려고 내뱉는 말이 아니라는 것. 우울 밈이 공유되는 과정에서 유대감과 공감이 형성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영국 셰필드할람대·옥스퍼드대·노섬브리아대 공동연구팀이 국제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우울한 사람일수록 우울한 내용의 밈을 더 즐기고 공유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사회적 소속감과 연대감을 느끼는 것으로 분석됐다.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어 3만2,000명을 보유한 '취준정병' 계정 역시 이러한 현상을 보여준다. 해당 계정은 취업 준비 과정에서 겪는 불안과 번아웃을 유머 형식의 영상으로 풀어낸다. '면접 같은 조 특'('같이 면접을 본 지원자들의 특징'이라는 의미)이라며 인서울, 학점 4.3, 대기업 인턴 3회를 나열하거나, 끝없이 이어지는 채용 절차를 두고 "반년이 사라졌다"고 표현하는 식이다.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영상은 377만 회를 넘었다. 댓글에는 "내 얘기 같다" "공감 간다"와 같은 반응이 이어진다.
계정 운영자 서승민씨는 "취준을 하다 보면 작은 결과 하나에도 멘털이 흔들리고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순간이 많은데, '취준정병'이 그런 상태를 가장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며 "무거운 분위기의 정보성 취준 콘텐츠 사이에서, 취준 과정을 공감되고 웃기게 풀어보고 싶었고, 이렇게 웃어 넘기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해소 방식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가벼운 표현 속 희석되는 정신질환의 무게
한편에서는 '정병'이라는 표현이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가볍게 만들고 그 심각성을 희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임 교수는 "'정병'이 놀이문화가 됐다고 해도 그 안에 정신질환자를 비하하는 의미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지는 않는다"며 "그럴 의도가 아니라 해도 심각한 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조롱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신장애 환우 커뮤니티 카페 '코리안 매니아'에는 지난해 12월 "'정병 온다'는 말이 가볍지 않은 이유"라는 글이 게시됐다. 작성자는 "실제로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사람이 들으면 얼마나 허탈하고 속상한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댓글에는 '암 걸린다'는 표현과 유사하다는 반응부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약을 복용 중인 자녀가 해당 표현을 희화화된 맥락에서 접할 때 불편함을 느낀다는 글까지, 문제 제기에 공감하는 의견이 다수였다.
'정병'이 그저 당면 과제를 회피하는 입버릇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서 교수는 "농담으로라도 '병'으로 명명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일상의 과업들이 치료를 받아 해결해야 하는 일이 되고, 그것을 극복하는 일도 내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남용에 대한 경계심은 당사자 사이에서도 감지된다. 최씨는 "'정병'이라는 단어가 밈처럼 소비되면서 스트레스나 힘든 감정에 과하게 몰입하거나 이를 과장해 표현하는 분위기가 생긴 것 같고, 실제 정신질환에 대한 심각성 역시 가볍게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정예림 인턴 기자 herewegoo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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