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은의 시선] 가족이라는 우주, 그 안에서

김은숙 시인·수필가 2026. 5. 12.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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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숙 시인·수필가

가족이라는 말이 유난히 따뜻하게 와닿는 오월이다. 어린이날, 상하이의 하늘 아래 온 가족이 모였다. 낯설게만 느껴졌던 이 도시의 공기도 어느새 우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듯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며칠 동안 지루하게 이어지던 비도 그치고, 맑은 햇살이 골목 구석구석까지 가득 퍼졌다. 평소엔 조금 무심해 보이던 도시의 얼굴도, 오늘따라 유리창 너머로 스며드는 따스한 빛 한 줄기처럼 가까워진 느낌이다.

아이들은 봄바람에 올라탄 듯 몸과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자연사박물관으로 가는 차 안에서는 어느새 끝말잇기가 시작된다. 아이들이 소리 내어 웃자 시간도 덩달아 장난치는 것 같았다. 차창 밖으로 붉은 장미 넝쿨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가족들의 익숙한 목소리는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음악처럼 귓가에 스며들었다. 우리가 함께 걷는 길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마음 한구석에 깊게 스며든다. 어느새 나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 먼 훗날, 오늘의 이 짧은 순간들이 어떤 오후를 따뜻하게 밝혀주는 소중한 기억이 되지 않을까.

박물관 입구가 눈앞에 나타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벌써 마음으로는 전시실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었다. 첫째가 익살스러운 동물 퀴즈를 내고, 막내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눈을 말똥말똥 굴렸다. "공룡이 아직 살아 있을까?" 작은 손에서 전해오는 온기가 궁금함과 기대감으로 가득하다. 그 온기만으로도 마음이 절로 평온해진다. 맞잡은 손끝에서 잠깐 스치는 눈길만으로도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걸 느꼈다. 어떤 날에는 서로 살짝 부딪히는 다정한 순간마다 세상까지도 한결 부드럽게 변하는 듯하다.

유리관 너머 오래된 화석을 바라보며 아이들은 "왜?", "어떻게?"하고 끊임없이 묻는다. 나도 모르게, 잊고 지냈던 유년의 한 조각이 불쑥 떠오른다. 그 순간, 창경원에 봄 소풍 갔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아이의 순수한 궁금증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설렘까지 깨워 준다. "우리 집에도 익룡 한 마리 키울까?"라고 농담하자, 모두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어난다. 가족이란, 각자 마음 안에서 자라고 서서히 스며드는, 그런 작은 평화가 아닐까."

곤충전시관에 들어서자 아이들은 형형색색 나비의 날개를 쫓으며 종종걸음친다. 형제들은 서로 장난을 주고받는다. 막내는 "나도 훨훨 날고 싶어!" 하고 크게 외친다. 그 모습을 보니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평범하게 흘러가던 하루도 아이들의 작은 감탄 한마디 덕분에 특별해진다. 창가에 기대어 밖을 보니, 한때 청춘으로 가득했던 가슴 벅찬 설렘이 기분 좋은 바람처럼 스며든다. 유리관 너머로 스쳐오는 먼지 냄새, 아이들 등 뒤로 번지는 햇살, 박물관 어디선가 부드럽게 울리는 발소리까지. 오늘따라 모든 감각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박물관을 나오니 황금빛 저녁노을이 도시를 감싸 안고 있었다. 택시를 기다리던 순간, 아이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웃음소리가 잠시 하늘 가득 번져나가는 듯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서로에게 빛과 온기를 나누는 작은 우주가 되어있었다. 해가 기울 무렵이면 어김없이 머릿속을 채우는 일상의 무게도 오늘만큼은 한결 가벼웠다. 든든한 가족이라는 그늘 안에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문득, 아주 평범한 하루에도 이렇게 빛나는 순간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환한 웃음, 포근한 손길, 부드러운 햇살이 조금 더 곁에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생긴다. 소박했던 박물관에서의 오늘 역시 우리 가족만의 이야기가 하나 더 보태진, 뜻깊은 하루였다. 아마도 이 작은 순간들이 모여, 내일의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지 모른다. 오늘의 온기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