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원 빚이 4400만원으로, 죽기 전엔 빚 조정 어려워”···은행도 상록수 그늘에 숨었다
9개 업체 ‘주주 만장일치’ 구조
장기연체 채권의 새도약기금 이관 막아
금융사들, 5년간 420억원가량 배당받아

지난 4일 오후 대구시 달서구의 한 여관방. 월세 30만원짜리 13㎡(4평) 남짓의 작은 방에는 벽면을 검게 물들인 곰팡이와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작은 브라운관 TV가 놓여 있었다. 20여년 전 ‘카드대란’ 당시 1030만원의 빚을 져 신용불량자가 된 A씨(55)의 거처다.
A씨는 2000년대 초반 ‘카드대란’ 때 신용불량자가 됐다. 그의 1030만원 빚은 정부와 카드사가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2003년 설립된 민간 배드뱅크(부실채권 처리회사)의 일종인 ‘상록수제일차유동화전문유한회사’(이하 상록수)로 넘어갔다.
일용직 노동자로 수입이 들쭉날쭉했던 A씨는 빚을 갚지 못했다. 상록수로 넘어간 빚에는 연 20%에 육박하는 이자가 붙었다. 1000만원이 조금 넘던 카드 빚은 현재 약 4400만원까지 불어났다. 다른 곳에서 빌린 금액까지 포함하면 그가 갚아야 할 돈은 1억원에 육박했다.
그동안 A씨가 두 손을 놓고 있던 것은 아니다. 재기를 위해 야학을 다니며 2011년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채권자들에게 연락해 자신의 사정을 설명했고 일부는 탕감해주거나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 채권을 넘겨 A씨가 채무조정을 받도록 했다. 그는 그렇게 감액된 빚(원금 462만원)을 2년 넘게 성실히 갚아나갔다.
그러나 상록수는 A씨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갚을 의지가 있어서 조정해주면 갚겠다고 당국에도 이야기하고, 상록수에도 얘기했지만 안 된다고 했다”며 절망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B씨(52)도 카드대란 당시 신용불량자가 됐다. 2000년대 초반 서울 청계천 인근에서 골동품 등을 팔던 그는 ‘카드 돌려막기’로 운영자금을 충당하다가 2300만원의 빚을 졌다. 상록수로 넘어간 그의 채무는 20년이 넘게 지나면서 막대한 이자가 붙어 1억원을 넘었다.
‘신용불량자’ 꼬리표를 단 B씨는 서울의 한 고시원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 노동자로 10년 넘게 살았다.
현재 봉제 관련 일을 하는 B씨는 지난해 이재명 정부의 ‘빚 탕감’ 소식을 듣고 재기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상록수가 보유한 채권은 새도약기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좌절감을 느꼈다.
그는 “오랜 채무를 정리하고 수급자에서 벗어나면 작지만 나만의 봉제 공장을 운영하고 싶었다”며 “희망을 가지고 알아봤는데 상록수 채권은 새도약기금 대상이 아니라고 해 좌절감이 들었다. 끝까지 안 된다고 하면 어떤 방법이 있을지 찾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카드사도 상록수 그늘에 숨었나
빚의 늪에 빠진 장기 채무자의 경제적 재기를 위한 목적이라면 A씨와 B씨의 빚도 이재명 정부가 추진한 새도약 기금에 포함되어야 한다. 원금 5000만원 이하 7년 이상 연체라는 조건에 들어 맞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책의 가장 큰 목표인 재기의 의지도 분명했다.
그러나 이들이 ‘빚 탕감’을 받을 수 없었던 이유는 금융사들이 ‘상록수’라는 특수목적법인 뒤로 숨었기 때문이다. 상록수의 복잡한 의사결정 구조와 새도약기금 협약이 자율 협약이라는 이유로 상록수가 보유한 장기 연체 채권은 새도약기금 참여를 하지 않고 있던 것이다.
상록수 정관은 ‘사원총회의 결의는 총 사원의 동의에 의한다’고 규정한다. 전체 9곳의 주주 중 한 곳이라도 반대하면 채권을 넘겨받을 수 없는 것이다.
과거 정책적으로 빚을 탕감했던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3년 ‘국민행복기금’이라는 배드뱅크 설립 당시에도 주주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상록수 채권은 ‘빚 탕감’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들 금융사들은 23년전 카드대란 당시 발생한 9만명의 7000억원 상당 연체 채권 보유했으며, 이를 통해 최근 5년간 420억원가량의 배당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당국도 정책의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 상록수가 보유한 새도약기금 대상 채권 인수를 추진 중이지만 난항을 겪고 있다. 기본적으로 새도약기금 참여는 금융사 자율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민간 회사인 상록수가 새도약기금 협약에 가입하도록 설득할 순 있지만 정부가 강제할 수단은 없다.
논란이 이는 대목은 상록수의 주주로 참여 중인 회원사 대부분이 개별적으론 새도약기금 협약사라는 사실이다.
상록수 주주 현황을 보면, 신한카드(30%), 하나은행(10%), IBK기업은행(10%), 우리카드(10%), 국민은행(5.3%), 국민카드(4.7%) 등 제도권 금융사가 대부분으로, 나머지 지분 30%를 대부업체 등 3곳이 10%씩 나눠 가진 구조다.
이 때문에 최근 ‘포용금융’을 전면에 내세운 이들이 장기 연체 채권을 출자사를 통해 보유하며 배당을 받는 행태를 두고 앞뒤가 다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상록수를 상대로 다수의 소송을 대리한 김용대 법무법인 한별 변호사는 11일 “상록수는 순수 영리를 추구하는 사기업으로 채권 추심을 전문화해서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회사”라며 “추심 강도는 대부업체와 비교해도 가장 높다”고 말했다. 그는 “정말 나이가 많거나 재산이 없으면 조정을 해줄 순 있어도 기본적으로 채무자가 죽기 전엔 조정이 어려운 것 같다”고 덧붙였다.
상록수 채무자의 빚 조정을 도운 경험이 있는 한 부실채권 업계 관계자는 “20년이 지나면 이 채권들은 소멸시효가 달성될 가능성이 크지만, 채무자들이 금융지식이 부족해 소액이라도 내면서 시효가 연장된 경우가 많다”며 “연체 20년이 넘은 채권은 이제는 상각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또다른 부실채권 업계 관계자는 “은행과 카드사들이 겉으로는 포용금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상록수의 존재와 대상 채권의 보유를 숨기고 있던 것”이라고 꼬집었다.
캠코로부터 새도약기금 대상 채권 매각을 요청받은 상록수 주주들은 현재 내부 검토를 진행 중이지만 회사마다 온도 차가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A은행 관계자는 “채권을 양도하는 취지와 정책적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며 “양도에 대한 동의를 내부 절차에 따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반면 B은행 측은 “채권 규모나 가격 등 구체적인 정보가 포함되지 않아 당장 의사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고 말했다. C카드사 관계자는 “장기연체 채무자의 재기 지원이라는 정책 취지에 공감하고 있다”며 “다만 상록수의 경우 대상 자산 규모 등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해 검토 자료를 요청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새도약기금이란?
금융당국과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7년 이상 연체되고 5000만원 이하의 무담보 채권을 매입하는 프로그램이다. 자율 협약에 참여한 금융회사가 보유한 연체 금융채권을 대상으로 한다. 새도약기금이 연체채권을 매입하면 추심은 즉시 중단된다. 상환능력이 있으면 채무조정 및 분할상환 추진, 기초생활수급자 등 상환능력 상실 시 1년 이내 자동 소각한다.
배재흥 기자 heung@kyunghyang.com, 김경민 기자 kim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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