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서안지구 폭력 이스라엘인 제재”…헝가리 ‘극우 실각’ 영향

천호성 기자 2026. 5. 12.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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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깃장 놓던 ‘친이스라엘’ 오르반 전 총리 총선 패배로
카야 칼라스 유럽연합 외교안보 고위대표가 11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럽연합 외교장관 회의 이후 기자회견을 열어, 요르단강 서안지구 정착민에 대한 제재 합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유럽연합(EU)이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이스라엘인들을 제재하기로 했다. ‘친이스라엘’ 성향 오르반 빅토르 전 헝가리 총리가 최근 실각하며 이스라엘 제재가 물살을 타는 모양새다.

르몽드에 따르면, 유럽연합 27개 회원국 외무장관들은 11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에서 회의를 열고 서안지구의 이스라엘 정착민 단체 4곳과 단체 대표 3명에 대한 제재에 만장일치 합의했다. 이들은 유럽연합 회원국 영토에 입국이 금지되며, 회원국 내 자산도 동결된다.

이스라엘 일간 하아레츠는 서안 최대의 정착촌 건설업체인 ‘아마나’와 극단주의 성향의 정착민 단체 3곳 및 이들의 대표자가 제재 대상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이들의 구체적인 신상은 몇주 뒤 유럽연합 관보에 공식 게재될 예정이다. 유럽연합 외무장관들은 이날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간부들에 대한 제재도 승인했다.

이번 조처는 이스라엘이 서안에서 벌이는 폭력이 도를 넘었다는 판단에서다. 정착촌 건설은 국제법상 불법이나, 무장한 정착민들은 이스라엘군 묵인하에 팔레스타인 주민을 몰아낸 뒤 전초기지를 세우고 있다.

르피가로는 이스라엘 인권단체 예시딘을 인용해, 정착민들이 3월 한달 서안에서 305건의 폭력 행위를 벌였다고 전했다. 지난 주말인 9·10일에만 주택·차량 방화, 경작지 파괴가 총 20건에 달했고 주민들이 다쳤다. 서안지구에 불법 정착촌을 짓고 사는 이스라엘인은 50만명이 넘는다.

이스라엘 싱크탱크 미트빔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이스라엘인 3분의 1이 ‘서안 통제를 확대하기 위한 정착민 폭력을 지지한다’고 답하는 등 이스라엘이 스스로 폭력을 멈출 가능성도 낮다.

11일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소년이 이스라엘군 철거팀이 도착하기 전 가족이 운영하던 세차장 시설을 옮기고 있다. 이스라엘 당국은 이 지역 50개 점포에 철거 통지서를 날린 뒤, 소유주들에게 스스로 점포를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 조처가 이스라엘인 정착촌을 넓히기 위한 밑작업이라고 규탄한다. AFP 연합뉴스

이에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지난 2023년 연말부터 회원국들에 정착민 제재를 제안해왔다. 제재에는 회원국 만장일치 동의가 필요하지만, 헝가리 오르반 정부의 어깃장에 번번이 무산됐다. 극우 성향 오르반 전 총리는 유럽의 대표적인 친이스라엘·반유럽연합 정치인이다. 지난달 헝가리 총선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공개 지지를 받았을 정도다.

그러나 오르반의 청년민주동맹(피데스)이 총선에 패배하며 유럽연합이 이스라엘을 제재할 길이 열렸다. 머저르 페테르 신임 총리가 이끄는 헝가리 정부는 이날 회의에서 제재에 대한 거부를 철회했다.

유럽 각국은 합의를 환영했다. 장노엘 바로 프랑스 외교장관은 회의 뒤 엑스(X)에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저지르는 “심각하고 용납할 수 없는 행위들이 지체 없이 중단돼야 한다”고 썼다. 카야 칼라스 유럽연합 외교안보 고위대표도 “(제재 논의는) 교착에서 실행으로 진작 넘어갔어야 했다”며 “극단주의와 폭력에는 결과가 따른다”고 말했다.

반면 이스라엘은 비난을 퍼부었다. 네타냐후 총리실은 엑스에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 등의 지역에서 지하드 광신자들에 맞서 문명을 위해 싸우며 ‘유럽의 더러운 일’(유럽에 유익한 일)을 수행하는 동안, 유럽연합은 이스라엘 시민과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을 나란히 맞세우며 도덕적으로 파산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내각의 극우 성향 인사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장관은 유럽연합이 “반유대주의적”이라며 “(유럽연합이) 자기들을 방어해주는 이들의 손을 묶으려 한다”고 공격했다.

9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시민들이 평화를 촉구하는 ‘토요 집회’를 열었다. 한 시민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 두목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얼굴을 나란히 인쇄한 손팻말을 들고 있다. AFP 연합뉴스

유럽연합은 무역 축소 등 추가 제재도 추진한다. 프랑스와 스웨덴은 정착촌에서 생산된 제품에 대해 초고율 관세를 부과해 유럽연합으로의 수입을 차단하자고 제안했다. 슬로베니아·스페인·네덜란드 정부는 정착촌 제품 수입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준비 중이다.

이런 조처엔 회원국 만장일치가 아니라 과반수 동의만 있으면 된다. 칼라스 대표는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작업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천호성 기자 rieu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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