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막창 즐기는 우크라 유학생 '춘향' 되다… 대구에서 부르는 ‘평화의 노래’

김용국 기자 2026. 5. 1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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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대학원 8월 졸업 "한국에서 뿌리 내리는 것이 목표"
전쟁터 모국엔 아버지가 군 복무중…"무력감 힘들었다"
최근 전북 남원시에서 열린 '제96회 글로벌 춘향 선발대회'에서 당당히 '미(美)'를 차지한 리나 씨가 트로피를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리나씨 본인제공

"춘향에게 이몽룡이 있었다면, 저에겐 한국이 있었습니다. 긴 겨울 끝에 봄이 오듯,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온다는 믿음이 저를 여기까지 이끌었어요."

우크라이나 출신 유학생 리나(본명 안젤리나 게라시멘코·23) 씨는 최근 전북 남원시에서 열린 '제96회 글로벌 춘향 선발대회'에서 당당히 '미(美)'에 이름을 올렸다. 푸른 눈의 이방인이었지만,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진정성 있는 태도로 심사위원과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난 11일 경북대학교 캠퍼스에서 만난 리나 씨는 "글로벌 춘향 선발대회는 단순히 외모를 겨루는 대회가 아니라, 사람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들여다보는 뜻깊은 자리라고 느꼈다"며 "오랫동안 품어온 한국을 향한 진심을 인정받은 것 같아 정말 벅찼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그녀와 대구의 인연은 에스토니아 탈린대학교 학부 시절이던 지난 20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환학생으로 6개월간 대구와 첫 만남을 가진 그녀는 이후 한국어를 독학해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선발됐고, 두 번째 유학지로도 주저 없이 대구를 택했다.

그녀는 "북유럽은 겨울이 길고 매서운데 대구의 따뜻한 공기가 참 좋았다"며 "무엇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보기 힘든 아름다운 산 풍경에 깊은 매력을 느꼈다"고 미소 지었다. 현재 경북대학교 대학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인 그녀는 어느덧 대구 생활 3년 차에 접어들었다.

"한 번은 친구들과 앞산에 가볍게 산책을 갔다가, 원피스에 구두를 신은 차림으로 얼떨결에 정상까지 올라간 적도 있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죠."

유창한 한국어로 유쾌한 에피소드를 털어놓는 그녀에게서는 이미 '대구 사람'다운 친근함이 묻어났다. 그녀의 대구 사랑은 밥상과 말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벚꽃 피는 경대교 일대의 야경 산책을 즐기는 그녀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대구 10미(味)인 '막창'과 '뭉티기'를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자칭 홍보대사다. 특히 막창에 대해서는 "처음엔 낯설었지만 지금은 가장 사랑하는 음식 중 하나"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경북대 캠퍼스에서 인터뷰 중 포즈를 취한 라나씨. 김용국 기자

사투리 억양도 제법 자연스럽게 배어들었다. 리나 씨는 "서울 친구들을 만나면 '너 억양이 바뀌었다'며 신기해한다"며 "친구들한테 배운 '너무 예쁜 거 아이가' 같은 표현을 즐겨 쓴다"고 했다. 이내 수줍은 미소와 함께 "오빠야, 밥 묵었나"라며 직접 경상도 사투리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토록 타국 생활에 깊이 스며들 수 있었던 건 주변의 온기 덕분이었다. 그녀는 "대구 사람들은 겉으론 무뚝뚝해 보여도 속정이 정말 깊다"며 "모르는 사람에게도 먼저 다가와 챙겨주시는 모습을 보며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덜고 큰 힘을 얻었다"고 고마움을 표했다.

이러한 정서적 교감은 춘향 선발대회를 준비하는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외국인으로서 조언을 구할 곳이 마땅치 않아 역대 대회 영상을 찾아보며 '홀로서기'를 해야 했지만, 평소 우리 옷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큰 무기가 됐다. 지난해 대구 한복 모델 선발대회에서 지역 1위를 차지하기도 했던 그녀는 일상에서도 한복을 즐겨 입는다.

"우크라이나에는 학생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등교하는 문화가 있어요. 한국에서도 한복이 명절 같은 특별한 날에만 입는 옷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더 자주 사랑받고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밝은 얼굴로 대구의 일상을 예찬하던 리나 씨는 고국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고향 하르키우는 지금도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폭격이 끊이지 않는 최고 위험 지역이다. 현지에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남아 있으며, 아버지는 현재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 복무 중이다.

그녀는 "전쟁 초기에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괴로웠다"며 "가족을 돕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가장 나를 힘들게 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그녀는 주저앉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에스토니아에서는 구호물품 정리와 홍보 활동에 앞장섰고, 한국에서는 통역과 영어 읽기 봉사 등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다.

오는 8월 석사 졸업을 앞둔 그녀의 다음 목표는 한국, 그리고 대구 지역 사회에 온전히 뿌리내리는 것이다.

"저에게 귀화는 단순히 국적을 바꾸는 서류상의 의미가 아닙니다. 제 고향의 뿌리를 잊지 않으면서도,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변함없이 살아가겠다는 일편단심의 약속이에요. 마치 춘향과 몽룡이 맺은 백년가약처럼 한국과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습니다."

김용국 기자 kyg@idaegu.com
지난 2022년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환학생 시절. 리나씨 본인제공
경북대 캠퍼스에서 인터뷰 중 포즈를 취한 라나씨. 김용국 기자
일상생활에서도 한복을 즐겨 입는 리나 씨가 경북대학교 캠퍼스에서 포즈를 취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김용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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