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분투칼럼] 아프리카, 식민지의 언어를 넘어 주권의 목소리를 찾다

김재근 2026. 5. 12.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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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포니(불어권)의 균열과 한글이 전하는 새로운 연대의 메시지

김명희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부사장

김명희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부사장 [김명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글로벌문화교류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언어, 그 오래된 지배의 유산과 아프리카의 민낯

언어의 확산이 그 언어를 태동시킨 국가의 힘에 비례한다는 명제는 아프리카 대륙의 역사를 읽어낼 때 참으로 뼈아프게 다가온다. 19세기 아프리카에 유럽 열강이 남긴 가장 질긴 유산은 눈에 보이는 국경선보다도 그들이 강제로 쓰게 한 언어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총과 조약으로 땅을 나눴지만, 그보다 더 오래 지속된 지배는 사람들의 언로와 생각을 가두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졌다. 오늘날 54개 아프리카 국가 중 절반 이상이 여전히 영어나 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은 식민 지배의 그림자가 얼마나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최근 아프리카에 이 견고했던 식민지 언어에 흥미로운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이는 단순히 소통의 편리함을 위해 도구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아프리카가 외부에서 주어진 낡은 옷을 벗어 던지고, 스스로 목소리를 찾아가는 거대한 '언어 주권' 회복의 흐름으로 읽어야 한다.

아프리카 고유 언어 지도 [Exploring Africa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1천개가 넘는 목소리가 살아 숨 쉬는 대륙

우리는 흔히 아프리카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 이 대륙은 인류 언어의 3분의 1이 모여 있는 거대한 '언어의 보물창고'다. 아프리카의 언어적 다양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이지리아에만 500개가 넘는 언어가 존재한다. 짐바브웨는 16개의 공식 언어를 헌법으로 인정했다. 세계에서 볼리비아, 인도에 이어 세 번째로 공식 언어가 많은 국가이다.

에티오피아의 암하라어처럼 고유의 문자를 가진 언어부터 서아프리카의 하우사어,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는 수천 년 동안 자신들만의 철학과 세계관을 언어에 담아왔다. 독립 이후 많은 국가가 국가 통합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식민 종주국의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해야 했다. 하지만 아프리카인들의 심장 속에는 여전히 각자의 모국어가 뜨겁게 살아 숨 쉬고 있다. "나무는 혼자 서지 못한다"는 케냐의 속담이나 "강물은 급하게 흐르면 멀리 가지 못한다"는 나이지리아의 격언처럼, 그들의 언어에는 공동체를 향한 사랑과 삶의 지혜가 가득하다. 이러한 보석 같은 언어들이 식민지 언어라는 장막에 가려져 있었던 셈이다.

사헬에 부는 변화의 바람…프랑코포니의 균열

뉴스에서 접하는 사헬 지역(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등)의 소식은 이러한 언어적 흐름이 실제적인 독립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국가에서는 프랑스군 주둔을 승인하지 않고 철수를 요구하는 등, 과거 식민 종주국인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다.

이러한 '반(反)프랑스 정서'는 단순히 정치적 구호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곧 '언어와 작별'로도 이어지고 있다. 수십 년간 엘리트의 상징이자 권력의 열쇠였던 불어의 지위를 낮추고, 자신들의 토착어를 국가 정체성의 중심에 세우려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아프리카연합(AU)이 스와힐리어 등을 공식 언어로 채택하며 언어의 자립을 추진하는 것도, 이제 아프리카가 타인이 입혀준 옷을 벗고 자기 몸에 꼭 맞는 옷을 찾아 입으려 한다는 신호다.

[연합뉴스 그래픽] 아프리카 사헬지역 (서울=연합뉴스) 김영은 기자 =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사헬(Sahel)지역은 세네갈 북부부터 모리타니,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나이지리아, 차드, 수단(남수단 일부 포함), 에리트레아까지 동서로 긴 띠 모양으로 펼쳐진 지역이다. 0eun@yna.co.kr

알제리의 현장 일화…기회를 찾아 이동하는 젊은 세대

필자가 2013년 알제리 무역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현장에서 목격한 변화는 더 구체적이었다. 당시 알제리는 불어의 지배력이 여전히 압도적인 곳이었다. 공식 회의는 물론 일상적인 업무 소통도 대부분 불어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젊은 현지 직원들 사이에서는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1외국어로 불어 대신 영어를 선택하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었다. 그들은 유창한 불어 대신 서툰 영어를 써가며 이렇게 말했다. "관장님, 프랑스보다 영어권 국가에 더 많은 일자리가 있고, 인터넷 정보도 영어로 된 것이 훨씬 많아요. 저희에게 영어는 이제 생존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랑코포니 성벽에 생긴 실질적인 균열의 지점이었다. 언어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언어는 기회를 향한 문이다. 불어라는 열쇠가 더 이상 가장 많은 문을 열어주지 못한다고 판단될 때, 젊은 세대는 과감히 새로운 열쇠를 손에 쥐기 시작했다. 이는 새로운 힘에 의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직접 소통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아프리카 청년들의 능동적인 선택이었다.

아프리카 알제리 지도 [제작 양진규]

한글의 위대함…지배가 아닌 공감의 연대

이러한 역동적인 언어의 변화 속에서 한글의 존재감을 떠올려 보면 참으로 의미가 깊다. 과거 서구 언어들의 확산이 총칼과 강제에 의한 '아픈 흔적'이었다면, 지금 아프리카 대륙에 퍼지는 한국어는 철저히 '매력'과 '자발적 공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식민 지배라는 아픈 역사를 공유하면서도 끝내 자신의 언어와 문자를 지켜낸 한국, 그리고 그 언어로 세계를 매료시킨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낸 우리의 모습은 아프리카인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세종학당을 찾아 한글을 배우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어 가사를 외우는 아프리카 청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언어의 진정한 위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한글은 누군가를 지배하거나 차별하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하며 마음과 마음을 잇는 따뜻한 통로가 되고 있다. 식민 지배를 딛고 일어선 한국의 성공 모델이 담긴 우리 말은, 아프리카 청년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언어로 다가가고 있다.

아프리카 식민 언어 지도 [Exploring Africa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아프리카의 목소리, 그 진정한 주권을 기대하며

언어는 한 민족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자, 그 사회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감지되는 언어의 이동과 변화는 식민지 유산을 점진적으로 해체하며 새로운 글로벌 질서에 응답하는 과정이다.

아프리카의 수천 개 언어가 가진 고유한 가치가 더 이상 식민지 언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온전하게 발현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아프리카가 자신들의 풍요로운 언어적 자산 위에 새로운 글로벌 표준을 조화롭게 쌓아 올릴 때, 그들의 목소리는 비로소 가장 아프리카다운 방식으로 세계에 울려 퍼질 것이다.

그 여정에서 우리 한글이 아프리카 청년들에게 새로운 영감과 기회를 주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큰 자부심으로 다가온다. 식민지 언어가 행정·교육·국제 교류의 현실적 도구이면서 동시에 지배의 유산으로 남아 있었다면, 이제 한글은 아프리카와 한국을 잇는 새로운 연대의 길이 되고 있다. 우리와 아프리카가 서로의 언어를 통해 더 깊이 이해하고 협력하는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 외부 필진 기고는 연합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김명희 부사장

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부사장, 단국대 중동·아프리카학 박사, 헬싱키 경제대 MBA, 저서 '물어물어 찾아낸 나의 친구 아프리카', 아프리카지역본부장·파리관장·케냐관장·알제관장·소피아관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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